소설리스트

58화 (54/239)

58화. 13 – 4

“재미있었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진짜로 재미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읽고 싶었다. 이미 아는 내용이지만, 주인공의 성별이 달라졌다는 것만으로 느낌이 달랐다.

재미있다는 말에 레이첼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재미있었다는 말이라도 들을 수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재미없대요?”

그럴 리가 없다. 똑같은 내용으로 나온 소설이 수도에서 인기를 얻고 있으니까. 레이첼 역시 재미 유무 관련해서 이야기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재미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어차피 없애 버릴 거거든요. 레이디, 아니, 유제니가 재미있었다니 다행이에요.”

“없애요? 이걸? 왜요?”

이렇게 재미있는 걸 왜?

놀란 나에게 레이첼이 정말 모르냐는 표정을 지었다. 똑같은 내용의 소설이 나와 있기 때문이라면 좀 바꾸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럼 큰일 날걸요.”

좀 바꾸면 안 되냐는 내 질문에 레이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가? 나는 앤을 쳐다봤지만, 그녀 역시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원고가 그 소설과 아무 상관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안 믿을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렇다. 이렇게까지 똑같은데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에 그 소설을 읽은 적은 없어요?”

“네. 친구가 말해 줘서 알았어요.”

어, 그럼 그 친구가 증인이 되어 주지 않을까? 레이첼이 그 소설을 읽기 전에 원고를 썼다는.

하지만 그것도 틀린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레이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들 제가 뭔가 착각하거나 거짓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거기까지 말한 레이첼의 입이 닫혔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모든 게 제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이 모든 거요?”

“원고나 화재, 죽을 뻔한 거. 전부 다요.”

“당신이 꾸민 거예요?”

내 질문에 레이첼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요. 제가 뭐 하러 그러겠어요?”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첼이 자신의 목숨을 위험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소설을 주인공 성별만 바꿔서 쓸 이유도 없어 보이고.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소설을 통째로 성별만 바꿔서 베끼는 것보다 다른 일을 하겠지.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레이첼은 이상한 일을 겪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수사관에게 말해 볼게요.”

화재 사건뿐 아니라 레이첼이 당한 다양한 사고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해 봐야겠다. 레이첼의 말대로 누군가가 그녀를 노리고 있다면 머지않아 진상이 밝혀질 것이다.

문제는.

“고맙습니다.”

나는 감사 인사를 하는 레이첼에게 아직 고마워하기는 이르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가지 문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레이첼의 착각일 경우와 착각이 아닐 경우.

“저, 혹시….”

레이첼의 배웅을 받으며 그녀의 집을 나서는데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원고요. 다 보셨어요?”

다는 못 봤다. 내가 본 건 계단을 내려오면서 읽었던 앞부분뿐이었으니까. 내가 고개를 젓자 그녀가 아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그거, 두 번째 이야기까지 썼거든요. 혹시 다 보셨으면 두 번째도 비슷한지 여쭤보려고 했어요.”

“확인한 줄 알았는데요?”

확인하고 비슷하다고 인정한 거 아니었어? 내 질문에 레이첼은 고개를 저었다.

“첫 번째 것만요. 무서워서 그다음은 못 보겠더라고요. 좀….”

좀? 계속 이야기하라는 내 재촉에 레이첼이 말했다.

“소름 끼치잖아요. 누군가가 저와 똑같은 이야기를 생각했을 뿐 아니라, 똑같이 썼다는 게. 꼭 요정의 장난 같죠?”

그럴 수도 있겠다. 두 소설은 마치 보고 쓴 것처럼 이야기 진행이나 사건, 등장인물까지 똑같았으니까.

“원한다면, 대신 확인해 줄까요?”

나는 책을 전부 가지고 있다. 그러니 레이첼의 원고를 가지고 비교할 수 있다. 요정의 나쁜 장난 같다는 레이첼의 말을 듣자 궁금해지기도 했다. 두 번째 이야기도 비슷한지.

내 권유에 레이첼은 잠시 망설이더니 안으로 들어가서 원고를 가져왔다. 그리고 내게 내밀며 말했다.

“다 보면 태워 주시겠어요?”

“태워요?”

“어차피 더 못 쓸 거예요. 없애면 미련도 안 생기겠죠.”

그러려나. 나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안 돌려줬습니까?”

건물 밖으로 나오자 내 예상대로 건물 앞을 지키고 있던 데이빗이 물었다. 내가 가지고 들어간 원고를 그대로 들고 나오자 안 돌려줬냐고 물어본 모양이다.

“비교해 보려고요. 얼마나 비슷한지.”

“네?”

데이빗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는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구나. 나는 설명하려다 별생각 없이 길 건너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삯마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게 보인다. 손님을 기다리는 모양이지? 이쪽에 삯마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일렬로 서 있는 마차 중 하나에 누군가가 타고 있는 게 보였다. 정확히는 안에 탄 누군가가 커튼을 살짝 연 채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응?”

뭐지? 내 표정을 본 데이빗이 마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뭐였습니까?”

내 뒤에 있던 로지가 나를 지나쳐 가며 물었다. 누군가가 타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 봤나?

“아무것도 없는데요.”

마차를 전부 확인한 데이빗이 내게 돌아오며 말했다. 나와 데이빗 사이에서 나를 지키고 있던 로지 역시 나를 쳐다봤다.

이상하네. 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누군가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남자였습니까?”

그랬던 것 같다. 곧이어 데이빗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이는 어느 정도였는지를 물었지만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본 건 남자의 눈 정도였다. 커튼에 가려져 있어서 머리카락 색이나 다른 건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럼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거잖습니까.”

마차에 올라타며 데이빗이 허탈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느낌이라는 게 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내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지 호의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인지.

그걸 데이빗에게 설명해 봤자 그는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느낌이 왔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탄 마차는 조용히 비스컨 저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나는 레이첼에게 받은 원고를 가만히 쳐다봤다.

“괜찮습니까?”

엘리엇이 찾아온 건, 다음 날 오전이었다. 이 남자, 귀족 예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잠깐, 이 남자에게 귀족 예법을 가르쳐 주기로 한 게 나였지.

나는 나태한 스승이라고 자책하며 엘리엇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어지간하게 급한 일이 아니면 귀족들은 오전 중에는 남의 집에 찾아가지 않는다. 물론 방문해도 되냐고 카드를 보낸 건 잘한 일이다. 도착해서 보낸 건 잘한 일이 아니지만.

“뭐가요?”

얼마나 급한 일인지 먼저 들어 보고 가르쳐 줘야겠다.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물었다. 오전에 찾아와서 괜찮냐니, 뭐가 괜찮냐는 건지 모르겠네.

“어제 이상한 남자를 봤다고 하던데요.”

이상한 남자? 엘리엇의 질문에 나는 그제야 어제 마차 안에서 나를 지켜보던 남자를 떠올렸다. 하지만 하룻밤 자고 생각해 보니 그 남자가 나를 지켜본 게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나는 차를 가져온 하인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따듯한 찻잔을 손으로 감쌌다.

“어, 남자인지도 확실하지 않아요.”

“남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데이빗과 로지가 어제 있었던 일을 다 엘리엇에게 말한 모양이다. 하긴, 그들은 엘리엇의 부하다. 당연히 말하겠지.

아직 오전이라 약간 서늘했는데 찻잔의 온기 덕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본 건 아니었거든요.”

“그럼 맞을 겁니다.”

응?

나는 단호한 엘리엇의 말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맞는 겁니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내게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잖아요.”

엘리엇의 얼굴에 그럴 리 없다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좀 복잡하지만 제가 여자의 촉을 믿는다고 말하겠습니다.”

음, 이걸 기분 나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내 표정이 복잡해졌는지 엘리엇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두운 정원에서 누가 곁에 있는지 의식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있죠.”

나는 내가 참석한 수많은 무도회와 음악회 등등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홀에서 바람을 쐬려거든 정원으로 나가야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누군가가 내 근처에 있지 않은지, 내가 누군가와 단둘이 되지 않는지 긴장하곤 했다. 그리고 상대가 여자면 안도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라면 상관없지만, 상대가 남자면 괜한 스캔들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

무슨 소린지 알겠다. 나는 여자의 촉을 믿는다는 엘리엇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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