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38/239)

42화. 10 – 3

“번즈 백작님도 같이 오셔도 됩니다.”

헨더슨 후작 부인의 말에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집에 돌아갈 시간이 늦춰질 모양인데.

“철의 궁은 왕대비 전하께서 머무는 궁이에요.”

아참, 엘리엇은 지금 우리가 어딜 가는지 모르겠구나. 나는 재빨리 그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생각해 보면 그는 누가 부르는지도 모르면서 따라나선 거다. 겁이 없네.

엘리엇은 내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왜 철의 궁이라고 부릅니까?”

보통 궁전에는 크리스털 궁이라거나 봄의 궁 같은 화려하거나 느낌이 좋은 단어를 붙인다. 하지만 왕대비 전하의 궁은 약 백여 년 전부터 철의 궁이라 불리고 있다.

나는 후작 부인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 년쯤 전에 전쟁이 나서 왕궁이 침략을 받은 적이 있어요.”

“아, 압니다.”

그렇겠지. 워낙 유명한 이야기니까. 아카데미에는 역사 수업이 있다고 들었다. 역사 교사가 이야기해 줬을 거다.

“당시 국왕 전하께서 친정 중이셨고요. 남은 건 아직 어린 공주님과 왕대비 전하뿐이셨죠.”

다행히 당시의 왕비는 임신 중이라 지방으로 피난 가 있었다고 한다. 왕궁에 남은 건 왕대비와 어린 공주뿐. 왕궁을 습격한 적을 피해 공주를 데리고 철의 궁으로 도망친 왕대비 전하는 국왕이 병사를 이끌고 돌아올 때까지 무려 사십 일을 버텼다고 한다.

“그 뒤로 그 궁은 철의 궁이라고 불려요. 대대로 왕대비 전하의 궁이고요.”

“놀랍군요.”

엘리엇은 예의 바르게 말했고 나는 그와 똑같은 표정을 지어 주었다.

사십 일이나 버텼다. 처음 그 이야기를 역사 교사에게 들었을 때, 나는 십 대의 공주와 오십 대의 왕대비가 약간의 병사를 이끌고 사십 일이나 버텨 냈다는 점을 놀랍게 여겼다.

그리고 지금은 왕궁에 어린 딸과 어머니만 두고 병사를 이끌고 친정에 나선 왕이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지 놀라워한다.

“어떻게 막았을까요?”

철의 궁 앞에 서자 엘리엇이 물었다. 그게 가장 놀라운 점이다. 철의 궁이라는 이름과 달리 왕대비 전하의 궁은 방어를 위한 건물이 아니니까.

이 성은 왕궁 한쪽에 있는 별궁이다. 왕궁이 침략당한 순간, 왕대비와 공주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을 거다. 왕궁은 적군이 차지했고 외부로 통하는 길은 막혔다. 그럼에도 왕대비와 공주는 사십 일을 버텼다.

“여러 가지 가설이 있어요.”

나는 역사 교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이런 건 아카데미에서 안 알려 주는 모양이지? 생각해 보면 나는 일 대 일로 배웠으니 다양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었다.

“비밀 통로가 있어서 거기로 물자를 공급받았다는 설도 있고…….”

“하지만 그게 방어에 대한 대답이 되어 주지는 않죠.”

엘리엇은 공성 망치에 한 번 부딪치면 바로 부서질 것 같은 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아직도 역사와 전술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문이라고 한다.

“여자 둘뿐이라 방심했다는 설도 있고요.”

“하하.”

내 말에 엘리엇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고개를 들어 보자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당신께 그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진심으로 그걸 믿던가요?”

안 믿었다. 선생님도 어느 멍청이는 그렇게 주장하더라고 말했다. 뭐,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국왕의 어머니와 딸이잖아.

내가 적군이라면 어떻게든 잡으려 하겠지. 가장 좋은 건 생포하는 거지만 죽어도 상관없었을 거다.

“케니스 선생님이 믿은 건 굳이 따지면 요정의 힘이었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케니스 선생님이 말했다. 사십 일 동안 앞이 안 보이는 전투에서 왕대비와 공주가 살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자신들이 살아남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 믿음을, 케니스 선생님은 요정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엘리엇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긴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다과실로 안내할 모양이군. 후작 부인의 뒤를 따르며 나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이 궁에 몇 번 온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초대받는다.

“마샤, 자네는 그만 쉬게.”

후작 부인의 안내를 받아 다과실로 들어서자 내 예상대로 왕대비 전하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말에 후작 부인의 시선이 나와 엘리엇을 향했다.

왜 그러지? 할 말이라도 있나 싶은데 잠시 엘리엇을 쳐다보던 후작 부인이 금세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앉게.”

방 안에는 셋만 남았다. 왕대비는 나와 엘리엇의 맞은편에 앉아 엘리엇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날 부른 게 아니라 엘리엇을 부른 거였나?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왕대비 전하가 말했다.

“잘생겼군.”

“감사합니다.”

엘리엇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인사했다. 나라면 당황해서 어버버 하다가 감사하다고 했을 텐데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왕대비 전하 역시 나와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약간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자기가 잘생겼다는 걸 아는군?”

“아니요. 하지만 칭찬이신 듯해 감사하다고 했을 뿐입니다.”

어, 뭐, 그야 그렇지. 보통 잘생겼다는 칭찬이니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엘리엇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정말 자기가 잘생겼다는 걸 모를까? 저렇게 잘생겼는데?

오늘 여기로 오는 사이에 우리를 지나친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도 멈춰 서서 엘리엇을 쳐다봤다. 특히 아저씨들은 감탄하기까지 했단 말이다.

“흠.”

왕대비 전하는 엘리엇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녀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내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도회에서 소란을 피웠다면서.”

윽, 그거 때문이었군. 나는 어깨를 움츠리려다가 멈췄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엘리엇이 원래 이러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왕대비 전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요. 소란은 피운 건 마스터슨 경인데요.”

왕대비 전하는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훗 하고 웃더니 말했다.

“내가 들은 건 네가 세라도 백작을 매우 곤란하게 했다는 이야기였다.”

“누군지 몰라도 전하께 와전했네요. 세라도 백작을 곤란하게 한 건 제가 아니라 마스터슨 경이었거든요.”

그건 왕대비 전하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마스터슨 경과 다투고 세라도 백작을 곤란하게 했다던데.”

“전하.”

나는 어릴 때부터 왕대비 전하를 종종 만나 왔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내가 소란스러운 일에 엮이면 불러서 혼을 냈고 몇 번의 경험 끝에 나는 어떻게 행동하면 되는지 체득했다.

내 부름에 왕대비 전하는 어디 한 번 설명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허리를 세우고 가슴을 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전하께 이야기를 전한 사람이 저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두 가지 일은 저와 별개로 일어난 일이거든요.”

“별개라고? 네가 마스터슨 경과 다투는 바람에 세라도 백작이 곤란해진 게 아니고?”

허. 그렇게 전한 모양이군. 나는 과연 누가 왕대비 전하에게 그렇게 말했을지 생각하며 말했다.

“다퉜다고 할 수 없죠. 저는 마스터슨 경에게 공공장소에서 자기보다 어린아이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렸을 뿐이거든요.”

“어린아이?”

“마스터슨 경이 후원하는 로렌 리즈라는 아이요. 그 애의 팔이 멍이 들도록 잡고 있더군요. 그걸 훈육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차라리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거나 손바닥을 맞으면 맞았지 팔에 멍이 들게 잡는 걸 훈육이나 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벌을 받을 때 감정적인 부분은 배제되어야 한다. 잘못했으니까 혼이 나야지,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혼이 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왕대비 전하는 내 말에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걸 누군가에게 지적했을 때 지적을 받아들일지, 억울하다고 다른 사람을 공격할지는 지적한 사람이 알 수 없는 점이죠. 마스터슨 경이 후자를 선택한 건 안타깝지만, 그게 제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자 왕대비 전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항상 이랬다. 내게 어떤 비난을 던진 뒤, 내가 그걸 좀 뻔뻔하게 넘기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어때, 번즈 백작. 자네도 유제니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나?”

전하의 말에 이게 무슨 일인지 지켜보던 엘리엇이 재빨리 대답했다.

“네.”

“이 아이 때문에 곤란했을 텐데?”

“곤란이요?”

엘리엇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왕대비 전하가 설명하려는 듯 입을 열자 재빨리 말했다.

“곤란한 적 없습니다. 레이디 비스컨은 언제나 옳거든요.”

왜 창피함은 나의 몫인가.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감당하기 위해 무릎 위에 올려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여기서 나가자마자 이 남자한테 주의를 좀 줘야겠다. 사람들 앞에서 그런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왕대비 전하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엘리엇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엘리엇을 쳐다보며 물었다.

“유제니와 퍽 친한가 보군.”

그러자 이번에는 엘리엇이 나를 쳐다봤다. 그는 내게 미소를 던지더니 왕대비를 향해 말했다.

“친해지고 있습니다.”

다시 왕대비 전하의 얼굴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저 표정이 기본 표정인 거 아닐까. 나는 내가 기억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녀가 저 표정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노파심에 묻는 건데…….”

그렇게 운을 뗀 왕대비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엘리엇에게 다시 물었다.

“어디 출신이지?”

“북부 쪽입니다. 이즈에서 가까운 편이고요.”

엘리엇은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의 이름을 댔다. 그쪽은 좀 춥고 험해서 남부만큼 커진 영지가 별로 없다. 땅은 넓은데 영지민이 적다고 할까.

덕분에 북부는 이즈 외에는 도시라 불릴 만한 영지가 없다. 그 말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만한 영지는 이즈뿐이라는 말이다.

“이즈라고?”

왕대비 전하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물었다.

“자네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지? 원래 이즈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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