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11 – 3
“어머, 죄송해요.”
책을 들춰 보느라 누가 서 있는 걸 못 봤다. 나는 재빨리 상대가 떨어트린 책을 주워 들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못 봤어요.”
책에 흠집이 났을까? 놀라서 겉표지를 살펴보니 다행히 흠집이 나지는 않았다. 책장이 접히거나 구겨지지도 않았고.
나는 책을 가볍게 털어 상대방에게 내밀었다.
“미안해요. 내 잘못이에요. 혹시 다쳤어요?”
여자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누가 와서 부딪쳤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 나는 그녀가 책을 받아 들지 않자 책 제목을 확인하고 말했다.
“이거, 재미있어요. 시리즈물인데 최근에 네 번째가 나왔거든요.”
“그, 그래요?”
말을 할 수 있는 모양이네.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해서 걱정했다. 그녀는 내가 내민 책을 머뭇거리며 받아 들더니 다시 책 표지를 내려다보았다.
왜 저런 표정인 거지?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그게 나 때문이 아니라 책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괜찮아요?”
“어, 아니….”
괜찮다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네. 나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유제니 비스컨이에요.”
“오, 네.”
여자는 허둥지둥하더니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왜 그러는 거지?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물어보려는데 그녀가 다시 말했다.
“어머, 미안해요. 레이첼 저그만이에요.”
“저그만 양.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레이첼의 손을 가볍게 흔들며 인사하고 놓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했다.
“부딪쳐서 미안해요. 다친 데는 없나요?”
“어, 네. 네. 괜찮아요. 괜찮은데….”
그렇게 말한 레이첼의 시선이 들고 있던 책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이 책 때문에 충격받은 것 같던데.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사람 생각은 의외로 비슷한가 봐요.”
“뭐가요?”
“이 책이요. 저도 이런 내용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비슷한 내용? 내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자 레이첼이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책 내용이요. 이, 괴물에게 친구를 잃은 남자가 괴물을 사냥하러 다니잖아요?”
그렇다. 레이첼이 보고 있던 책은 괴물에게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남자가 괴물을 잡으러 다니는 내용으로 권마다 잡아야 하는 괴물이 달라지는 시리즈 물이다. 꽤 인기를 얻어서 연극으로도 제작되려 한다고 들었다.
“저도 이런 걸, 음….”
레이첼은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거? 나는 책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레이첼에게 물었다.
“전에 본 적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사실, 저는 주인공이 여자거든요.”
“오.”
그건 좀 다르네. 이 소설은 남자가 주인공이니까.
레이첼은 내 반응에 조금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친구에게 보여 줬더니 이 소설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비슷하다고요. 그래서 확인해 보려고 왔는데….”
“비슷해요?”
“비슷하냐고요?”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레이첼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똑같아요. 주인공만 빼고요.”
그럴 수도 있나?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을 깜빡였다. 레이첼이 이 책을 읽은 것도 아니면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지?
심지어 이 책은 올해 나온 책이다. 첫 번째 시리즈가 나오고 너무 인기를 얻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시리즈가 나왔는데 그게 전부 올해 안에 일어나서 작가가 천재가 아니냐는 말까지 돌고 있었다.
“요정의 장난에라도 당한 기분이에요.”
레이첼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요정의 장난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요정이 장난을 치는 것 같은 일들이 제법 일어났다고 들었거든.
나는 완전히 낙담한 레이첼을 위로하기 위해 품에서 명함을 꺼내며 말했다.
“혹시 도와줄 게 있으면 이야기해요.”
뭘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차와 과자 정도는 대접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도 들어 줄 수 있겠지.
레이첼은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준 명함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품에 집어넣더니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 있습니다, 레이디 비스컨.”
다시 계산대로 향하자 주인이 내게 종이로 표지를 감싼 책을 내밀었다. 나는 장부에 달아 놓으라고 말한 뒤 서점에서 나왔다.
좀 출출하다.
머릿속에 샌드위치가 맛있는 찻집이 떠올랐다. 아니, 아니지. 오늘은 꼭 케이크를 먹으려고 했다. 그러니까 케이크가 맛있는 곳으로 가야지.
하지만 걸음을 옮기다 보니 다시 샌드위치를 향한 열망이 솟아올랐다. 아, 어떻게 하지? 샌드위치가 맛있는 찻집으로 갈까?
목적지를 바꾸기 위해 몸을 돌리자 멀리서 이상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나는 방금 전 누군가가 도망치듯 사라진 골목으로 시선을 던졌다.
내가 잘못 봤나?
나는 좀 더 골목 쪽을 쳐다보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역시 케이크를 먹어야겠어. 샌드위치는 오늘 저녁으로 먹어야지.
“어서 오십시오, 레이디 비스컨.”
찻집으로 들어가자 지배인이 나를 맞이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자리로 나를 안내한 뒤 주문을 받았다.
이제 책을 읽어 볼까. 나는 테이블에 내려놓은 책을 펼쳤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응?”
다시 또 이상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길 저편에 있던 남자가 후다닥 몸을 돌리는 게 보인 것이다.
뭐지?
무슨 일인가 하고 응시했지만 남자는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내가 뭘 잘못 본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오늘 두 번이나 비슷한 걸 봤다. 게다가 기분도 이상했고.
“주문하신 차 나왔습니다.”
그때, 지배인이 차와 케이크를 가지고 다가왔다. 맛있겠다. 나는 이 가게에서 자랑하는 과일 케이크를 보고 눈을 빛냈다.
어쩌면 내 착각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나를 미행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책을 펼쳤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은 이상했다. 두 번이나 발견한 이상한 사람이나, 아까 서점에서 만난 레이첼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빙글빙글 돌아서 책의 내용이 전혀 흥미진진하지가 않았다.
“혹시 케이크가 입에 안 맞으십니까?”
결국, 나는 두 시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경 쓰이는 게 너무 많아서 케이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바람에 꽤 많이 남은 케이크를 본 지배인이 물었다.
아이고, 미안해라. 이 가게의 자랑이니 저렇게 많이 남기는 걸 보고 무슨 일인가 했을 거다.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아주 맛있었어요. 그런데 급한 일이 있다는 게 생각났지 뭐예요?”
“아, 그러시군요.”
지배인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배웅했다. 나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다음에 꼭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가게를 나섰다.
아차.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기 전에 지배인에게 마차를 불러 달라고 할걸. 그랬다면 내가 마차를 잡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지.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다. 나는 스스로의 생각이 짧은 것에 한숨을 내쉬며 거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
또 다.
오늘 두 번이나 본 남자가 몸을 휙 돌리는 게 보였다. 얼굴은 한 번도 못 봤지만, 옷차림은 똑같아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대체 뭐지?
무슨 일로 나를 따라다니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다. 실제로도 물어보려고 했다. 엘리엇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유제니.”
남자에게 가기 위해 발을 내딛는 순간, 눈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엘리엇이 마차 문을 열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엘리엇? 어쩐 일이에요?”
오늘 올리버가 엘리엇의 집에 초대받아서 갔다. 잠깐, 지금 몇 시지? 내가 출출할 때 갔으니 지금쯤 다들 집에 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일이 있어서 못 오신다고 들었는데. 약속이 끝난 모양이군요.”
엘리엇은 여기 어쩐 일이냐는 내 질문에 대답 대신 말했다. 아, 맞다.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미안해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꼭 갈게요.”
엘리엇은 마치 내가 일이 없었다는 걸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물론 나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결국, 먼저 패배를 선언한 건 그였다. 엘리엇은 문을 좀 더 활짝 열더니 말했다.
“댁에 가십니까? 태워 드리죠.”
고마운 말이다. 어차피 삯마차를 타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마차에 올라타려던 순간, 나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까 날 따라다니던 그 남자. 대체 뭐였을까.
나 혼자라면 재빨리 마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게 현명하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는 용을 잡은, 아, 아니지. 용과 대치하고도 살아 돌아온 사람이 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나는 자세를 바로 하며 엘리엇에게 물었다. 그는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말씀만 하세요.”
“거리를 두고 나를 따라와 줄래요?”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곧 문이 닫히고 엘리엇의 마차가 떠났다. 길 건너편을 확인했지만 아까 전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갔을까?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가 엘리엇의 마차를 타는 줄 알고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나는 마음을 정하고 천천히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집이 아니라 의상실이 있는 거리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