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12 – 7
아직 불을 켜지 않은 탓에 복도 끝은 어두웠다. 유제니는 어둠 속에 묻힌 듯한 엘리엇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이렇게 큰데도 그는 조금만 어두워도 금세 어둠 속에 묻히곤 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사람들은 여기에 유제니만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유제니는 신음을 내뱉었다. 여기서 그녀가 무슨 의견을 내보일 수 있을까. 허락하라고 할 수도 없고, 거절하라고 할 수도 없다. 그건 엘리엇의 마음이니까.
하지만 거절했으면 좋겠다. 그가 거절했으면 좋겠다는 유제니의 생각에 합리적인 이유가 빠르게 붙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남작 부인에게 나쁜 감정은 없지만, 당신을 위해서는 거절하는 게 좋겠네요.”
“남작이 칼을 들고 쫓아올까 봐서요?”
검도 아니고 칼이다. 유제니는 엘리엇의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곧, 엘리엇의 말이 그렇게 틀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고 배우자의 불륜에 펄쩍 뛰는 경우는 흔하다. 자신도 정부를 두고 있으면서 남편의 정부를 괴롭히는 부인의 이야기나, 부인의 정부를 죽이려 한 남편의 이야기는 잊을 만하면 유제니의 귀에 들어오곤 했다.
그녀는 솔직히 불륜은 둘째 치고 정부를 두는 것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런 경우가 꽤 있다는 걸 알았다.
“아니요, 엘리엇. 당신이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엘리엇은 유제니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듣기 좋아서 미소를 지었다가 자신을 향한 그녀의 믿음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냐는 표정이 유제니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가 검을 든 사내 정도는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유제니의 순수한 믿음이, 엘리엇의 기분을 날아오르게 했다.
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유제니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저를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시니 뭐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높게 평가하는 게 아니에요.”
유제니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가까운 사람을 좀 더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 하지만 검을 든 사내 정도는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평하는 건 오히려 번즈 백작을 과소평가하는 편에 가까웠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미행하다 종래에는 해코지하려는 남자를 변변한 무기도 없이 제압하는 걸 봤다. 게다가 그녀를 납치한 자들과 혼자 싸워서 이기기까지 했다.
응? 순간, 유제니의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 때문에 금세 흩어져 버렸다.
“당신은 다아리브혼에게서 눈썹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나왔잖아요.”
심지어 보물도 좀 챙겨 나왔다고 들었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 부분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재물이 아니라 엘리엇의 실력이니까.
유제니의 말에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의도한 거긴 하다. 다아리브혼이 관대하게 원하는 장소까지 보내 주겠다고 했을 때, 그는 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받아들였고 도착 장소 역시 일부러 성 안으로 지정했다. 그의 존재를 알릴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그는 다시 유제니와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야 영원히 이렇게 단둘이 있고 싶지만, 엘리엇은 유제니가 자신을 부담스럽게 느끼기를 바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번에는 응접실을 향해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내가 보기엔, 커널 남작 부인이 당신을 이용하고 싶은 것 같거든요.”
“이용이요?”
“남작에게 복수하고 싶은 게 아닌가 싶어요.”
결혼하고 몇 년 동안 오입쟁이 남편을 견디며 살았다.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은 없었고.
남작 부인에게는 괴로운 세월이었다. 사람들은 수많은 정부를 둔 남작 부부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에 대해 말도 안 되는 루머를 쏟아 냈다. 대부분 남작 부인이 아이를 갖지 못한다거나, 그녀가 제대로 된 부인이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였다.
유제니도 한두 가지 소문은 들었다. 그녀의 귀에 들어온 게 가장 약한 수준의 소문이었음에도 그녀는 깜짝 놀라서 소문을 이야기해 준 사람에게 그런 소리 말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최근에는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 바뀌었어요.”
최근에서야 간신히 어쩌면 남작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남작 부부뿐 아니라 남작의 정부들 사이에서도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생아를 만들기 싫어서 정부를 두지 않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사생아라는 존재는 귀족들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달갑지 않다는 표현이 말하듯, 가문에 위협을 주지는 않는다. 가문의 후계자는 남편만큼이나 부인의 인정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보통, 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에나 후계자로 용납되는 존재가 귀족의 사생아다.
유제니가 보기에도 커널 남작 부인은 참을 만큼 참았다. 남작은 부인뿐 아니라 정부에게도 자식을 보지 못했고, 그건 그녀가 그동안 겪은 수모는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어 주었다. 그러니 그녀가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정부를 만들었다 해도 유제니는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 남작 부인의 정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남자보다 당신이 더 복수에 적합할 거예요, 왜냐면….”
거기까지 말한 유제니의 말이 멈췄다. 잘생겼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걸 엘리엇이 칭찬으로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왜냐면?”
엘리엇은 유제니가 말을 멈추자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유제니는 망설이며 말했다.
“음, 잘생겼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순간, 엘리엇의 눈이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부드럽게 휘기 시작했다.
“남작 부인의 정부가 누군지 모른다고 하셨는데요?”
약간 기분 좋은 표정으로 엘리엇이 물었다. 더 잘생겼다고 말하려면 비교군을 봤어야 한다. 그게 유제니가 부끄러워하는 이유였고.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네. 몰라요. 어쩌면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남작 부인의 정부인지는 모르는 상태에서 보았으니 모르는 거죠.”
“모르지만 제가 더 잘생겼으리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얄미운데 얄밉지가 않았다. 유제니는 여기가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밝았다면 터질 것처럼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엘리엇이 봤을 테니까.
부끄러워하는 유제니의 모습이 생소해서 엘리엇은 계속 싱글벙글 웃었다. 그가 아는 유제니였다면, 아니,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었다면 자기가 잘난 걸 아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고 한마디 했을 것이다.
그것도 좋았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지금도 좋았다.
엘리엇은 그녀를 그만 괴롭혀야겠다고 생각하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아무 이유 없이 방문하신 거라면 매우 기쁘겠지만 그건 아니겠지요?”
응접실 안에는 이미 하인이 다과를 준비해 놓았다. 엘리엇은 직접 유제니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물었다.
그렇다. 유제니는 좋은 차 향기에 잠시 넋을 놓았다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은 사람을 소개받고 싶어요.”
그녀가 아는 누군가를 보호해 줬으면 한다는 말에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가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유제니는 레이첼과의 만남부터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야기까지 간단하게 설명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 같은데 누가, 왜 그러는지 모른다는 말이군요.”
정확하다. 유제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엇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사람을 소개해 주는 건 어렵지 않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도 안다. 그래서 그는 왜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도와주려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유제니 비스컨은 원래 그렇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일 때도 그랬다.
상황은 변했어도 유제니는 그대로라는 게 엘리엇을 행복하면서 동시에 슬프게 했다. 그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비용은….”
“저는 돈을 받지 않습니다.”
경호 비용을 걱정하는 유제니에게 엘리엇은 재빨리 말했다. 돈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유제니에게는 돈을 받을 생각이 없다.
그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그녀에게 무엇을 받을지 잠시 고민했다.
받고 싶은 거야 아주 많다. 장갑을 벗고 손을 잡고 싶기도 하고 하루를 온전히 그와 시간을 보내 달라고 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엘리엇은 그게 시기상조인 요구라는 걸 알았다. 지금 그런 걸 요구한다면 유제니는 기겁하고 그에게서 도망쳐 버릴 것이다.
“이렇게 하죠.”
짧은 생각 끝에 엘리엇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보호해야 할 대상이 여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경호원도 여자인 쪽이 좋겠지.
사람은 많다. 소개해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에게 문제는 유제니에게 무엇을 대가로 받느냐였다.
“귀족들은 이 시기에 물놀이를 간다던데요.”
다 알고 있지만 엘리엇은 모르는 척 물었다. 사실 그는 물놀이를 몇 번 해 본 적도 있다. 그리고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전부 별 감흥이 없었다.
“맞아요. 개인적으로 가기도 하고 크게 행사가 열리기도 하죠.”
거기까지 말한 유제니는 곧 큰 행사가 열린다는 것을 떠올렸다. 올리버가 속한 조정 클럽에서 조정 경기를 연다. 부유한 가문에서 자신이 소유한 배를 강에 띄워 놓고 경기를 응원한다. 배가 없는 사람들은 배가 있는 집안 사람에게 초대를 받거나 강가에 마련된 관중석에서 구경한다.
비스컨 가에는 배가 없다. 배를 제작하는 데 상당한 금액이 들기도 하지만 유지비도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크기가 클수록 보관할 장소도 커지고 관리할 하인의 수도 늘어난다.
비스컨 가는 현 백작이 세이마리아와 결혼하면서 그녀가 가져온 지참금으로 형편이 핀 것이다. 형편이 폈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세이마리아와 결혼하기 전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거다.
비스컨 가는 가난했고 지금은 체면치레를 할 정도로 덜 가난해졌을 뿐이다. 그러니 극장의 박스석을 소유할 정도는 아니라는 걸 엘리엇은 잘 알고 있었다.
“그거 재미있겠군요.”
눈을 빛내는 엘리엇을 보고 유제니는 그가 물놀이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배에 초대하고 싶지만 비스컨 가에는 배가 없다.
그녀는 약간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올리버가 선수니까 비스컨 가에도 초대장이 와요. 우리랑 같이 가요. 배 위에서 보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강가에서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뭐든 재미있을 거니까요.”
응? 유제니는 그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이 남자, 또 듣기 좋은 말을 하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엘리엇이 덧붙였다.
“그리고 배라면, 제가 준비하면 되죠.”
“배를 준비한다고요?”
“아, 혹시 선수의 가족이 아니면 배를 준비하면 안 됩니까?”
그건 아닐 거다. 유제니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확인해 볼게요.”
늘 배 있는 집안의 초대를 받거나 강가에서 구경해서 엘리엇처럼 초대받은 사람이 배를 준비해도 되는지는 생각도 안 해 봤다.
알아보겠다는 유제니의 말에 엘리엇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보호해야 할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 주시면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녀를 보호하면 되는 거지요?”
그렇다. 유제니는 여유 있는 엘리엇의 태도에 안도감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에게 맡기면 뭐든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