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0/239)

44화. 11 – 1

무더위가 조금 누그러졌다. 아침부터 후덥지근했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더위는 살짝 꺾여 있었다.

그렇다 해도 아직은 여름이지만.

나는 앤이 가져온 시원한 차를 홀짝이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로렌을 쳐다봤다. 찻잎을 끓이지 않은 물에 넣은 뒤 하루 서늘한 곳에 뒀다가 마시는 이 냉침차는 여름에 마시기 좋아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 집은 어머니가 차는 뜨거워야 한다는 주의라 끓여 마시지만, 하인들은 냉침차를 마시는 모양이었다. 가끔 이렇게 젊은 손님들이 오면 내오기도 하고.

“그래서 아카데미는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로렌은 자신이 왜 아카데미를 그만둬야 하는지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싶어 한다는 교사의 편지를 받은 내가 무슨 이야기인지 듣고 싶다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카데미 비용 때문에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지?”

요점은 그거다. 아카데미 비용이 부담된다고. 로렌은 내 확인에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니고, 아카데미에서 배울 건 다 배웠다고 생각하거든요. 꿈에서….”

“꿈에서 이미 다 다녔단 말이지.”

그래서 더 안 배워도 된다는 말이지? 내 질문에 로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럴까.

나는 생각을 하기 위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꼭 아카데미 비용 때문만은 아니고 배울 게 없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나는 로렌이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이유가 비용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신병은 내가 인도했다. 공식적인 후견인은 나, 유제니 비스컨이 되었다. 그러니 아카데미에서도 내게 편지를 보낸 거고.

마스터슨 경은 로렌의 후견인을 나로 바꾸는 서류에 순순히 사인했다고 들었다. 그 뒤로 로렌에게 필요한 비용은 내가 내고 있고.

비용 자체는 그렇게 큰돈이 아니다. 그녀는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고 이미 학비나 기숙사 비용은 다 냈기 때문이다. 내가 내는 건 로렌이 사용할 용돈이나 식비 정도다. 학비나 기숙사 비용은 물론 로렌이 자라면서 사용된 돈은 마스터슨 경이 청구하길 기다리고 있고.

“옷 가게는 어때?”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뜨거운 차가 아니라 그런지 식감이 좀 다르게 느껴진다. 물에도 식감이 있다면 말이지만.

“옷 가게요?”

“의상실을 해 보고 싶다며. 얼마 전에 네가 디자인한 걸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잖아.”

며칠 된 이야기다.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의상실을 해 보겠다는 로렌의 의지를 존중해서 나는 그녀가 옷을 만드는 걸 지원해 줬다.

만드는 건 로렌이 아니라 로렌이 찾아낸 작은 의상실 주인이었지만.

그녀는 로렌이 가져간 디자인과 천으로 드레스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거기서 사용된 천 값이나 공임을 내가 지원해 줬고.

로렌이 그랬다. 자신은 앞으로 올 유행을 알 수 있다고. 올가을에는 체크무늬가 유행할 거라고 했지. 어깨가 크게 부푼 것도.

하지만 아직 체크무늬가 인기 있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가을이 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기엔 얼마 전에 어머니의 드레스를 가봉하기 위해 온 의상실 주인이 말했다. 올가을도 여름에 이어 자잘한 꽃무늬가 유행할 것 같다고.

“어때? 잘되어 가고 있어?”

안 되어 가고 있을 것 같은데. 내 생각대로 로렌은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어쩌면 로렌의 말대로 체크무늬와 부푼 어깨가 유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나도 모르고 로렌도 모른다.

나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슬쩍 내려놓았다. 물을 안 끓여서 그런가. 혀끝에 닿는 느낌이 별로라 더 마시고 싶지 않다.

“아카데미는 좀 더 다녀 보자. 적어도 네 옷이 잘 팔릴 때까지 말야.”

“옷이 팔리면 그만둬도 되나요?”

“아니지.”

고작 한 번 팔았다고 의상실을 운영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나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당장 아카데미를 그만둔다고 의상실을 열 돈이나 기술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어차피 이제 마지막 학기만 남았고.”

아무리 꿈에서 다녔다고 해도 그건 꿈일 뿐이다. 나는 꿈에서 본 것처럼 살기 싫다는 로렌의 의지를 존중하는 거지, 그녀가 예언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아깝잖아. 졸업은 하는 게 어때?”

“하지만….”

내 설득에 로렌은 망설이며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나와 달리 그녀는 차를 거의 다 마셨다. 내가 좀 예민하게 구는 건가?

내 찻잔을 내려다보는데 로렌이 말을 이었다.

“졸업하면 또 돈이 들잖아요.”

“리즈 양, 난 너한테 돈을 받을 생각 없어.”

마스터슨 경 때문에 돈을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후원은 어디까지나 후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원한 아이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 건 후원이 아니다.

장사지.

아니, 장사는 상대방이 거래하는 게 뭔지 안다. 마스터슨 경이 한 짓은 장사가 아니라 사기였다.

“갚을 거예요, 제 평생이 걸리더라도요.”

“받을 생각 없어. 난 너를 후원하기로 한 거니까.”

“아뇨.”

그제야 로렌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살아 보니까, 그러니까 꿈에서 살아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대가가 돈이라면 그건 차라리 정당하고 저렴한 거예요.”

로렌이 이런 말을 할 때면 나는 그녀가 꾼 꿈이 대체 얼마나 생생했는지 궁금해지곤 한다. 어떻게 아직 십 대인 아이가 돈이 대가라면 차라리 저렴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는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정말로 돌려받을 생각이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직 마스터슨 경이 내게 청구하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아직은 내가 널 후원하면서 낼 돈은 아카데미 마지막 학비 정도야.”

“그 사람, 분명히 청구할 거예요.”

로렌의 말대로 돈이 대가라면 차라리 정당하고 저렴한 거니까 마스터슨 경이 청구하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그가 죄책감을 느껴 청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나는 그 생각에는 좀 회의적이거든.

“맞아. 청구할 거야. 하지만 어쨌든 내가 쓰는 돈은 마지막 한 학기 정도고, 정 갚는다고 해도 아주 천천히 갚으면 되잖아. 그러니까 졸업까지 좀 더 생각해 봐.”

로렌이 자신의 꿈을 확고하게 믿는다는 건 알지만 꿈에 의지해서 아카데미를 그만두는 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거다. 아카데미 졸업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겠지. 졸업을 하지 않았다고 인생이 망가지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걱정하는 건 한 학기만 다니면 맞이할 수 있었던 졸업, 그 자체다. 언젠가 로렌이 후회할까 봐 걱정이 됐다. ‘졸업식은 참석할걸’ 하고 말이다.

내 설득에 그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상실에 가 보겠다며 떠났다.

“그거, 번즈 백작이 지불했을걸?”

“엄마야!”

로렌을 배웅하고 몸을 돌리자마자 들려온 올리버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서 뛰어올랐다. 어우, 세상에.

올리버는 어느새 계단 앞에 서 있었다. 내려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내 생각대로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복도를 지나가는데 들려서. 엿들은 거 아니다.”

나와 로렌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다. 심지어 엿들은 거 아니라고 방패까지 세웠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거가 뭐야?”

“아까 걔 말야. 이름이 뭐였지?”

“리즈. 로렌 리즈.”

“그래, 걔 양육비. 그거 번즈 백작이 지불한 거 같더라.”

뭐라고? 나는 믿을 수 없는 올리버의 말에 결국 인상을 썼다. 그러자 올리버가 이번에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전에 번즈 백작이 말하더라고. 자기가 지불했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심지어 올리버에게 직접 말한 거였어?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올리버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왜 말 안 했어?”

“아, 까먹었어.”

까먹었어? 잘하는 짓이다, 아주.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마스터슨 가에 사람을 보내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단 말이다.

내가 인상을 쓰자 올리버는 주춤 물러났다. 그는 뒷걸음질로 계단을 올라가며 들으라는 듯 혼잣말했다.

“아 참, 갈 곳이 있는데 깜빡했네.”

어휴, 진짜.

내 자식이나 동생이었으면 혼냈을 거다. 나는 올리버에게 어머니의 자식이라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말한 뒤 물었다.

“어디 가는데?”

“번즈 백작. 이번에 이사했잖아.”

그랬다. 집을 구했다고 들었다. 그것도 우리 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에스컨 거리에.

번즈 백작은 운이 좋았다. 세이마리아 거리와 에스컨 거리는 귀족들이 사는 거리고 다들 대대로 살기 때문에 집이 매물로 나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그렇다면 번즈 백작은 어떻게 샀냐면 강도에게 공격받아 겁을 먹은 린가르드 남작 부인이 팔아 버렸기 때문이다. 에스컨 거리도 세이마리아 거리만큼이나 귀족들만 사는 거리라 그 동네에 강도가 들었다는 소문에 사교계가 발칵 뒤집혔다. 덕분에 초반에는 사려는 사람이 없었고.

“넌 준비 안 해?”

계단을 오르던 올리버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엘리엇은 우리 가족을 모두 초대했다. 어머니는 잠깐 친구 집에 방문했다가 거기로 바로 가신다고 하셨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난 안 가.”

“왜?”

번즈 백작과 친하지 않았어? 올리버의 질문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거 때문이다.

“어닝이 신경 쓰더라고.”

“뭘? 아, 너랑 번즈 백작을?”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아 달래.”

“허.”

올리버는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번즈 백작이 더 낫긴 하지.”

“올리버!”

그런 말을 하면 못쓴다. 올리버는 내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인물은 번즈 백작이 더 낫지.”

“비슷해.”

“키만 비슷하지.”

올리버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그렇게 따지면 올리버는 엘리엇과 키도 안 비슷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내 얼굴에 침 뱉기 같아서 그만뒀다.

엘리엇과 어닝이 평균보다 훨씬 큰 거긴 하다. 올리버도 평균보다 큰 편이니까.

내가 한숨을 내쉬자 올리버가 말했다.

“너도 어닝보다는 번즈 백작이 더 낫지 않아?”

“농담은 재미없어.”

“농담이 아니라.”

올리버는 그렇게 말하더니 계단 손잡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네가 어닝보다 번즈 백작이 더 좋다면 내가 나서서 파혼시켜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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