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13 – 2
화재는 창문과 책상에 집중돼 있었다. 책상이냐고 물어볼 정도로, 창문 앞에 놓인 작은 가구는 잿더미로 변해 있었고 그 주변은 재로 엉망이었다. 심지어 침대 위도 회색의 재와 검게 그을린 자국으로 가득했다.
“꼭, 누군가가 책상을 불태우려 한 것 같네요.”
나는 엘리엇의 손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화재로 창문은 검게 그을렸는데 반대편인 출입문과 그 옆에 있는 화덕은 오히려 멀쩡했다.
보통 화재가 일어났다면 그 이유는 화덕이나 램프다. 설마 책상 위에 있던 램프가 넘어지면서 불이 난 건 아니겠지?
“맞습니다.”
대체 왜 화재가 일어났는지 추측하는데 엘리엇이 말했다. 맞다고? 내가 돌아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책상을 불태우려 했습니다. 정확하게는 책상 서랍과 책장을요.”
책장도 있어? 놀라서 돌아봤지만, 책상이 있던 곳은 잿더미뿐이라 설령 책장이 있다 해도 내가 알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책상을 왜 불태운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엘리엇이 부드럽게 나를 방 밖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더 봐야 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다 챙겼으니 괜찮습니다.”
중요한 거라니. 엘리엇이 챙긴 건 이 원고뿐이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에게서 레이첼의 원고를 받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레이첼은 식당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그녀가 글을 쓰는 줄은 몰랐다.
잠깐.
그제야 머릿속에 레이첼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어떤 이야기를 생각해 뒀다고 했다. 그게 내가 최근에 아주 재미있게 읽은 모험 소설과 비슷한 내용이라고도 했고.
“조심하십시오.”
엘리엇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계단 앞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레이첼의 원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거, 내가 아는 내용인데?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내가 아는 것과 같았다. 괴물에게 친구를 잃은 한 남자가 괴물을 잡으러 다닌다. 그러다 괴물에게 쫓기기도 하고 다른 남자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기도 한다.
차이라면, 레이첼의 원고에서는 주인공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거였다.
“유제니?”
엘리엇이 나를 부른 다음에야 나는 내가 이미 계단에서 내려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깊고 좁은 계단이었는데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르겠네.
나는 다시 손에 든 원고를 쳐다본 뒤 엘리엇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원고, 읽어 봤어요?”
“아니요.”
엘리엇은 간단하게 대답했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요즘 인기인 그 소설을 그가 읽었을까? 참고로 올리버는 안 봤다. 이유는 간단하다.
올리버는 글을 읽는 걸 싫어하거든. 어릴 때 오라버니에게 온 편지의 답장을 내가 해 준 적도 있다. 물론 그냥은 안 해 줬지만.
“안 봤습니다.”
책 제목을 불러 주자 이번에도 엘리엇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구나. 나는 재미있다고 덧붙이려다가 멈칫했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저그만 양이 비슷한 이야기를 생각했다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생각만 한 게 아니었나 봐요.”
그러고 보니 친구에게 보여 준 적 있다고 했지. 이미 원고가 어느 정도 완성돼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혹시나 싶어 원고의 마지막 장을 확인했다. 쓰다 말았는지 마지막 종이는 상단만 약간 채워져 있었을 뿐이다. 확인해 보니 내가 읽은 책의 두 번째 이야기에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비슷합니까?”
엘리엇이 물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다. 이런 일도 있네.
“주인공의 성별만 달라요.”
아, 그리고 괴물에게 죽은 주인공의 친구도. 내가 읽은 소설에서는 친구로 나와 있었는데 레이첼이 쓴 이야기에는 주인공의 가족이었다.
나는 다시 원고의 앞으로 돌아가 읽기 시작했다. 사소하게 레이첼의 이야기가 좀 더 납득되는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면 가족이 괴물에게 죽는 걸 발견하는 장면 같은 거.
내가 읽은 소설에선 친구의 집에 놀러 간 주인공이 우연히 발견하고 친구의 복수를 맹세한다. 하지만 레이첼은 같이 사는 가족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주인공은 괴물이 가족을 죽이는 것을 발견한다.
“오, 미안해요.”
정신없이 원고를 읽던 나는 여전히 우리가 건물 안, 계단 아래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엇은 내 옆에서 말없이 기다려 주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응?
나는 그제야 엘리엇이 하나뿐인 창문을 가리지 않기 위해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움직였다면 창문을 가렸을 테고, 어두워서 원고를 읽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정한 사람이네.
나는 나를 위해 문을 열어 주는 엘리엇의 등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해 보이는데 이런 사소한 행동이 다정했다.
“아가씨.”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앤이 괜찮냐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어때요? 찾는 분은 찾으셨어요?”
“아니, 여기 번즈 백작님이 보호하고 계신다네.”
앤의 얼굴에 다행이라는 표정과 놀랍다는 표정이 반씩 섞였다. 나는 엘리엇에게 몸을 돌리며 레이첼의 원고를 내밀며 말했다.
“고마워요.”
“저그만 양에게 직접 전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게 좋겠다. 나는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했고, 엘리엇은 로지와 데이빗에게 나를 저그만 양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고 말했다.
그가 안내해 주는 게 아니었네. 이상하게도 약간 아쉬웠다. 하지만 엘리엇도 해야 할 일이 있겠지.
여기 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살펴봐 준 것만으로도 그는 자기가 해야 하는 범위 이상의 일을 해 준 셈이다. 나는 다음에 보자는 인사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당신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입니까?”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나와 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데이빗이 물었다. 앤은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나는 그가 용병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이에요.”
평민들이 귀족의 호칭을 알기 어렵다. 알 필요도 없고. 사실, 자기가 사는 영지의 영주가 아니면 귀족을 만날 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내 호칭을 잘못 알고 있는 건 부끄럽거나 화낼 일이 아니다.
“뭐가 다른 겁니까?”
이번에는 로지가 물었다.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고귀한 레이디는 공주나 공작의 딸에게 붙는 호칭이에요. 후작과 백작의 딸은 성 앞에 레이디를 붙여서 부르죠.”
로지와 데이빗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신기하네. 발시안에는 공주님이 없다. 하나뿐인 공주님은 내가 태어났을 때 이웃 나라의 왕비님이 되셨다.
그리고 공작에게는 딸이 없고.
고귀한 레이디라는 호칭을 어디서 들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처음 만났을 때 엘리엇도 나를 고귀한 레이디라고 불렀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는 호기심에 물었다.
“고귀한 레이디라는 호칭은 어디서 들었어요?”
모르는 사람들은 보통 비스컨 영애나 비스컨 양이라고 하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라고 실수하는 경우는 없다. 나를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라고 부른 건 엘리엇이 처음이었다.
“어, 어디서 들었지?”
데이빗이 로지를 쳐다보며 말하자 로지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귀족이면 몰라도 평민들이 듣기 쉬운 호칭이 아닌데.
“번즈 대장이겠지. 우리가 어디서 귀족의 이름을 알겠어?”
로지의 말에 데이빗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엇도 평민이라고 들었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번즈 백작은 귀족 출신이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귀족을 많이 알고 있나 보죠?”
어쩌면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드래곤이 어디 있는지 정보를 얻었겠지.
로지와 데이빗은 다시 서로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말했다.
“그, 그렇죠? 귀족을 꿰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잘 아는 것 같았어요. 우리 사이에 최소한 귀족 밑에서 일했던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았으니까.”
“귀족 밑에서 일한 건 아닐걸요.”
그때, 앤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이제 로지와 데이빗이 좀 덜 무서워졌는지 평소처럼 이야기했다.
“귀족 밑에서 일했으면 누군가가 아는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엘리엇 번즈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요.”
엘리엇이 하인들 사이에서도 꽤나 유명한 모양이다. 앤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하기야, 귀족과 가장 가까운 평민이 귀족가에서 일하는 하인들이다. 오죽하면 어머니도 우리가 모르는 소문이 있으면 집사에게 물어볼까.
나는 대화에서 빠져나와 세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름을 바꿨을 수도.”
데이빗의 말에 로지가 재빨리 반박했다.
“그건 아닐걸? 아카데미에 다닌 번즈 백작을 아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귀족 밑에서 일할 때 이름을 바꿨을 수도 있지.”
이어진 데이빗의 반박에 이번에는 앤이 나섰다.
“그럴 리가요. 저런 남자가 있었으면 이름이 달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분명히 나와요.”
뭐라고? 앤의 말에 놀라서 데이빗과 로지를 쳐다보자 두 사람도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세상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세 사람이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 미안해요. 그냥, 번즈 백작이 잘생긴 걸 다들 아는구나 싶어서요.”
그러자 이번에는 앤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왜 그러는 거지? 내가 웃음을 멈추자 로지가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대장이 잘생겼긴 하죠.”
“어, 그런가?”
오히려 데이빗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잘생겼다기보다는 좀, 무섭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