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5/239)

39화. 9 – 7

다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세케이 경?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제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려 했다.

“아, 아니…….”

루스트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로렌에게 좋은 경험이 되라고, 아니, 그러니까…….”

점점 분위기가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치를 세케이가 돈이 많다는 건 다들 알고 있다. 그와 사업을 같이 하거나 투자를 받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같은 이유로 치를이 결혼했다는 것과 어린 여자에게 집적댄다는 것도 다들 알았다. 당연하게도 그에게 기분 나쁜 경험을 한 사람도 있었다. 치를이 돈이 많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알고 지내니 입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

무도회장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던 사람들에게도 마스터슨 경과 레이디 비스컨이 다투고 있다는 게 알려졌다.

예의 바르고 융통성 없는 레이디 비스컨과 공작새 같은 마스터슨 경의 다툼에 사람들은 금세 흥미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유제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루스트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유제니가 로렌과 줄리아를 루스트에게서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제니의 시선이 루스트에게는 비난처럼 다가왔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다 버럭 소리쳤다.

“아니, 뭐 대단한 걸 시킨 게 아니라고요! 그냥 차나 한잔 마시라고…….”

장 안이 워낙 조용한 탓에 “헉” 하고 누군가가 놀라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루스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유제니와 로렌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외로운 남자와 차 한잔 마셔 주는 게 그렇게 힘듭니까? 좀 웃어 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고! 내 돈으로 먹고 자고 있잖아!”

“줄리아.”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유제니는 뒤를 돌아보고 줄리아를 불렀다. 로렌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줄리아가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자 유제니가 침착하게 말했다.

“리즈 양과 먼저 가서 내 마차에 타고 있어.”

이런 걸 굳이 로렌이 보게 할 필요가 없다. 그녀의 지시에 줄리아와 로렌이 망설였지만 지켜보고 있던 다른 부인들이 나서서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갔다.

그제야 루스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어느새 사람들은 그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 아니, 내 말은 저 애 드레스를 보라고요. 저게 얼만지 압니까?”

부랴부랴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상황은 더 나빠졌다. 로렌의 드레스 값을 들먹이는 루스트의 말에 이제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까지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유제니는 줄리아가 로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돌려주죠.”

뭐를? 루스트는 유제니의 말에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억울하다. 고작 드레스값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가씨, 잘 생각해 봐요. 저 녀석…….”

“레이디 비스컨.”

루스트는 자신의 말을 자르는 유제니의 말에 멈칫했다. 뭐라고? 그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자 유제니가 다시 말했다.

“내 이름은 레이디 유제니 비스컨이에요. 마스터슨 경.”

예의를 지키라는 완곡한 말에 루스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제야 그는 눈앞의 여자가 비스컨 백작의 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레이디 비스컨.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는 말은 자식을 낳지 않았다는 뜻이고. 루스트는 공격할 지점을 알아차리자 재빨리 친절하게 말했다.

“그래요, 레이디 비스컨. 자식을 안 길러 봐서 모르나 본데 애 하나 기르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 모르죠?”

로렌에게는 돈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그는 로렌을 아카데미에 보내 주기까지 했다. 루스트는 유제니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 학비가 얼만지 알 거 아닙니까. 게다가 옷도…….”

“모르는데요.”

모른다. 유제니는 단칼에 루스트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았다. 비스컨 가는 집 안에 가정 교사를 여러 명 고용해 하나뿐인 딸을 교육했다. 비용만으로 보면 그쪽이 훨씬 비싸다.

유제니의 말에 루스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참, 융통성 없는 여자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꽤 많이 들었다고요. 애한테 드는 돈이 얼만지 다들 알 겁니다. 남의 자식 기르기가 어디 쉽습니까?”

이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무표정하던 유제니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루스트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식을 기르는 건 힘든 일이다. 감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많은 자원이 들어간다. 심지어 로렌은 루스트의 자식이 아니다. 그는 친척 아이를 후견인으로 돌봐줬고 아카데미까지 보냈다.

“아, 그래서 기른 건가? 자라면 이런식으로 이용하려고?”

그때, 엘리엇이 나타났다. 유제니의 뒤에 선 그는 마스터슨 경을 향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런식으로 이용한다는 거친 발언에 루스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아니 무슨 그런 말을…….”

그는 재빨리 엘리엇의 말에 반박하려 했다. 이용이라니. 루스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변명이 흘러나왔다.

“내, 내 말은 키워 줬으니 밥값이라도 하라고…….”

그러자 다시 주변이 싸늘해졌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루스트의 말에 잠시 말을 잃었다가 곧바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밥값이라니, 듣기 좀 그렇군요.”

“아카데미까지 보냈으니 돈이 꽤 들긴 했겠지만요.”

“그럼 애초에 안 받아들였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게요. 마스터슨 가는 사정이 별로 안 좋다고 들었는데요.”

“그런 것 치고는 마스터슨 경의 씀씀이는 꽤 좋던데요.”

루스트의 씀씀이가 도마 위에 오르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가 입은 옷차림으로 향했다. 다들 유제니와 같은 것을 봤다. 번쩍이는 단추. 금실 자수.

“내가 지불하죠.”

그때, 유제니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의 루스트에게 다시 말했다.

“그 밥값이요. 내가 낼 테니 비스컨 가로 청구서를 보내세요.”

어마어마한 금액일 것이다. 하지만 유제니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여차하면 그녀의 보석을 팔면 된다. 당장 중요한 건 로렌의 안전이었다.

“아, 아니, 밥값뿐 아니라 아카데미도…….”

“다 청구해요.”

감정 없는 냉정한 목소리에 루스트의 얼굴색이 핼쑥해졌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끔거리다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나만 그런 게 아니야! 저기 세라도 백작도….”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에 서서 술을 마시며 이 광경을 지켜보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세라도 백작은 깜짝 놀라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 나는……. 아니, 무슨 소리야!”

제일 처음에 세라도 백작은 변명하려 했다. 그다음에는 부인하려 했고.

하지만 곧 그는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사라진 세케이 경처럼 말이다.

하지만 루스트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그만 그러는 게 아니다. 자신만 나쁜 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소리쳤다.

“거짓말 마시죠! 다음 달에 세케이 경과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잖습니까!”

그의 비명 같은 고함이 사람들의 시선을 세라도 백작에게 이끌었다. 슬금슬금 도망치려던 백작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물러나자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스터슨 경이 다시 소리쳤다.

“봐봐! 세라도 백작도 그러잖아! 저 사람은 아카데미에 보내지도 않는다고!”

예상하지 못한 폭로에 세라도 백작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허둥지둥 변명했다.

“아니, 나는, 그러니까, 걔는 하녀의 자식이라…….”

그거로 충분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동시에 루스트는 계속해서 소리 지르고 있었다.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다들 그러는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다시 유제니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세라도 백작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없나?

유제니의 머릿속에 빠르게 돌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다. 유제니는 주변을 돌아보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열리는 세라도 백작가의 무도회에는 불참해야겠네요.”

이미 참석하겠다고 초청장에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참석하지 않을 거다. 마스터슨 경의 고발이 사실이라면.

물론 그래 봤자 유제니 한 명 빠지는 거다. 대단한 영향력은 없다는 걸 유제니도 알았다. 그리고 세라도 백작 역시 그걸 알았다.

“뭐, 그러시던지.”

금세 자세를 바르게 한 세라도 백작은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미혼도 아니고 이미 약혼한 여자가 안 오겠다고 하는 거다.

레이디 비스컨을 노리고 참석할 남자 참석자는 없을 거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때, 번즈 백작이 나섰다.

“아, 그럼 저도 거절해야겠군요.”

댁은 왜? 사람들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엘리엇을 향했다. 그는 씩 웃더니 유제니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한쪽 팔을 내밀며 덧붙였다.

“그런 찝찝한 사람이 여는 무도회에 참석할 아가씨들은 없을 것 같거든요.”

세라도 백작은 엘리엇의 팔에 손을 얹고 저택을 나서는 유제니의 뒷모습을 보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 봤자 고작 두 명이다. 한 명은 이미 약혼한 여자고 한 명은 신흥 귀족이다. 큰 영향력이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다음 주라고는 하나 이제 겨우 사흘 남았다.

세라도 백작은 자신의 무도회에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는 하겠지. 하지만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세라도 백작가로 무도회 참석을 취소하겠다는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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