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11 – 2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나는 인상을 쓴 채 올리버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닝이 나랑 결혼하기 싫대?”
“그게 아니라….”
올리버는 말을 멈추고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점점 더 불안해진다. 진짜 그랬을까? 어닝이? 나랑 결혼하기 싫다고?
아니면.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라서 물었다.
“내가 어닝보다 번즈 백작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어?”
“아니, 아니지. 유제니, 그런 게 아니야.”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올리버는 재빨리 두 손을 들어 흔들더니 말했다.
“어머니도 좀 아쉬워하시고. 집안이 좀 그렇긴 하지만 넌 그런 걸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니잖아.”
“집안?”
“번즈 백작 말야. 신흥 귀족이라는 이유로 배우자감에서 마이너스 점수를 주는 사람도 있잖아.”
사람도 있는 게 아니라 꽤 많다. 집안이 유서 깊다는 건 귀족 사회에서는 자랑스러운 거니까.
그런 것보다 어머니도 아쉬워하신다는 게 더 놀랍다. 나는 예상하지 못한 어머니의 이야기에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도 내가 번즈 백작과 결혼하길 바라셔? 왜?”
어닝과 약혼하겠다고 마음을 정했을 때 가장 기뻐하셨던 게 어머니였다. 내가 내게 구혼한 남자 중에서 어닝을 선택하기를 바라기도 하셨고.
번즈 백작은 부유하고 잘생겼지만, 어머니 기준에서는 야만인에 가깝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어닝을 버리고 엘리엇과 결혼하길 바란다고?
내 질문에 올리버는 주변을 살피더니 나를 데리고 일 층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후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바라시는 게 아니고.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괜한 소리를 했다는 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나는 올리버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가 계속 말하는 것을 기다렸다.
“어닝이 아니, 이건 두고. 전에 네가 납치당했을 때 번즈 백작이 널 구해 줬잖아.”
“음, 그렇지.”
“그리고 거마로트 공작의 연회에서도 네 편을 들어 줬고.”
“그렇지.”
“지난번에 렌시드 가의 무도회에서도.”
어, 그러네.
생각해 보면 엘리엇은 항상 거기 있었다. 내가 누군가와 대적하고 있을 때 어느새 내 뒤에 서서 내 편을 들어 주곤 했다.
“그런데, 알지? 얼마 전에 자작 부인이 어머니께 편지 보낸 거.”
렌시드 자작 부인이 무도회 이후에 어머니께 편지를 보냈다. 그걸 본 어머니의 표정이 살짝 굳어서 그리 좋은 이야기가 아니겠구나 하고 생각하긴 했다.
물론 내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셨지만.
나는 숨을 죽인 채 올리버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는 입술을 비틀더니 말했다.
“어머니께 뭐라고 했나 봐. 네가….”
“내가 뭐? 무도회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설마 했는데 맞았다. 자작 부인은 내가 자신의 무도회에서 마스터슨 경과 다툰 일이 불쾌했던 모양이다. 올리버는 입맛을 다시더니 말했다.
“네가 너무 공격적인 거 아니냐고 했다더라고. 상관없는 사람 일에 끼어들어서 자기를 곤란하게 했다고.”
구체적인 비난에 가슴이 아팠다. 생각해 보면 어닝도 같은 말을 했지. 나랑 상관도 없는 여자애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상관없지 않잖아.”
“그렇지.”
올리버는 나를 달래려는 것처럼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내 어깨와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머니도 나도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그래서 어머니도 아쉬워하신 거고.”
소니아 렌시드 자작 부인이 그런 편지를 보내니까 아쉬워하셨다는 거다. 이럴 거면 차라리 번즈 백작이 내 짝으로 더 낫지 않을까 하고.
조금 슬펐다. 그리고 고맙기도 했다.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내 편이라는 게.
“어어, 유제니.”
내가 고개를 숙이자 올리버는 기겁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책상으로 다가갔다.
뭐 해? 나는 어리둥절해서 오라버니를 쳐다봤다. 책상 서랍을 열어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낸 올리버는 내게 돌아와서 내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가서 쇼핑이라도 해.”
갑자기? 뜬금없는 행동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올리버를 쳐다봤다. 하지만 어이없는 건 올리버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는 내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물었다.
“뭐야, 우는 거 아니었어?”
“내가 우는 줄 알고 이걸 준 거야?”
작은 주머니지만 꽤 묵직하다. 안에 든 건 돈이 확실하고.
바보 아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다. 올리버가 내 인형을 망가트리거나, 날 넘어트렸을 때. 내가 울면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주머니 안에 있는 사탕 같은 걸 꺼내 내게 주곤 했다.
나는 지갑을 열어 안을 확인하며 물었다.
“이거, 어머니께 이르지 말라고 주는 거야, 아니면 울지 말라고 주는 거야?”
“후자인 줄 알았지.”
올리버는 허탈하다는 말투로 말했지만 내게 돈을 돌려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미 줬으면 내 거지. 나는 주머니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어릴 때 생각나네.”
올리버도 어릴 때 어땠는지 생각난 모양이다.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니지. 어릴 때라면 내가 어머니께 이르지 말라고 했을 거 아냐.”
“그럼 어머니께 말해도 돼?”
내 도발에 올리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거 내놔.”
“줬으면 내 거지!”
나는 깔깔대며 올리버를 피해 서재 밖으로 도망쳤다. 그는 나를 잡으려 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유제니, 네가 싫다면 내가 나서서 파혼시켜 줄게.”
오라버니가 있다는 건 좋은 거다. 가끔은, 아니, 꽤 자주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가끔은 좋다.
나는 올리버에게 다가가서 억지로 웃었다. 괜찮다. 나는 어닝과 결혼하는 거지 렌시드 자작 부인과 결혼하는 게 아니니까.
게다가 엘리엇이 내게 잘해 준다는 것도 어머니만의 생각이잖아. 그는 이미 마음에 둔 여자가 있고.
“안 싫어. 어닝은 좋은 사람이고 자작 부인이 좀….”
뭐라고 할까. 단어를 고민하는 사이 올리버가 말했다.
“예민하다고?”
“난 아들을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려 했는데.”
“비스컨 백작 부인도 자기 자식을 매우 사랑하신단다, 동생아.”
그렇긴 하다. 나는 올리버의 지적에 피식 웃었다.
“괜찮아. 난 어닝 좋아해.”
“하지만 사랑하는 건 아니지.”
올리버의 지적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 어닝을 사랑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귀족들이 다 그렇지 않던가.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 결혼한 뒤 사랑이 생긴다고. 때로는 그게 사랑이라기보다는 동료애 같은 게 되긴 하지만.
나는 방어 대신 공격을 선택했다.
“오라버니는 그래서 결혼 안 하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못 찾아서?”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눈이 높아서 그렇다. 올리버는 괜찮게 생겼다. 아카데미 시절에도 인기가 좀 있었다고 들었거든. 결혼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이미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스컨 백작가는 꽤 괜찮은 집안이고 후계자인 올리버도 외견만은 괜찮게 생겼으니까. 게다가 하나뿐인 동생인 나도 이미 혼처가 정해졌고.
그럼에도 오라버니가 아직도 약혼을 안 한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어쨌든 넌 안 간다는 거지?”
곤란해졌는지 올리버가 말을 돌렸다. 돈도 받았겠다, 더 놀려 봤자 나올 게 없을 거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쇼핑이나 가려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선이 아까 올리버가 내게 준 주머니로 향했다. 꽤 많은 돈이었다. 실내용 드레스 한 벌 맞출 수 있는 정도.
올리버는 연극 조로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다시 깔깔대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올 때 데리러 올까?”
한 시간 뒤, 가게가 늘어선 거리에 나를 내려 준 올리버가 물었다. 나가는 길이니 태워 달라고 했다. 이쪽은 가게가 많아서 마차를 세워 둘 곳이 없거든.
나는 올리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데리러 오면 편하긴 한데 느긋하게 구경을 못 한다. 서점도 들러서 신작 확인하고 한 권 사서 가까운 찻집에서 차를 마실 생각이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의상실 거리도 천천히 걷고 싶고.
하지만 그것까지 하면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우선은 찻집까지만 생각해 뒀다.
“괜찮아. 삯마차 타지 뭐.”
내 대답에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 문을 닫았다. 이쪽에 나올 때는 다들 그렇게 한다. 마차는 돌려보내고 돌아갈 때 다시 부르거나 삯마차를 타는 거다.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아, 레이디 비스컨.”
단골 서점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나를 반기며 나왔다. 그는 나를 안쪽으로 안내하더니 미리 빼 놓은 책을 꺼내 들었다.
“언제 오시나 했습니다. 지난주에 찾으시던 신작이 나왔거든요.”
“오, 그래요?”
전에 읽은 건 재미있었다. 시리즈물이었는데 괴물에게 쫓기는 한 남자가 역으로 괴물을 잡는 내용이었다. 나는 서점 주인이 내미는 책을 받아 들어 내용을 살폈다.
“장부에 올려 주세요.”
내가 이렇게 장부에 올리면 한 달에 한 번 집사가 대금을 낸다. 올리버는 쇼핑하라고 했지만, 단골 가게만 다니면 돈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책은 보내 드릴까요? 아니면 가져가시겠어요?”
보통은 저택으로 보내 달라고 하지만 오늘은 찻집에 가서 들춰 볼 생각이라 가져가기로 했다. 나는 표지만 감싸 달라고 부탁한 뒤 계산대 바깥쪽으로 나갔다.
이 서점은 주인이 내 취향에 맞게 잘 추천해 준다. 하지만 가끔은 취향이 아닌 책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예전 가정 교사가 그랬다. 너무 취향에 맞는 것만 보면 취향에 고립되어 버린다고.
나는 벽을 가득 메운 책장을 거닐며 내 흥미를 끌 만한 책이 있는지 살폈다.
아, 이러면 결국 내 취향대로 책을 사게 되는 거네.
결국, 나는 관심 없는 책도 하나씩 들춰 보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책장 앞에 바짝 붙어 서 있던 사람과 가볍게 부딪쳤다.
“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