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39/239)

43화. 10 – 4

좀 불안하다. 엘리엇은 신흥 귀족이다. 그의 부모님은 평민이라는 말이다. 그걸 왕대비 전하가 모를 리 없을 텐데 왜 물어보는 걸까.

다행히 엘리엇은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평민이었습니다. 저를 낳기 전에 북부로 가셨고요.”

“원래는 어디 살았지?”

약간 캐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지 엘리엇도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여유롭게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수도 근처에 사셨던 것 같습니다.”

“잘 모른다고?”

기분이 안 좋아졌다. 전에도 그는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부모님이 모두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했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앉아 있었다. 괜히 같이 왔다. 나만 갈 테니 그는 먼저 집에 가라고 해야 했다.

“네. 두 분 다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요.”

“저런.”

왕대비 전하의 얼굴에 안됐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뭐라고 위로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다물더니 말했다.

“내가 괜한 걸 물었군그래.”

“아닙니다, 전하. 당연히 확인하실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별거 아니라는 엘리엇의 태도에 왕대비 전하는 그가 지금 어디 사는지, 고향에는 친척이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 때문에 괜히 호구 조사를 당하고 있네. 나는 엘리엇을 돕기 위해 나섰다.

“전하, 번즈 백작은 갑자기 온 거라서요.”

이다음에 일정이 있다. 그만 가도 되냐는 질문에 왕대비 전하는 나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은 그만 가라고 해도 있고 싶어 하는데 레이디 비스컨, 자네는 빨리 가고 싶은 모양이군.”

“다음에 방문하겠습니다.”

“불러야 오면서 말은 잘하네.”

상급 귀족은 부르지 않아도 입궐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잘 안 간다. 내가 왕족도 아니고, 왕족과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면 왕족과 친분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난 왕족과 친분을 쌓는 게 그렇게 장점만 있는지 모르겠다. 권력자와 가까워지면 날 질투하는 사람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나는 표정 없이 말했다.

“전하께서는 공사다망하시니까요. 불러 주시면 언제든지 오겠습니다.”

왕대비 전하는 내 말에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도 좋다는 신호에 나는 엘리엇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이렇습니까?”

왕궁에서 나설 때쯤, 엘리엇이 물었다. 아이고, 미안해라. 나는 왕대비 전하의 변호를 위해 말했다.

“늘 이러시지는 않아요. 당신이 궁금했던 모양이에요.”

엘리엇은 내 대답에 잠시 멈칫하더니 씩 웃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뇨. 제게 질문하신 건 괜찮습니다. 당연한 거죠. 저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다행이다. 왕대비 전하는 내게 좀 깐깐하게 구시는 편이지만 나는 그녀가 싫지 않거든. 게다가 국왕의 어머니잖아.

엘리엇을 위해서라도 그가 왕대비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가 궁금한 건 당신을 부른 겁니다. 왕대비 전하가 항상 이렇게 소문의 주인공을 부르나 해서요.”

“오, 아니에요. 아마 저는, 음…….”

특별하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나는 단어를 골라 말했다.

“제 어머니가 공주님의 말동무였거든요.”

지금은 뉴커크의 왕비님이 된 제네비브 공주님을 말하는 거다. 현 왕의 누나이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인 비스컨 백작보다 세이마리아 비스컨 백작 부인이 더 유명하다. 공주님의 말동무였기 때문에.

“그래서 가끔 절 부르세요.”

내 대답에 엘리엇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어머니가 아니라 나를 부른다는 게.

하지만 그것 외에는 이유가 없다. 나는 “음”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네비브 공주님은 뉴커크의 왕비님이니 왕대비 전하는 손자를 보기가 어렵잖아요. 내가 그 대신이 아닐까요?”

뉴커크에는 왕자가 둘 있다 들었다. 평범한 집안이라면 손자와 할머니 관계니까 적어도 일 년에 한두 번은 보겠지만 저쪽은 왕족이잖아.

함부로 만날 수 없겠지.

하지만 엘리엇이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왕대비 전하께서 당신을 손자처럼 생각하신다는 겁니까?”

그렇진 않을 거다. 왕대비 전하는 내게 딱히 살갑진 않거든. 불러 놓고 말없이 차만 마시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오늘처럼 소란이 벌어졌을 때는 훈계를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사이에는 그다지 대화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왕대비 전하가 날 이렇게 주기적으로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재수 없다고 생각할 거다. 왕대비 전하가 주기적으로 부르는데 왜 부르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거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정말 그것뿐이다. 어머니가 공주님의 말동무였다는 거. 그래서 왕대비 전하께서 이웃 나라의 왕비인 딸과 손자들을 나를 보며 떠올리는지도 모르겠다는 거.

“어쩌면 당신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엘리엇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모르겠다는 거?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유제니, 당신을 손자 대신으로 여긴다는 거 말입니다.”

대신이라고 하기엔 좀 건방지게 느껴진다. 왕대비 전하의 손자는 모두 왕자니까. 하지만 그게 가장 그럴듯한 가설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샤는 갔나?”

유제니와 엘리엇이 떠난 뒤 자리에서 일어난 안드레아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데번 백작 부인에게 물었다.

“네, 전하. 다시 입궐하라 할까요?”

프란시스의 대답에 안드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네.”

신흥 귀족이 나타났다는 말에 그녀는 핸더슨 후작 부인에게 번즈 백작에 대해 알아 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마샤의 보고는 조금 전 번즈 백작이 대답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평민 출신이라고 하던데요.”

옷을 갈아입기 위해 개인 응접실로 향하는 안드레아의 뒤를 따르며 프란시스가 말했다. 번즈 백작이 평민 출신이라는 건 이미 알려졌다.

그 말은, 그가 기존의 신흥 귀족과 달리 귀족 가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말이 신흥 귀족이지 실제로 작위를 받는 사람들은 귀족 가문인 경우가 많았다. 귀족의 둘째나 셋째처럼 아버지가 귀족이긴 하지만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자들이 공을 세워 작위를 받는 거다.

그건 당연하다.

부모를 따라 왕궁에 드나들 기회가 많아야 왕족의 눈에 띌 수 있기 때문이다. 왕족의 눈에 띄면? 공을 어필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작은 작위라도 받을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엘리엇 번즈라는 자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그의 마지막 기록은 아카데미뿐이었고 졸업 후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핸더슨 후작 부인이 알아낸 것도 그것뿐이었다. 아카데미 졸업 후 북부 이즈로 돌아갔고 갑자기 용과 거래하고 왕궁의 무도회 홀에 나타났다. 마법을 배웠다는 기록도 없으니 안티 마법이 걸린 왕궁 안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는 건 용과 거래했다는 증거다.

“아까워.”

옷을 갈아입은 안드레아는 긴 소파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번즈 백작이 평민 출신만 아니었다면, 한미하다 해도 귀족 가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뭐가 말입니까, 전하?”

그녀의 옷을 정리한 데번 백작 부인이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프란시스는 시종이 가져온 찻주전자를 들어 왕대비 전하를 위해 찻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쉬고 싶을 때라 향이 은은한 것을 골랐다.

“번즈 백작 말이야.”

“호불호가 강한 사내 말이죠?”

상급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안드레아는 프란시스의 말에 피식 웃으며 물었다.

“호불호라고?”

다들 경계하는 줄 알았는데? 용과 거래한 자다. 대체 어떻게 용과 거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 물론 안드레아는 약간 들었다. 번즈 백작은 왕궁 마법사와 국왕 앞에서 용과 어떤 거래를 했는지 설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번즈 백작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용의 둥지까지 어떻게 간 건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몇 가지 작은 소란을 피웠다는 말을 들었다. 카드 게임 중 같이 게임을 하던 귀족의 손가락을 부러트렸다고 한다.

또 한 번은 길에서 어떤 젊은 기사의 팔을 부러트렸다는 말도 있었다.

프란시스는 그런 갖가지 소문들을 안드레아에게 이야기한 뒤, 차를 홀짝였다.

“겉보기엔 예의 바르던데.”

신기하다는 왕대비의 반응에 프란시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당연하다. 왕족 앞에서 건방지게 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대부분 사람은 왕족 앞에서 좋고 싫고도 말하지 못한다. 안드레아에게 자기 요구를 뚜렷하게 말하는 사람은 왕족을 제외하면 그녀의 말동무인 핸더슨 후작 부인과 데번 백작 부인뿐이다.

아, 조금 전에 왔다 간 레이디 비스컨도 마찬가지고.

“불호가 그렇다면 호는 사윗감으로서 점찍은 사람이 많나 보군.”

“잘생겼고 부유한 미혼이니까요.”

꽤 부유하다는 소문도 있다. 용과 거래하고 보물을 잔뜩 가져왔다는 그럴듯하면서 구체적인 소문과 함께.

안드레아는 번즈 백작이 수도에 있는 건물을 몇 개 사들였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번즈 백작은 딸은 둔 귀족들의 집중을 받기에 충분했다. 좀 난폭하다 해도 부유하고 신체 멀쩡하다. 아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지.

안드레아는 유제니에게 다정하던 엘리엇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깝다. 정말로 아까워.

유제니에게는 더 좋은 남자가 어울린다. 그런 허우대만 멀쩡한 사내 같지도 않은 사내가 아니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드레아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집안이라고 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눈독 들이는 집안이 꽤 있는 모양이에요.”

프란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힘없이 웃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식들 혼사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막내의 결혼이 올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안드레아는 프란시스의 힘없는 표정에 조용히 물었다.

“밀리는 어때?”

금세 프란시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갑자기 그러는지 모르겠다. 백작이 호통도 치고 수도원에 넣어 버리겠다고 협박도 했지만 밀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예요.”

“여전히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나 보지?”

“네. 아직도 입을 꾹 다물고 있어요.”

의사는 정신에 문제가 없다고 진단했다. 말도 또렷하고 판단력에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프란시스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으며 말했다.

“왜 갑자기 그러는지 말만 해 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입을 떼지 않는다는 데번 백작 부인의 말에 안드레아는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는데 그녀에게라고 말할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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