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36/239)

40화. 10 – 1

렌시드 자작가의 무도회에 다녀온 뒤, 나는 어머니께 꽤 혼이 났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소란을 피웠기 때문이다.

“소니아가 얼마나 당황했겠니?”

자작 부인이 놀랐을 거라는 말에 나는 죄송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소란을 피운 것에 대한 사과는 이미 편지로 보냈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고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아마 비슷하게 행동했을 거다.

그 자리에서 로렌과 줄리아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으니까.

“일단 조용히 있자. 며칠 있으면 다들 잊어버리겠지.”

그럴 거다. 어머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교계에서 유명한 것도 아니니까 길어야 일주일이면 잠잠해지겠지.

나는 곧 있을 세라도 백작의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신문을 집어 들었다. 어머니 말씀대로 한동안 조용히 있으려면 그런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는 게 좋으니까 말이다.

“네가 이미 약혼을 해서 다행이야.”

내가 어머니께 혼나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올리버가 얄밉게 말했다. 그는 읽고 있던 신문에서 눈을 떼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한동안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아야 하잖아.”

만약 약혼하지 않았다면 배우자를 구하기 위해 무도회에 참석해야 하는데 이미 약혼자가 있으니 피해가 없다는 말이다. 참, 못됐다, 못됐어. 나는 올리버를 한 번 흘겨보고 신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올리버의 말대로 내가 약혼자가 없었다면 세라도 백작의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는 건 꽤 아쉬운 일이 됐을 테니 다행인 건 맞다.

맞나?

“레이디 유제니 비스컨. 전하께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일주일 뒤, 나는 왕궁에서 과연 세라도 백작의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왕비 전하께서 나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확실하게 말하건대, 나는 왕비 전하와 친분이 없다. 그분과 만난 건 내가 사교계에 데뷔하던 날뿐이었고 왕비 전하는 내게 데뷔를 축하한다고 한마디 했을 뿐이다.

물론 사교계 데뷔한 모든 사람이 왕비 전하께 직접 축하를 듣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앞에서 인사만 하고 물러간다. 그러니 축하한다는 말을 들은 건 꽤 영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특출난 사람들은, 그러니까 미모가 아주 뛰어나거나 빛나는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길게 이야기하신다. 올해 최고의 보석이라거나, 눈부신 인재라거나.

왕비 전하가 내게 데뷔를 축하한다고 말한 이유는 내 어머니가 공주님의 시종이었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나는 보통인 거지.

“어서 오게, 레이디 비스컨.”

“전하.”

문이 열리고 소파에 앉아 있던 왕비 전하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가볍게 이야기하자고 불렀네. 여기 번즈 백작은 이미 알고 있겠지?”

뭐라고? 고개를 돌려 보니 왕비 전하의 맞은편에 엘리엇이 앉아 있었다. 잠깐, 이러면 진짜 내가 여기 온 게 세라도 백작 때문인 모양인데?

나는 왕비가 권하는 대로 엘리엇의 옆에 앉았다. 그도 온 지 얼마 안 됐는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하인이 세 사람분의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레이디 비스컨은 약혼자가 렌시드 경이었던가?”

잠시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왕비 전하가 물었다. 이 찻잔 예쁘네. 내 취향보다는 좀 화려하지만. 찻잔을 들며 감탄하고 있던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네, 전하. 작년에 약혼했습니다.”

“결혼식은 올해 예정인가?”

원래는 그러려고 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내년입니다. 어닝이, 렌시드 경이 내년에 치르고 싶다고 해서요.”

“그렇군.”

왕비 전하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무르는 게 느껴졌다. 왜 그러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녀는 그대로 엘리엇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번즈 백작은 어때? 아직 홑몸으로 아는데.”

차를 마시던 엘리엇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지만 그대로 차를 마시더니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약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네, 홑몸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둔 사람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 그래?”

왕비는 금세 흥미를 나타냈다. 나도 엘리엇이 마음에 뒀다던 사람이 궁금하다. 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렇게 잘난 남자를 애타게 하고 있다니. 누군지 말해 주면 내가 도와주지.”

왕비의 제안에 엘리엇은 나와 왕비 전하를 한 번씩 쳐다보더니 씩 웃었다. 그리고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런 소중한 건 제 능력으로 얻어 내는 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쩐지 그다운 거절이다. 동시에 아직도 그가 마음에 둔 여자가 누군지 모른다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그건 왕비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엘리엇을 쳐다보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건 세라도 백작에 대한 거겠지. 귀족 간의 분쟁을 조율해 주는 것도 왕족의 의무니까.

하지만 왕비는 지극히 귀족답게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서론을 길게 이어 갔다. 덕분에 우리의 대화를 오늘 날씨에서 산책로와 여름 휴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전하.”

왕비 전하와 여름 휴가 이야기를 하는 건 좋지만 이래서야 내일이 아니라 이번 주 안에도 집에 못 돌아갈 것 같다. 나는 그녀가 차를 마시느라 말을 멈춘 틈을 타서 끼어들었다.

“저희가 도와드릴 일이 있는지요.”

내 생각이 맞았는지 왕비가 멈칫했다. 그녀는 나와 엘리엇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두 사람이 렌시드 자작의 무도회에서 세라도 백작과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이번에는 엘리엇이 말했다. 그는 몰랐다는 표정이었고 나는 최대한 무표정하게 있으려 했다.

그걸 오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왕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더니 우리를 똑바로 보며 위엄 있게 말했다.

“오해 때문에 자네들과 세라도 백작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지 않겠나? 게다가 렌시드 자작가도 중간에서 얼마나 곤란하겠어?”

마지막 말은 나를 향한 거였다. 렌시드 가에서 일어난 사건이니 렌시드 가도 곤란할 거라는 말이다.

그건 맞다. 하지만 고작해야 별일 다 있네 정도지 왕비의 말대로 해결해야 할 정도로 곤란한 일은 아니다. 아마 렌시드 자작 부인은 다음 행사 때 세라도 백작을 초대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정도일 거다.

그러니 여기서 왕비가 렌시드 자작가를 입에 올리는 건 내게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다. 그렇게 호락호락 압박을 당해 줄 수는 없지.

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

“렌시드 자작가에서 왕비 전하께 곤란하다고 호소했나 보군요?”

모르는 척 묻는 내 질문에 왕비의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아니라고 하면 자신의 말이 허풍이 되어 버린다.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내 말은 여러 가문이 곤란해졌다는 걸세.”

“그렇다면 세라도 백작이 호소한 모양이군요.”

내 말에 다시 왕비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다시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래.”

“전하께서는 제게 세라도 백작에게 사과하라고 명령하실 생각이시고요.”

이번에는 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봤다. 지극히 귀족다운 왕비에게는 꽤 당황스러운 상황일 거다.

귀족은, 특히 왕족이라면 모든 상황에서 빙빙 돌려 말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대로 왕비는 수긍해야 할지 부정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와 엘리엇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명령할 생각은 없네.”

어쩌면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비는 얼마든지 내게 세라도 백작에게 사과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즉, 누군가를 편애할 위치에 있다는 말이다.

제대로 된 왕족이라면 누군가를 편애하는 걸,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걸 피하려 한다. 그러니까 왕비는 제대로 된 왕족이라는 뜻이다.

약간 더 그녀가 좋아졌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곤란할 왕비의 입장을 이해한다. 세라도 백작은 왕비에게 쫓아와서 징징거렸을 거고 내게 사과를 받아 달라고 요청했겠지.

“나는 권유하는 걸세. 세라도 백작의 명예를 더럽혀서 자네들도 좋을 게 없잖나.”

이어진 왕비의 말에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세라도 백작을 고발한 건 내가 아니라 마스터슨 경이다. 그러니 그의 명예를 더럽힌 것 역시 마스터슨 경이다.

“마스터슨 경과는 이야기해 보셨나요?”

“아니.”

“어째서요?”

이해가 안 된다. 마스터슨 경이 고발을 취소하는 게 먼저 아닌가? 그래야 나도 사과를 하든 뭘 하든 할 수 있는 거고.

하지만 왕비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소파 팔걸이에 팔을 얹고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내게 조용히 물었다.

“세라도 백작의 무도회가 어땠는지 알고 있나?”

기사에서 읽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줄줄이 취소해서 꽤 휑했다고 한다. 특히나 미혼 여자들이 많이 취소했다고.

“그들이 취소한 건 자네 때문이지. 레이디 비스컨.”

“저요?”

왕비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나? 나 때문이라고? 나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 저는 그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행사가 열리기 바로 이틀 전에 참석을 취소하게 하려면 상당한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왕비 전하는 가능하겠지. 공작 부인도 가능할 거다.

후작 부인도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주 인기 있는 레이디라면 가능할 거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조용하게 살아왔고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아 지인의 폭도 좁은 편이다.

왕비는 잠시 나를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엘리엇을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번즈 백작, 자네 탓이기도 하고.”

“제가 비난받을 짓을 한 줄은 몰랐습니다만.”

엘리엇은 씩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가끔 보면 이 남자는 예의가 바른 건지 무례한 건지 모르겠다. 왕비 역시 엘리엇의 무례한 말에 잠시 당황하다가 그가 신흥 귀족이라는 것을 떠올렸는지 침착하게 말했다.

“귀족이라면 자신의 언행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을 해야 하지.”

“그건 세라도 백작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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