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37/239)

41화. 10 – 2

오, 내가 하고 싶었지만 차마 못 한 말이다. 엘리엇의 말에 손뼉을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나는 말을 잃은 왕비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로 했다.

“마스터슨 경의 고발이 틀렸다면 사과할 의향이 있습니다.”

왕비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물었다.

“공개적으로?”

나는 씩 웃었다.

“제가 틀렸다면 당연히 공개적으로 사과해야죠.”

이 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왕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전하.”

곧이어 왕비의 시선이 엘리엇을 향했다.

“자네는 어떤가, 번즈 백작. 자네 역시 마스터슨 경의 고발이 틀렸다면 사과할 의향이 있는가?”

엘리엇은 지금 나와 왕비 사이에 이뤄진 모종의 거래가 어떤 건지 잘 이해 못 한 표정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저는 레이디 비스컨을 따르겠습니다.”

“좋아.”

홀가분해졌는지 왕비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와 엘리엇에게 차례로 악수를 청한 뒤 그만 가 봐도 좋다고 말했다.

“뭐였습니까?”

왕비와 만났던 방에서 나오자 엘리엇이 물었다. 여기는 접견실이 아니다. 왕비의 집무실도 아니고. 아마 소규모 다과실이겠지.

왕비는 비공개적으로 나와 엘리엇을 만나고 싶었던 거다.

“뭐가요?”

나는 엘리엇과 함께 시종의 뒤를 따라 걸으며 반문했다. 그러자 그가 내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방금 전에 말입니다. 정말 마스터슨 경의 고발이 틀리면 사과할 겁니까?”

“그럼요.”

“공개적으로요?”

“그렇게 말했잖아요?”

여전히 그는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시종이 건물 입구에서 멈춰 서자 그에게 안내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엘리엇을 쳐다봤다.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는 건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닌데요.”

시종이 떠나자 엘리엇이 말했다. 왕궁 안의 사람을 만나는 건 불편하지만 왕궁은 좋다. 여긴 정원을 잘 꾸며 놓거든. 나는 건물 앞에 꾸며 둔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면 사과해야죠.”

“전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를 따르겠다고 말했네요?”

“당신은 늘 옳으니까요.”

엘리엇의 확고한 믿음이 좀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에게 이 정도로 믿음을 줄 만한 일을 했던가?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잠시 걷자는 신호로 정원을 따라 고개를 까딱했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내가 전하께 말했죠. 마스터슨 경의 고발이 틀렸다면 사과를 하겠다고요.”

“네.”

엘리엇은 마치 순종적인 기사처럼 대답했다. 멀리서 기사들이 순찰하는 것까지 보이자 더 기분이 이상했다.

“틀렸다는 걸 어떻게 알죠?”

엘리엇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스터슨 경이 자신이 틀렸다고…….”

거기까지 말한 엘리엇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입을 다물고 나를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층 여유로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자신이 틀렸다고 밝힐 리가 없군요.”

마스터슨 경은 자신만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억울함에 눈에 보이는 세라도 백작을 고발한 거다. 이제 와서 아무 이유 없이 사실은 자기만 나쁜 사람이 맞고 세라도 백작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거라고 말할 리가 없다.

“하지만 세라도 백작은 어떻습니까? 그가 마스터슨 경에게 압박을 가하거나…….”

“재정 문제를 해결해 주려 할 수도 있죠.”

나는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을 구경하며 말했다. 마스터슨 경은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그가 잘못 말한 거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허리를 숙여 장미꽃을 확인했다. 와, 이 장미꽃은 색이 두 가지네.

역시 왕궁 정원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우리도 이런 걸 심자고 정원사에게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엘리엇이 말했다.

“세라도 백작이 그렇게 나오면 어쩌시려고요?”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웃었다. 세라도 백작과 친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는 백작이다.

“세라도 백작이 그 정도로 내 사과를 받고 싶어 할까요?”

“받고 싶으니 왕비에게 요청한 거 아닙니까?”

“오, 아니죠. 세라도 백작이 원한 건 조용한 사과일 거예요.”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는지 엘리엇의 눈동자가 빛났다.

나는 왕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스터슨 경이 틀렸다면 사과하겠다고. 그렇다면 선행되어야 할 건 마스터슨 경의 정정 선언이다. 사람들은 일주일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떠올릴 테고, 어쩌면 몰랐던 사람들도 알게 되겠지.

그 뒤에 내가 공개적으로 사과한다면? 이번 일은 완전히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오는 거다. 쉬쉬하던 사람들은 마스터슨 경의 정정 선언과 상관없이 세라도 백작이 자신이 후원하는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떠들어 대기 시작할 거고.

“귀족으로서, 그리고 백작가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시끄러워지는 건 백작가에서 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에요.”

어머니도 그러지 않으셨던가. 한동안은 조용히 있으라고. 조용히 있으면 사람들이 잊어버릴 거라고.

세라도 백작이 원한 건 내가 자기 집에 조용히 찾아와서 실수였다고 고개를 떨구고 사과하는 거였을 거다. 그리고 세라도 백작가에서 열리는 모든 행사에 먼저 나서서 참석하는 거일 테고.

내가 세라도 백작가에서 열리는 모든 행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이번 일이 오해였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세라도 백작에게 사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뒤로 세라도 백작이 자기가 후원하는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을 테고.

“흠. 그럼 왕비가 아까 공개적으로 사과할 거냐고 물어본 건…….”

“날 도와주신 거죠.”

물론 내가 먼저 왕비의 짐을 덜어 줬다. 마스터슨 경이 틀렸다면 사과하겠다고 말했으니까. 이제 왕비는 세라도 백작에게 이렇게 말하면 된다.

‘레이디 비스컨이 마스터슨 경이 틀렸다면 얼마든지 사과하겠다는군. 그것도 공개적으로 말이야. 대단히 적극적이야. 내가 이만큼 해 놨으니 자네는 마스터슨 경이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도록 하게만 하면 되네.’

나는 왕비 전하가 세라도 백작에게 어깨를 펼 수 있게 해 드렸고 그녀는 내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준 거다. 동시에 세라도 백작의 화살을 나와 엘리엇에서 마스터슨 경에게 돌려준 거고.

“허.”

엘리엇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게 팔을 내밀며 물었다.

“만약 세라도 백작이 당신의 공개적인 사과를 원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그럴 리 없다. 나는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딱 잘라 말하려다 멈췄다. 그래, 엘리엇의 말대로 만에 하나 세라도 백작이 그걸 원할 수도 있겠지.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나는 그의 팔 안쪽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산책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그럼 해야죠. 기쁘게요.”

“기쁘게요?”

“내 사과로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되돌아볼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세라도 백작이 후원한다는 그 아이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될 테고요.”

그럼 그 애를 도와줄 수 있을 거다. 모이는 시선이 많을수록 힘이 더 커지니까.

엘리엇은 여전히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아, 괜히 설명했나.

문득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조금 전 나와 왕비는 모종의 거래를 한 거다. 나는 왕비가 내 편인지 세라도 백작 편인지를 가늠했고 내게 좀 더 호의적인 것 같아 보이자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허리를 세워 엘리엇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보기에 이 모든 일이 음흉하게 보인다는 거 알아요. 이게 귀족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죠.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거예요.”

평민으로, 그리고 용을 물리치기 위해 모험을 떠난 사람에게 이런 귀족적인 일들이 불편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가 이런 일로 내게 실망하지 않았으면 했다.

“유제니.”

엘리엇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응?

잠깐 당황하는데 그가 내 손을 잡더니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아, 손등 키스를 하려는 것뿐이었군. 아주 잠깐, 그가 내게 키스를 하려는 줄 착각했다.

어우, 창피해.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르려는데 내 손등에서 입술을 뗀 엘리엇이 말을 이었다.

“모든 사람이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얻길 바랍니다.”

그건 그렇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내 손을 잡은 채 허리를 펴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만큼 우아하고 관대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뭐라고?

너무 과한 평가에 머릿속에 하얗게 되어 버릴 정도였다. 나는 그가 왜 그렇게까지 나를 좋게 평가하는지 몰라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었다.

어,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부담스러워서.

하지만 그때, 엘리엇이 내 손을 놓더니 슬쩍 물러났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던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디 비스컨, 철의 궁에서 나왔습니다.”

헨더슨 후작 부인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엘리엇을 쳐다봤다. 그녀는 왕대비 전하의 시종으로 왕대비 전하는 철의 궁에 머물고 계신다.

그러니 헨더슨 후작 부인이 철의 궁에서 나왔다는 말은 왕대비 전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