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11 – 4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의상실 거리 쪽으로 갈수록 행인과 마차의 수가 줄어들었다. 나는 나를 미행하는 사람이 내가 옷을 보러 간다고 생각하길 바라며 걸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빨리 걷는 건 아닐까? 아니면 너무 늦다거나.
잘 모르겠다. 뒤를 돌아보고 싶지만 그건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닐 것 같았다.
대신 나는 내 뒤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고 있다면 발걸음 소리가 일정할 거다. 그리고 엘리엇의 마차 소리도.
“응?”
문득 뒤에서 따라오는 마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발굽 소리나 바퀴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뭐지? 저도 모르게 뒤로 돌아가려는 몸을 붙잡으며 나는 엘리엇이 정말 내 뒤를 따라오고 있을지 생각했다. 따라오고 있을 거다. 그러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 남자를 이렇게까지 믿는 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네. 불안감 때문에 발걸음이 좀 느려졌다. 나는 여차하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뛰어들 가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다행인 건 단골인 가게도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파랑새’라는 커다란 의상실은 어머니의 단골 가게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가게도 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라는 가게인데 장갑과 스타킹을 판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좀 보고 갈까?
가게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저 가게의 장갑과 스타킹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게 된다.
“레이디 비스컨!”
가게 앞에서 망설이다가 물러나려는데 안에서 나를 발견했는지 가게 주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이자벨은 내게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잠깐 들어와서 차 한잔하시겠어요?”
평소라면 거절하지 않고 들어갔을 거다. 그리고 그녀가 보여 주는 신제품을 구경하면서 차를 마시겠지.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에 꼭 갈게요.”
내 대답에 이자벨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가 돌아왔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다음에 꼭 오세요.”
무슨 일일까. 나는 이번 일이 끝나면 반드시 그녀의 가게에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자벨은 천재다.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레이스를 보고 있자면 세상에 천재란 이런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내 전속 레이스 장인으로 고용하고 싶지만, 천재는 독점해선 안 되는 법이다.
나는 이자벨의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웠을지 고민하며 거리를 걷다가 의상실 거리 끝부분까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뭘 착각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거의 없는 의상실 거리를 쭉 걸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니. 어쩌면 날 미행하던 남자는 내가 엘리엇과 인사하는 것을 보고 떠났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냥 이 모든 게 내 착각일지도 모르고.
그나마 다행인 건 뒤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나를 미행하는 사람이 없다면 엘리엇이 내 뒤를 따라오는 게 시간 낭비니까 말이다.
“어휴.”
바보 같은 짓을 했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시간 낭비했잖아. 엘리엇에게도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배가 고파 오기 시작했다. 아까 카페에서 남긴 케이크가 매우 아쉬워졌다.
그때였다.
“유제니 비스컨.”
몸을 돌리는데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누군가가 나를 확 끌어당겼다. 난폭한 행동에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끌려갔다.
“이 마녀!”
누구지? 너무 놀란 나머지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여 시야를 확보했다.
그 남자다!
에스턴 저택에서 나와 마주쳤던 남자! 그리고 오늘 나를 미행한 남자!
그 두 명이 동일 인물이었다. 나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를 기억하는 모양이군그래? 아주 고귀하신 레이디 비스컨께서 말야.”
“당신….”
누구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거나 인사를 한 적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날, 에스턴 저택에서 부딪친 다음부터 곰곰이 생각했지만 역시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인상을 쓰며 물었다.
“누구야?”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내가 자신을 모른다는 게 매우 화가 난다는 듯 말했다.
“모르겠지! 그래, 너는 모르겠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잡힌 팔에 슬슬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남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금세 남자가 뭔가를 내 가슴 쪽으로 들이대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
심장이 툭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시야 한쪽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단검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면….”
미친 사람이구나!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인데 마치 나를 아는 것처럼 굴고 있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있던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다리를 들어 상대방을 걷어차는 거였다. 하지만 너무 바짝 붙어 있었고 남자의 칼이 내 가슴에 닿아 있었다.
“너만, 너만 사라지면 돼.”
이 미친놈이.
날카로운 게 가슴에 닿는 느낌에 나는 깜짝 놀라서 튀어 올랐다.
“아야!”
튀어 오르면서 남자에게 잡힌 팔이 비틀리는 바람에 고통이 엄습했다. 감각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팔이 부러진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나를 잡아당기려는 남자에게서 벗어나려고 힘을 주다가 내가 그에게 힘으로 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용히 해!”
비명을 지르려 하자 남자가 칼을 내 목에 가져다 대며 윽박질렀다. 맙소사. 나는 그가 칼을 얼마나 가까이 댔는지 무서워서 고개를 숙였다가 내가 굽이 뾰족한 구두를 신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의 발은 내 발 바로 옆에 있었다. 부츠도 아니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들었다. 그리고 남자의 새끼발가락에 맞춰 있는 힘껏 밟았다.
* * *
고든 케스로. 에스턴 자작을 공격하고 유제니에게 누명을 씌운 남자의 이름이다. 그리고 엘리엇은 그가 누군지 몰랐다.
유제니의 부탁대로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그는 고든이 누구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귀족도 아니었고 유명한 사람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역시 꿈을 꾼 자일 가능성이 있었다. 엘리엇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비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손님들을 보내고 유제니와 마주치고 싶어 나오면서 일부러 두고 왔다는 게 생각났다. 검을 가지고 다니면 그녀가 겁을 먹을까 봐 그랬던 게 지금은 후회로 돌아왔다.
어떻게 할까. 그는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유제니와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두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 갔지? 엘리엇은 곧바로 마지막으로 유제니를 봤던 장소로 다가갔다. 여기는 가게가 즐비한 거리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사람을 납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마녀!”
다행히도 그는 금세 유제니와 고든을 찾아냈다. 엘리엇은 재빨리 몸을 숙여 고든이 유제니를 끌고 간 골목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에게는 차라리 다행히도 유제니의 얼굴은 이쪽에선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고든이 그녀에게 대고 있을 단검도.
하지만 엘리엇은 고든이 유제니의 팔을 움켜쥐고 있는 걸 봤고 그가 그녀에게 미친 사람 같은 표정으로 말하는 것도 봤다.
“너만, 너만 사라지면 돼.”
미친 사람 같은 고든의 말에 유제니가 깜짝 놀라서 튀어 올랐다. 엘리엇은 몸을 낮추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했다.
뒤를 돌아서 공격하려면 건물을 빙 돌아야 한다. 그가 거리를 계산하는 사이 유제니가 조심스럽게 다리를 들어 올렸다.
“아악!”
고든의 비명이 좁은 골목에 울려 퍼졌다. 엘리엇은 몸을 낮췄다가 이쪽으로 뛰쳐나오는 유제니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고든이 그녀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재빨리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도망치느라 유제니는 누군가가 그녀의 앞에서 뒤로, 고든과 자신의 사이에 끼어들었다는 것도 몰랐다. 엘리엇은 발을 움켜잡은 고든에게 다가가 그를 걷어찼다.
퍽!
고든은 그대로 뒤로 굴러갔다. 엘리엇은 다시 한번 무기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무기를 가져왔다면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엘리엇?”
골목을 벗어나 뛰어가던 유제니는 이상한 점을 깨닫고 멈췄다. 그리고 돌아봤다가 골목에 서 있는 엘리엇을 발견하고 그를 불렀다.
언제 왔지? 분명 그녀가 도망칠 때까지만 해도 거기엔 고든과 유제니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엘리엇은 유제니에게 몸을 돌리며 사과했다. 그가 너무 멀리서 따라왔다. 고든이 그녀를 공격하기 전에 막았어야 했다.
아니, 고든을 먼저 잡았어야 했다. 그가 그녀를 미행하기 전에.
유제니는 엘리엇이 왜 사과하는지 몰랐다. 그녀가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고 했을 때 고든이 소리쳤다.
“저 마녀! 저년을 죽여야 해!”
곧바로 엘리엇은 고든의 턱을 걷어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기절하자 움찔한 유제니가 엘리엇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괘, 괜찮아요?”
그건 그가 할 말이다. 엘리엇은 고든이 기절한 것을 확인하고 유제니에게 다가갔다. 걷어차인 덕에 고든의 얼굴은 피범벅이었지만 안 죽었으면 됐다.
그는 유제니가 공포와 놀라움으로 흥분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습니까?”
그의 예상대로 기절하기 직전이었던 유제니는 심호흡을 하며 엘리엇의 팔에 몸을 기댔다. 눈앞이 어지럽다. 그녀는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날 따라오고 있었어요?”
“그렇게 해 달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랬다. 하지만 유제니는 중간에 그를 조금 의심했다. 그녀는 시야가 안정되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차 소리가 안 나서 그냥 간 줄 알았어요.”
그의 얼굴이 확 굳었다. 끔찍한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 날 위해 다녀오게, 번즈 백작.
똑같은 목소리가 다른 표정으로 그에게 말한 적이 있다. 가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갔다. 그녀가 원했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엘리엇은 호되게 배웠다. 그는 유제니에게 고개를 숙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당신을 두고 떠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