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12 – 6
“관심 없습니다.”
이젠 아예 잡상인 취급이다. 엘리엇은 몸을 돌리더니 문을 열었다. 이제 그만 나가 보라는 태도에 이멜다는 기분이 상했다.
이럴 거면 왜 들어오라고 한 거야? 그녀는 울컥해서 말했다.
“들어 보는 게 좋을 텐데요.”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그가 입을 다물자 그걸 긍정의 표시로 이해했는지 이멜다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스턴 자작님을 누군가가 공격했을 때, 레이디 비스컨이 당신과 함께 있었다고 했다던데요.”
그런데? 엘리엇은 표정 변화 없이 커널 남작 부인을 쳐다봤다. 이멜다는 약간의 조바심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그 시간에 저는 백작님이 혼자 있는 걸 봤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엘리엇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그게 뭐가 문제냐는 태도에 이멜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스턴 자작이 공격받은 사건에서 유제니가 혐의를 벗은 건 엘리엇이 알리바이를 대 줬기 때문이다. 이멜다는 그 알리바이가 조작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에스턴 자작을 공격한 자는 잡혀서 감옥에 들어갔다. 아마 지금쯤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 간수들이 취조라는 이름의 고문을 하고 있겠지.
엘리엇이 그를 그냥 둔 건, 자신이 죽이는 것보다 그게 더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통을 주기 위한 고문은 즐기지 않는다.
그게 그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지도 않을뿐더러, 기분만 상하기 때문이다.
물론 범인이 감옥에서 풀려날 아주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었다면 엘리엇은 그를 순순히 치안관에게 넘기지 않았을 거다.
“범인이라면 이미 잡혔는데.”
애매한 반말에 이멜다는 불쾌감을 느꼈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는 엘리엇을 잡아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 이 끔찍한 소문만큼이나 무시무시한 남자를 협박하는 것도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백작님이 레이디 비스컨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건 변하지 않죠.”
그런데? 다시 엘리엇의 얼굴에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그냥 재미로 레이디 비스컨을 도와준 거였나?
이멜다의 머릿속에 그런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에게는 약혼자가 있고요. 백작님이 그녀를 위해 가짜 알리바이까지 대 줬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어설픈 협박에 엘리엇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커널 남작 부인을 쳐다봤다.
변명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그가 신세를 지고 있는 비스컨 가의 사람이니 도와주려 한 거라고 해도 되고, 진범을 엘리엇도 봤기 때문이라고 해도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커널 남작 부인을 당장 쫓아내지 않는 건, 그녀가 손에 쥐고 흔들려 하는 게 유제니의 평판이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잠시 커널 남작 부인이 이 집에 온 걸 누가 아는지 생각했다. 집사는 안다. 하지만 집사는 번즈 백작에게 충성할 것이다.
“내 애인이 돼 줘요.”
그때, 커널 남작 부인의 입에서 천하의 엘리엇조차 놀랄 요구가 흘러나왔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요구에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고, 번즈 백작의 반응을 끌어냈다는 기쁨에 이멜다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진짜로 연애하자는 게 아니에요. 일 년만 내 애인 행세를 해 주면….”
해 주면? 엘리엇이 계속 말하라는 표정을 짓자 이멜다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당신과 레이디 비스컨의 사이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이야기해도 상관없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번즈 백작이 레이디 비스컨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이 쌍방인지 일방인지 모르기 때문에 입 다물고 있을 테고.
엘리엇은 자신의 평판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유제니, 한 명뿐이다.
그는 느릿하게 허리에 손을 얹었다. 쓸데없이 적을 만들 생각은 없다. 하지만 상대방이 손에 쥐고 흔들려 하는 게 유제니 비스컨이라면, 무시해도 상관없을 적은 아니었다.
“커널 남작 부인, 당신 말대로 내가 레이디 비스컨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치지.”
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치는 게 아니라 있다. 이멜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번즈 백작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를 해 봤다.
어느 날 갑자기 성에 나타난 그는 드래곤에게서 나라를 지킨 공로로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사교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번즈 백작이 레이디 비스컨의 알리바이를 대 줬다고 들었을 때 조금 놀랐다. 그리고 조사 끝에 그가 참석한 행사는 대부분 레이디 비스컨이 참석한 행사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관심이 있는 거다. 그것도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이멜다는 이게 큰 약점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귀족의 약혼과 결혼이 어떤 건지 안다.
“거기서 내가 당신과 가짜로 연애를 하는 게 무슨 상관이지?”
“서로의 가리개가 되어 줄 수 있죠.”
“가리개?”
“나와 연애한다고 알리면 사람들은 당신과 레이디 비스컨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레이디 비스컨이 결혼해도 번즈 백작은 그녀와 불건전한 관계를 이어 갈 수 있다.
그녀는 말을 잇지 않았지만 거기 내포된 의미만으로 엘리엇을 화나게 하기 충분했다.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리고 경멸을 감추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불륜을 저지르는 동안 그걸 감춰 주겠다는 건가?”
그렇다. 이멜다는 입을 열었지만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내가 이런 짓을 하고 있다니.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엘리엇은 여전히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그래요.”
이멜다의 대답에 엘리엇은 화를 눌러 참았다. 유제니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차라리 평판을 포기하고 파혼을 하고 말지, 그런 부도덕한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같은 귀족 사회에 있는 커널 남작 부인이 모른다는 게 화가 났고, 커널 남작 부인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도 모른다는 게 화가 났다.
“남작 부인. 레이디 비스컨께 감사하는 편이 좋을 거야. 그녀가 무지는 잘못이 아니라고 했거든.”
물론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지도 잘못이다. 하지만 그는 유제니의 모든 게 옳다고 생각했고,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짓을 시키느니 그 사람의 배우자를 죽이는 쪽을 선택하겠어.”
이어진 엘리엇의 말에 이멜다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파랗게 질려서 도망치듯 물러났다. 그리고 적대적으로 말했다.
“당신도 똑같은 사람이군.”
이멜다는 그렇게 말하고 휙 나가 버렸다. 엘리엇은 그녀를 잡아서 유제니에 대해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복도로 나갔다.
하지만 응접실 앞에 서 있던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레이디 유제니 비스컨께서 방문하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엘리엇의 신경이 유제니로 돌아갔다. 그는 재빨리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이면 언제든지 맞이하게. 더그!”
언제든지? 말 그대로 늦은 시간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집사는 그렇게 물어보려다 더그를 찾는 주인의 목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이 층에서 엘리엇의 부름을 들은 더그와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왔다. 엘리엇은 집사에게 어서 방문 허락을 전하지 않고 뭐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여기서 나간 여자 좀 조사해 주게.”
집사가 비스컨 가에서 나온 하인에게 언제든지 방문해도 좋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떠나자 엘리엇이 더그에게 말했다. 이름은 이멜다 커널. 사교계에서 위치가 어떤지, 커널 남작이 어떤 사람인지까지 전부.
“커널 남작가와 친분이 있습니까?”
한 시간 뒤, 비스컨 가의 하인에게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자 유제니가 방문했다. 엘리엇은 그녀를 직접 맞이해서 응접실로 안내하기 전에 집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단둘이 복도를 걷고 있었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한 질문이었는데 유제니의 반응이 이상했다. 엘리엇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문제가 있는 집안입니까?”
문제야 아주 많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걸 어떻게 엘리엇에게 설명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는 신흥 귀족이고 그에게 귀족 사교계의 폐단을 이야기하는 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다. 유제니는 호사가들의 입이 아니라 자신이 설명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커널 남작이 조금 소문이 안 좋아요. 뭐라고 할까. 이성에게 아주 관심이 많거든요.”
무슨 소린지 알겠다. 엘리엇은 유제니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그는 피식 웃고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바람을 피우는군요.”
유제니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좀 부끄럽지만, 귀족 중에 정부를 두는 사람은 그렇게 드물지 않아요.”
심지어 고정적인 정부 한 명을 두는 걸 바람피운다고 하지 않을 정도다. 유제니는 재빨리 덧붙였다.
“전 동의하지 않지만요.”
“커널 남작은 정부가 한 명이 아닌 모양이군요.”
그렇다. 유제니가 아는 수만 다섯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부분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커널 남작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했다. 굳이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커널 남작 부인은 어떻습니까?”
엘리엇의 질문에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다는 한숨에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만약 그녀가 계속 커널 남작 부인을 안타까워한다면, 오늘 남작 부인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알려 줄 생각이었다.
“전 그녀의 행동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해는 해요.”
“남작 부인에게 말입니까?”
“최근 그녀에게 정부가 생겼거든요.”
그래? 엘리엇의 머릿속에 아까 그에게 찾아와서 가짜 애인이 되어 달라던 커널 남작 부인이 떠올랐다. 그는 유제니에게 물었다.
“그걸 이해하신다고요?”
“동의는 안 하지만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엘리엇의 얼굴에 떠올랐다. 유제니는 그를 올려다보고 피식 웃은 뒤 자신의 손을 얹고 있는 그의 팔을 반대쪽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정부를 두는 거에 동의는 안 하지만 남작 부인이 참을 만큼 참았다는 건 이해하거든요.”
남편의 바람기에 반발해서 정부를 뒀다는 말이다. 엘리엇은 유제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복도 끝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사실, 아까 남작 부인이 방문해서 제게 애인이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