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12 – 2
“네.”
엇. 그렇게 바로 대답할 줄은 몰랐는데. 오히려 당황하는 올리버에게 엘리엇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리고 비틀린 웃음만큼이나 삐딱하게 물었다.
“안 됩니까?”
안 될 거야 없다. 특히나 요즘처럼 어닝이 못마땅할 때는 더더욱.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올리버는 안 되는 이유가 떠올랐다. 그는 최대한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안 되지. 혹시 모르나 본데….”
“레이디 비스컨은 이미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려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알고 있다. 엘리엇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그에게 못 알려 줘서 안달인 것처럼 굴고 있다. 특히나 유제니가.
“그래.”
올리버는 엘리엇의 반응을 보고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조금 부드럽게 말했다.
“내 동생은 약혼했지. 어닝 렌시드와 말야.”
괜찮은 집안이다. 부유하고 유서 깊은 렌시드 자작가니까. 어닝은 유순하고 세심한 성격이니 고집 센 유제니에게 잘 맞을 거라 생각했다. 최근 사건들만 아니었으면 올리버는 물론 비스컨 백작 부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나는 유제니를 파혼시킬 생각 없어. 그게 그 애에게 흠이 될 테니까.”
마치 유제니의 혼담에 대한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듯한 올리버의 말에 엘리엇은 피식 웃었다. 자식의 혼담은 아버지가 책임을 진다. 만약 비스컨 백작이 사망했다면 올리버의 말이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엘리엇이 올리버를 부르는 호칭이 비스컨 남작이 아니라 비스컨 백작이었겠지.
“남작께는 그런 권한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이놈 봐라?
빈정대는 엘리엇의 말에 올리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닝보다 좀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좀 흔들리기 시작했다.
“권한은 없지만, 자격은 있지. 난 그 애의 하나뿐인 오라버니니까.”
그건 맞는 말이다. 게다가 비스컨 백작이 사망하거나 은퇴하면 올리버가 권한을 갖게 되기도 하고.
엘리엇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올리버는 그가 자신의 말에 동의했다고 판단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뭐, 어닝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아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엘리엇은 결론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던 이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 이거 어렵네. 올리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가 원하는 건 하나다. 비스컨 가의 이득.
물론 그는 자신의 여동생을 아꼈다. 그녀가 원한다면 자신이 나서서 어닝과의 혼담을 깨 주겠다고 한 건 빈말이 아니었다. 만약 유제니가 엘리엇과 함께하길 원한다면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번즈 백작은 신흥 귀족이지만 부유하지 않은가. 유제니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고. 그녀에게 사사건건 간섭할 렌시드 자작 부부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번즈 백작과 유제니를 이어 주기 위해 무리하게 렌시드 가와의 혼담을 깰 생각도 없었다. 그랬다가 비스컨 가가 손가락질받으면 곤란하니까.
“난 유제니가 행복하길 바라. 그리고 동시에 내 가문에 아무 흠집이 없길 바라지.”
여전히 엘리엇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젠장. 올리버는 자신이 이런 이야기에 약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잘생긴 외모와 남 부러운 것 없는 집안. 올리버 비스컨은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경험이 적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태도를 조심해 달라는 말이야.”
“제 태도가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엘리엇은 선을 넘는 행동은커녕 선에 가까워진 적조차 없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딱 한 가지에 대해서는 자신과 올리버의 의견이 같다는 것을 인정했다.
유제니 비스컨의 평판. 두 사람 다, 그녀의 평판에 흠이 가는 것만은 바라지 않았다.
“내 말은….”
욱해서 말하려던 올리버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어닝은 괜찮은 녀석이다. 렌시드 자작가는 괜찮은 집안이고.
괜한 오지랖으로 여동생에게 더 좋은 남자를 붙여 주겠다고 이 짓을 하고 있다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물러나며 말했다.
“없었던 일로 하게.”
대체 뭘까. 엘리엇은 멀어지는 올리버를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다. 그가 아는 올리버는 가장 비겁한 배신자였다. 의리도, 정도 없는 비열하고 비겁한.
그가 마음 쓰는 건 단 하나, 자신의 명예뿐이었다. 그런 작자가 레이디 비스컨을 걱정한다고? 웃음도 안 나온다.
“어, 올리버.”
엘리엇과 대화를 중단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온 올리버는 막 클럽 안으로 들어온 어닝과 부딪쳤다. 방금 전 엘리엇과 답답한 대화를 하고 나니, 어닝을 향한 올리버의 호감이 되살아났다.
“어닝, 잘 지냈나?”
“유제니는 어떻습니까? 며칠 안에 방문하려고 하는데요.”
그녀가 습격받았다는 소식은 어닝도 들었다. 곧바로 괜찮냐고 편지를 보냈고.
하지만 어닝의 반응에 올리버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답답한 엘리엇도 마음에 안 들지만 어닝의 이런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습격받은 약혼자를 바로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며칠 안에 방문하겠다니. 아무리 귀족의 결혼이 가문 간의 결합이라고 해도 이런 미적지근한 태도는 올리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올리버에게 바짝 다가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행동 똑바로 하게, 어닝 렌시드.”
“네? 어, 올리버?”
“최근 자네와 자네 집안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어닝뿐 아니라 렌시드 자작 부부 역시 방문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례적인 괜찮냐는 편지만 하나 보내 왔을 뿐이다. 그것도 자작 부인의 이름으로만.
올리버의 경고에 어닝의 기분도 상했다. 그 역시 유제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분명 번즈 백작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유제니가 번즈 백작과 가깝게 지내지 않으려 노력한 건 인정하지만 그녀가 쓸데없이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면 번즈 백작이 도와줄 일도 없었을 거다.
“그건 제가 할 말인데요.”
“뭐?”
어닝의 반격에 올리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어닝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위험에 처하랍니까? 얌전하게 집 안에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닙니까?”
어닝의 목소리가 커진 탓에 방 안의 사람들이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올리버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황이 아니라 분노로.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어닝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번즈 백작과의 답답한 대화 때문에 어닝을 향한 호감이 되돌아왔다는 건 취소다.
어닝을 향한 그의 호감은 다시 수직 낙하하기 시작했다.
“말조심해, 어닝 렌시드.”
“태도를 조심해야 할 건 유제니겠죠.”
어닝은 해선 안 될 짓을 했다. 누구나 가족은 건드리면 안 되는 거다. 올리버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 그는 어닝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뭐….”
뭐 하는 거냐고 움찔하는 어닝의 귀에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태도 운운해? 어디 한번 태도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뭐?
어닝은 깜짝 놀라서 올리버를 쳐다봤다. 여전히 올리버는 어닝에게 바짝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가 번들거리는 게 보였다.
분노에 찬 눈동자에 어닝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설마.
어닝은 올리버가 자신의 비밀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알 리 없다.
그때, 정원에서 엘리엇이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늘 어닝에게 보여 주던 그 경멸하던 표정도.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약점을 잡았다는 표정이 올리버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는 화가 한풀 꺾인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물론 여전히 그 시선은 어닝을 향해 있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엘리엇이 서 있었다. 그는 클럽의 직원에게 차를 한 잔 가져오라고 지시한 뒤 두 사람이 잘 보이는 벽에 기대섰다.
그 태도는 어닝이 올리버가 들은 이야기라는 게 엘리엇이 한 이야기일 거라고 판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이걸 유제니와 어머니께 말하지 않은 건 자네의 명예를 위해서야. 아직은 그걸 걱정해 줄 정도로 자넬 좋아한다는 뜻이지.”
올리버의 협박에 어닝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올리버는 다시 한 걸음 물러나서 자신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어닝의 표정을 확인한 뒤 말했다.
“태도 똑바로 해.”
어닝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그와 올리버를 구경하는 엘리엇을 향했다.
번즈 백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어닝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직원이 가져다준 찻잔을 받아 들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리고 올리버와 똑같이 경고의 시선을 던지고 몸을 돌렸다.
젠장.
어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단 잘라 내야 한다. 그는 그 장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다친 데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줄리아의 말에 나는 아무 말 없이 차를 홀짝였다. 그게 내 계획이었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다들 들어 주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위험한 짓을 했냐고 하니 아무 말도 안 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나는 안전했다. 그 뒤로 나를 데려다주며 엘리엇이 이야기해 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마차를 보내고 혼자 나를 따라왔다고.
나를 미행한 멍청이와 달리 그는 건물과 나무를 적절히 이용했다고 한다. 드래곤의 둥지를 찾아내서 침입한 사람이다. 몸을 숨기는 데는 이 나라 누구보다 잘하지 않을까.
“아버지 말이, 그 남자는 조만간 재판을 받을 거래요. 죄가 한두 개가 아니니까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못 나올걸요?”
나를 위로하려는 듯한 줄리아의 말에 미소가 흘러나왔다. 혹시라도 케스로가 출소해 내게 악감정을 품을까 봐 다들 걱정하긴 했다.
하지만 애초에 난 그가 나를 그렇게까지 미워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왜 나한테 뒤집어씌웠는지도 에스컬레 경이 아셔?”
그게 제일 궁금했다. 하지만 다들 내가 케스로에게 관심 갖는 걸 싫어해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모르겠어요. 그 남자, 정신이 좀….”
이상하다는 거겠지. 이해가 된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도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고.”
“뭐라고 해요?”
줄리아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진짜 제정신이 아닌 소리였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인상을 썼다.
“내가 자길 아는 것처럼 굴더라고. 아니, 반댄가?”
내가 그에게 뭔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굴었다. 문제는 나는 살면서 고든 케스로라는 사람은커녕 이름도 못 들어 봤다는 거였다.
“그리고 또 나를 마녀라고 하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