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12 – 1
얼마 지나지 않아 커런트에 발행되는 신문에 고든 케스로의 기사가 실렸다. 에스턴 자작을 공격하고 레이디 비스컨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다고 한다.
덕분에 커런트 사람들은 한동안 그 이야기를 소재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쳤다. 케스로는 할아버지의 형이 귀족인, 엄밀히 말할 필요도 없이 평민이었고 그가 누명을 씌우려 한 건 레이디 비스컨이다.
비스컨 백작가의 하나뿐인 딸이자 렌시드 자작가와 혼담을 맺은 아가씨.
그가 레이디 비스컨에게 누명을 씌우려 한 게 에스턴 자작의 무도회에서 우연히 부딪쳤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가벼운 충격에 빠졌다.
“이래서 아무나 부르면 안 된다니까요.”
“설마 에스턴 자작가에서 그 작자를 초대했을까요?”
“초대받은 사람이 데려왔을 수도 있죠.”
“동반자는 확인을 안 했나 보군요.”
안타깝다는 대화들 사이로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들 초대받은 사람이 데려오는 사람은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 고민되기 때문이다.
“에스턴 경의 초대였다는군요.”
같은 시각, 클럽에서도 고든 케스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잘 차려입은 남자들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케스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에스턴 경이요? 그렇다면….”
“아버지를 공격한 자를 초대한 거죠.”
클럽 안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단순한 강도 사건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공격한 패륜 사건일 가능성이 생겼다.
다들 케스로가 에스턴 경의 사주를 받은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비스컨 남작!”
그때, 올리버 비스컨이 클럽 안에 나타났다. 조정을 즐기고 온 터라 그의 옷차림은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 들었네. 자네 여동생이 고초를 겪었더군.”
“많이 놀랐겠어.”
사람들은 재빨리 올리버에게 아는 척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올리버는 사람들이 얼마 전에 일어난 유제니 비스컨이 습격받은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그래.”
사람들의 관심이 몰려오자 올리버는 씩 웃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그는 사람들의 이런 관심이 좋았다.
“큰일 날 뻔했지. 번즈 백작이 지나가고 있어서 다행이었어.”
신문에도 나왔다. 번즈 백작이 레이디 비스컨을 습격한 케스로를 보고 그녀를 구해 줬다고.
번즈 백작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수군거리다가 금세 지난번에도 레이디 비스컨을 번즈 백작이 구해 줬다는 걸 떠올렸다.
“자네 동생은 집 안에 좀 있는 편이 좋겠어.”
누군가가 농담처럼 말했다. 무슨 소리야? 올리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나가기만 하면 사건이 일어나니까요. 혼자 다니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 그런가? 올리버는 그들의 말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맞는 말이라고도 생각했다. 번즈 백작과 함께 돌아온 그 날, 그와 그의 어머니는 왜 혼자 돌아다녔냐고 유제니를 꾸짖었다.
물론 호락호락 혼날 유제니도 아니다. 그녀는 번즈 백작에게 뒤따라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주장했고 원래도 혼자 다니는 일이 종종 있지 않았냐고 따졌다. 이번 일은 운이 나빴던 거지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지만 유제니의 잘못이다. 그런가? 올리버는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던 유제니의 주장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사람들의 뒤에서 누군가가 경멸 어린 말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 계시는 분들도 혼자 다니지 않는 편이 좋겠군요. 저보다 강한 사람은 없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번즈 백작.”
올리버는 엘리엇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를 돌아본 사람들은 거기 서 있는 번즈 백작을 보고 양옆으로 갈라졌다.
약간 흐트러진 차림의 올리버와 달리 엘리엇은 완벽한 차림새였다. 엘리엇은 올리버의 젖은 머리카락과 주머니에 적당히 쑤셔 박아 둔 크라바트를 보고 입술을 비틀었다.
만약 엘리엇이 저런 차림새였다면 클럽 안에 들어오기 전에 지배인이 먼저 지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올리버에게 그런 지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비스컨 백작가의 후계자기 때문이다.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란 그런 것이다. 예절에 약간 어긋나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은퇴한 상급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로 내려가 농부 차림으로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그건 그들이 권위를 누리는 방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비스컨 남작.”
엘리엇은 올리버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는 이런 점 때문에 올리버가 싫었다. 남들이라면 피하기 힘든 도의적인 비난을 피할 수 있는 기득권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이.
그를 경멸하는 건 다른 이유였지만 싫어하는 건 이런 이유였다.
그리고 정확하게 같은 이유로 유제니를 존경했다.
그녀는 올리버와 똑같이 자신이 예의에서 약간 어긋나는 것 정도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예의 바르려 노력했다.
“자네보다 강하지 않으면 혼자 다니지 말라니,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군그래.”
올리버는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엘리엇을 자신의 옆자리에 안내했다. 농담으로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엘리엇은 웃지 않았다.
그는 모여든 사람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범죄자를 잡으려 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를 가둬 두려 하다니, 대단히 범죄자다운 생각 아닙니까?”
번즈 백작의 날 선 반응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동시에 사람들은 오싹해졌다. 번즈 백작의 말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이 혼자 다닌다면 자신이 손을 봐 주겠다는 의도로 읽혔기 때문이다.
아, 이 녀석 왜 이래? 올리버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 앉게. 그렇지 않아도 자네 이야기를 하던 참일세.”
올리버 덕분에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사람들은 최근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윗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 그 주변에 자리 잡았다.
유서 깊은 비스컨 백작가의 후계자, 비스컨 남작과 신흥 귀족인 번즈 백작. 객관적으로 보기엔 아직은 가장 촉망받는 사윗감이다.
엘리엇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올리버가 가장 잘생긴 미혼남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스컨 백작가는 유서 깊은 가문이다. 올리버는 차기 백작이고.
물론 가난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체면 유지도 못 할 정도는 아니니 부유한 집안의 아가씨라면 노려 볼 만했다.
성격이나 소문도 딱히 흠잡을 데가 없다. 유쾌한 성격에 남녀노소 모두와 잘 어울리는 데다가 도박이나 알코올 같은 나쁜 버릇도 없다. 여자에 대한 나쁜 소문도 없었다.
그에 비해 엘리엇은 신흥 귀족이다. 심지어 조부모까지 올라가도 귀족이 없는 완전 평민. 그가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윗감으로 부상한 건 단 세 가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뒤돌아볼 정도로 잘생긴 외모와 드래곤의 둥지에서 가져왔다는 어마어마한 재산.
그리고 백작이라는 작위 때문일 것이다.
“생각보다 성격은 별로군.”
“건방지다는 말은 들었네만.”
약간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엘리엇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잘생긴 외모에도 아직 접근하는 집안이 없기에 왜 그러나 했다.
부유하고 유서 깊은 가문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귀족들은 돈이 많은 것보다 유서 깊은 가문을 더 쳐 준다. 특히 남자라면 말이다.
“레이디 비스컨에게는 좀 다른 모양이더군.”
누군가의 지적에 사람들의 관심은 번즈 백작과 레이디 비스컨에게 향했다. 연애담만큼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일은 없다. 특히나 한쪽이 이미 약혼했거나 기혼자라면 더더욱.
“친밀한가 보죠?”
갑자기 끼어든 누군가의 질문에 대화하던 남자들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친밀하다고 할 만한 일은 없죠.”
번즈 백작과 레이디 비스컨이 단둘이 있었다거나 남들 눈에 이상하게 여겨질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다. 번즈 백작은 어디까지나 남에게 할 수 있는 친절을 베푸는 거로 보였고 레이디 비스컨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하는 것과 똑같았으니 말이다.
문제는 번즈 백작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레이디 비스컨에게 하듯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그걸로 두 사람의 사이가 수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고.
“뭐, 번즈 백작이 비스컨 가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하니까요.”
“비스컨 남작에게 가르침을 청했다죠?”
“이를테면 비스컨 남작은 번즈 백작의 선생이니까 그 동생에게도 예의를 다 하는 거일 겁니다.”
남자들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들은 번즈 백작이 레이디 비스컨을 좀 특별하게 대하기는 하지만 그게 자신을 도와주는 가문에 대한 특별 대접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뒤늦게 두 사람의 사이가 친밀하냐고 물어본 사람을 확인했다.
“허드슨 경.”
마르셀 허드슨 경이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가 렌시드 경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게 떠올랐다.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군.
다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허드슨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번즈 백작을 쳐다보고 몸을 돌렸다.
“담배, 피우나?”
별것 아닌 이야기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린 올리버는 엘리엇에게 담배를 권하는 척하며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이 클럽의 정원으로 나가자 엘리엇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뇨.”
안 한다. 레이디 비스컨이 담배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리버도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엘리엇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올리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래. 어머니와 유제니가 질색해서.”
아카데미 다닐 때 호기심에 피워 본 적은 있다. 그리고 방학 때 집에 돌아가서도 손댔다가 어머니께 호되게 혼이 났다.
올리버는 그때 유제니의 반응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때 열다섯 살이었던 유제니는 자기 방에 있던 사탕이란 사탕은 다 가져와서 올리버의 침대에 쏟았다.
그리고 차라리 이가 몽땅 썩어 버리라고 소리치고 나가 버렸다.
“자네, 형제가 있나?”
없다. 엘리엇은 올리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 올리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형제자매가 없는 사람들에게 형제자매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기란 어렵다. 거기서 형제냐, 자매냐까지 나아가면 또 어려워지고.
“나랑 유제니는 개와 고양이 같아. 개나 고양이를 키워 본 적 있나?”
엘리엇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반응을 부정이라 생각한 올리버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서로 좀 달라. 그래도 우린 사이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 개와 고양이도 새끼 때부터 같이 키우면 사이가 좋기도 하다더군.”
딱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개와 고양이라는 거. 올리버는 자신의 비유가 마음에 들어서 씩 웃었다. 그리고 엘리엇을 쳐다보며 말했다.
“번즈 백작, 유제니에게 관심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