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12 – 4
놀랍게도 올리버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좀 생긴 남자들이 싫더라. 꼭 저렇게 얼굴값을 하려고 하거든.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난 비스컨 백작이 될 사람이거든?”
“어느 후작가나 공작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비스컨 백작가보다 더 잘되는 거잖아. 안 그래?”
아니면 공주님의 남편이 되거나. 공주님은 없지만 말이다.
“내가 뭐 하러 이미 가진 걸 포기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후작가나 공작가의 아가씨와 결혼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오, 후작가나 공작가에 미혼 여성이 없다는 건 알아? 나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손뼉을 쳐 줬다. 올리버에게 그런 지식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당연하게도 올리버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손뼉 치기를 멈추고 말했다.
“그건 로렌도 마찬가지지. 신분 상승보다 의상실을 운영하는 거로 충분한가 보지.”
올리버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까 그랬잖아. 올리버가 가진 건 외모뿐이라고. 성격은 완전 한심하고 짜증 난다.
“걔에게 옷 만드는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라며. 그게 잘되겠어? 내 말은, 안정적인 미래를 찾으라는….”
답답한 소리를 하네. 나는 올리버의 말을 잘랐다.
“오라버니가 비스컨 백작이 되면 우리 집안이 안 망할 거라는 보장은 있어?”
“유제니, 말이 심하다.”
“먼저 남의 인생에 대해 심한 말을 한 건 오라버니야.”
더 이상 올리버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방에 가서 책이나 읽어야지.
하지만 짜증이 나게도 올리버가 내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아, 난 걔를 걱정해서….”
“올리버, 걔 이름이 뭔지나 알아?”
로렌의 이름을 알기나 해? 아니나 다를까 올리버는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빅토리아?”
“오, 성은?”
“성? 어, 성은 아마, 아담스였던가?”
“와, 대단하네.”
내 칭찬에 올리버는 잠시 ‘어라?’ 하더니 곧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비해 나는 착잡했다. 세상에, 우리 집안 진짜 망하겠네.
“뭘 뿌듯해해? 다 틀렸거든? 걔 이름은 로렌 리즈야.”
내 지적에 올리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내가 자신을 놀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욱했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다들 걔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걸?”
“생각한 걸 그대로 말하는 건 네 살짜리 어린아이나 하는 짓이지. 비스컨 백작이 될 사람은 상황을 파악하고 말을 가려 할 줄 아는 최소한의 예의를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다시 올리버의 얼굴에 너 잘났다는 표정이 떠올랐고 나는 어쩌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줄리아가 화난 건 내가 걔 친구를 예쁘다고 해서야, 친구 인생을 이래라저래라해서야?”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나는 올리버에게 눈치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비스컨 가가 망하지는 않겠군.
“둘 다지.”
“둘 다라고?”
무슨 소리냐는 올리버의 반응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친구잖아. 질투하면서 동시에 걱정할 수도 있지. 오라버니는 안 그래?”
남자들은 안 그러나?
다행히 남자들도 그러는 모양이다. 올리버는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네.”
뭐야. 왜 놀라는지 모르겠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데 집사가 계단 밑으로 다가왔다. 그는 나와 올리버에게 늘 그렇듯 뭔가 필요한 게 있느냐는 표정을 짓더니 곧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떤 여자분이 아가씨를 만나려 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여자분이요?”
오늘 방문하기로 한 사람은 없다. 줄리아도 연락 없이 온 거였고.
하지만 줄리아는 줄리아라 가능한 거다. 우리 집안과 에스컬레가는 친척이고 줄리아는 우리 집 사람들과 가까우니까.
연락 없이 올 만한 여자가 있던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빅스가 말했다.
“집 앞에서 망설이고 있더군요. 명함이나 편지는 없었습니다. 다만, 아가씨와 서점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서점?
처음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랑 서점에서 만났다고? 내가 서점에서 만났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서점 주인밖에 없는데?
하지만 곧바로 머릿속에 나와 부딪친 여자가 생각났다. 잠깐, 그 여자 이름이 뭐였지?
“모르는 사람입니까?”
빅스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당장 그녀를 쫓아내겠다는 듯한 태도에 나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 아는 사람이에요.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집사는 금세 누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물러나자 올리버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서점에서 만난 여자?”
“어, 뭔가 도움이 필요하면 오라고 했거든.”
내 명함을 줬던가?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다음 순간, 서점에서 만난 여자의 이름이 반짝하고 떠올랐다. 레이첼! 레이첼 저그만이다.
“도움이 필요하면 오라고 했다고?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그건 아닌데.”
“맙소사, 유제니.”
올리버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대책 없는 짓을 한 것 같잖아.
“아무나 그렇게 막 도와주면 안 된다고 했지.”
“언제?”
올리버의 말에 나는 뻔뻔하게 물었다. 분명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말을 한 건 올리버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내 질문에 오라버니는 당황했고 나는 그 틈을 타서 집사가 레이첼을 안내한 작은 응접실로 향했다.
“세상에, 아가씨, 아니, 레이디, 어, 레이디 맞죠?”
응접실에 앉아 있던 레이첼은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내가 비스컨 백작의 딸이라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네, 레이디 비스컨이에요.”
“제, 제가 그때는 몰라뵙고 그만 무례를….”
무슨 무례? 나는 레이첼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무례라고 할 만한 행동이나 말을 한 적이 없다. 레이첼 역시 자신이 딱히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는지 우뚝 멈췄다.
“어, 그러니까 제가 몰라뵙고 실례를….”
“내가 말 안 했으니까요.”
내가 레이디 비스컨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내가 말 안 하는데 그녀가 어떻게 알겠어? 내가 레이디 비스컨인 걸 몰랐다는 게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신경 쓰지 말라는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앉아요.”
레이첼은 그래도 되는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다시 앉으라고 말하자 소파에 앉아 허리를 세웠다.
“괜찮아요?”
그제야 나는 그녀가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오른손과 손목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가 깜짝 놀라서 다시 물었다.
“설마 그때 나 때문에 다친 거예요?”
“아니에요.”
내 질문에 레이첼 역시 놀라서 재빨리 대답했다. 나랑 부딪치면서 다친 게 아니란 말이다. 나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로요? 나 때문에 다친 거라면 내가 치료비를 낼게요.”
나한테 부담을 줄까 봐 그러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 주치의를 불러서 진료를 부탁하면 되니까.
하지만 정말로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왼손으로 붕대를 감은 오른손과 손목을 감쌌다. 그리고 다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은, 전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오라고 하셨잖아요?”
“네. 무슨 일 있어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와주겠다고 했다. 레이첼은 다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게, 제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요.”
무슨 일인데 저렇게 뜸을 들일까. 그사이, 하인이 다과를 가지고 들어왔다. 레이첼은 하인이 차와 케이크를 내려놓는 동안은 입을 다물었다. 나 외의 누군가가 듣는 걸 원하지 않는 모양이다.
“들어요. 그 케이크, 아주 맛있어요. 덕분에 우리 집 요리사가 화가 단단히 났답니다.”
나는 하인이 차를 따르는 동안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레이첼에게 케이크를 권했다. 전에 먹다가 남기고 온 그 케이크다.
당연히 케이크 한 홀을 사다 달라고 한 내게 우리 집 요리사, 루스가 투덜거렸다. 자기 케이크가 마음에 안 드는 거냐고.
솔직히 말하면 루스의 케이크는 그저 그렇다. 그가 잘하는 건 요리고, 그중에서도 식사용 파이가 최고다.
“마, 맛있네요.”
하인의 눈을 의식했는지 레이첼은 케이크를 아주 조금 입에 넣어 씹으며 말했다. 표정만으로는 내가 억지로 종이를 먹게 한 것 같다.
다행히 하인은 신경 쓰지 않고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라는 말만 남긴 채 떠났다.
“차도 들어요. 내가 좋아하는 찬데 달콤한 것과 잘 어울려요.”
우리 집에서 나만 마시는 차다. 어머니와 올리버는 너무 무겁고 쓰다고 싫어하지만 이게 케이크와 가장 잘 어울려서 나는 좋아한다.
때로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차만 한 잔 마시기도 할 정도로.
레이첼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시간은 많다. 나는 차를 홀짝이며 레이첼이 이야기할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렸다.
“제가 너무 예민한 건지도 모르지만요….”
드디어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나는 얼른 찻잔에서 입을 떼고 말했다.
“그건 이야기를 들어 보고 판단할게요.”
다행히 그게 그녀의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 준 모양이다. 레이첼은 약간 긴장이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누군가가 저를 해치려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