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4/239)

38화. 9 – 6

“요새 유명한 공연인데, 아마 못 봤을 거야. 음악이 아주 기가 막혀.”

로렌이 반응하거나 말거나 세케이 경은 자신이 가진 극장의 좌석이 얼마나 좋은지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로렌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꿈을 꿨을 때는 치가 떨릴 정도로 생생했던 그녀의 미래가 어느새 흐려져 있었다. 세케이 경이 이렇게 젊었던가? 그녀의 꿈에서는 훨씬 늙은이였다.

그리고 훨씬 더 역겨운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세케이 경은 그냥 한심하고 한숨 나오는 작자에 불과했다.

왜 꿈에서 그녀는 이 남자를 그렇게나 무서워했던 걸까. 어쩌면 그게 진짜로 그냥 꿈이었던 게 아닐까. 그녀가 그런 생각으로 골똘해져 있을 때였다.

“어머, 로렌!”

아까 인사를 했던 줄리아가 마치 오늘 처음 만난 것처럼 반갑게 다가왔다. 그녀는 얼떨떨해하는 로렌에게 다가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여기 온 줄 몰랐는데. 마스터슨 경과 왔어?”

“어? 어.”

눈치 빠르게도 로렌은 줄리아가 뭘 하는지 알았다. 그녀를 여기서 빼내 주려는 거다.

아카데미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관심 없는 남자나 잔소리하는 교사들에게서 친구를 빼내 주기 위해 아이다와 줄리아, 로렌은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서로에게 말을 걸곤 했다.

로렌은 재빨리 줄리아에게 맞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너도 온 줄 몰랐는데. 누구와 왔어? 아버지?”

“아니, 아버지는 오늘 근무라.”

“근무?”

귀족이라면 일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줄리아는 노동자 계급이라는 말이다. 치를 세케이는 줄리아가 노동자 계급인 것 같아 보이자 눈을 빛내며 물었다.

노동자 계급인데 이런 귀족 무도회에 왔다는 건 로렌 같은 경우라는 말이다. 본인과 그 가족은 귀족이 아니지만, 먼 친척이나 지인 중에 귀족이 있는 경우.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집이 아주 부유하거나 귀족에게 환상이 있거나.

치를은 줄리아가 후자일 거라 생각했다. 부유하다고 하기엔 줄리아의 옷차림이 평범했기 때문이다. 이런 애도 나쁘지 않지. 그는 줄리아도 자신의 박스석에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줄리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오늘 입궐하셨어요.”

“이, 입궐?”

당황하는 치를에게 로렌이 말했다.

“아, 제 친구 줄리아 에스컬레예요. 로안 에스컬레 경이 아버지시죠.”

로안 에스컬레라면 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약간 고지식한 기사라고 들었다. 아니, 그냥 기사가 아니라 기사단장이다.

눈앞의 소녀가 기사단장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치를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멈칫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 그렇군. 둘이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주지.”

대단하네. 로렌은 에스컬레라는 이름에 세케이 경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쓸모없는 놈들만 접근한다던 아이다의 투덜거림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가 없다던 줄리아의 투덜거림도 모두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로렌은 조금 서글퍼졌고 줄리아가 부러워졌다.

“고마워, 줄리아. 덕분에 시간을 좀 벌겠어.”

그래 봤자 루스트가 쫓아올 테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저 짜증 나는 남자를 상대하지 않을 수 있다. 로렌은 이게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그녀의 후견인인 마스터슨 경은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로렌을 팔아넘기는 쪽을 택했다.

당장은 피할 수 있어도 루스트는 또 같은 짓을 할 거다.

역시 그녀의 앞에 놓인 건 마스터슨 경의 눈을 피해 도망치는 것뿐이다. 로렌은 머릿속으로 또다시 도망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줄리아에게도 비밀로 해야 한다.

“로렌.”

그때, 생각보다 빠르게 루스트가 다가왔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로렌에게 다가와 그녀의 팔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세케이 경은 어디 갔니?”

아프다. 목소리는 평화로웠지만, 로렌의 팔을 움켜잡은 루스트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루스트의 손을 뿌리치려 애쓰며 말했다.

“몰라요. 내가 세케이 경의 엄마는 아니잖아요.”

적대적인 로렌의 대꾸에 루스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그녀를 억지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말대꾸하지 마. 내가 너한테 뭘 하라고 했지?”

치를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라고 했다. 그가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해 주라고도 했고.

그게 그녀가 마스터슨 가에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렌은 그게 그녀의 인생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았다. 아니, 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루스트에게서 팔을 빼려 애쓰며 말했다.

“마스터슨 경. 경이 내 삼촌이라고 해서 날 소유한 건 아니에요.”

로렌의 지적에 루스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건방진 것.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드레스 하나만 사 주면 고분고분하던 아이가 갑자기 건방져졌다.

그는 더욱 세게 로렌의 팔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내가 뭐 대단한 거 하래? 그냥 세케이 경의 기분만 맞춰 주라는 것뿐이잖아. 옆에서 웃어 주고 가끔 공연이나 좀 같이 봐 주고.”

그게 뭐가 그렇게 싫다고 이 야단인지 모르겠다. 루스트는 갑자기 반항하는 로렌이 답답해서 말했다. 그때, 보다 못한 줄리아가 끼어들었다.

“로렌이 아프다잖아요.”

그제야 루스트는 줄리아가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여전히 로렌의 팔을 움켜쥔 채 로렌에게 물었다.

“줄리아, 너도 공연 좋아하지? 내 친구가 좋은 공연을 좋은 자리에서 보여 준다는데도 이 애가 싫다고 하는구나. 이해가 되니?”

이 나이 대의 여자아이들이라면 극장에서 보는 공연을 아주 좋아할 거다. 루스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물론 그의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다. 줄리아는 최근 유명한 공연을 보고 싶어서 아버지를 졸라 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공연이 친구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루스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무리 재미있는 공연이어도 보여 주는 사람이 별로면 보기 싫은데요.”

루스트는 그제야 로렌이 줄리아에게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대로 로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더 세게 잡으며 나지막하게 윽박질렀다.

“너, 설마 여기저기에 떠들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아프다고요!”

로렌은 마스터슨 경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때, 줄리아가 기다리던 구원자가 나타났다.

“뭐 하는 거예요?”

깜짝 놀란 나머지 유제니의 목소리는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크게 터져 나왔다. 덕분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유제니와 로렌, 그리고 루스트를 향했다.

“그 손, 놓지 못해요?”

다시 유제니가 외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로렌의 팔을 잡고 있는 마스터슨 경의 손을 향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에 놀라 재빨리 손을 놓았다. 그리고 유제니에게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오, 오해입니다.”

“자기보다 어린애를 괴롭히는 게 어떻게 오해일 수 있죠?”

유제니는 루스트의 손에서 풀려난 로렌을 재빨리 자신의 뒤로 잡아당겨 숨기며 소리쳤다. 로렌이 그녀보다 키가 좀 더 크다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저 남자가 로렌에게 또 손을 대려 한다면 유제니를 쓰러트려야 할 것이다.

“자, 잠깐만요. 저는 루스트 마스터슨입니다. 로렌의 삼촌이자 후견인이죠.”

그제야 유제니는 남자가 마스터슨 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이 헛소문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루스트의 옷차림은 꽤 화려했다. 고급스러운 천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번쩍이는 단추가 몇 개나 달려 있었다. 게다가 소매와 깃에도 금실로 자수가 놓인 게 보인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사람치고는 화려하다. 지금 이 자리에 엘리엇이 온다면 루스트는 공작새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후견인인데 자기 조카를 괴롭힌다는 말이에요?”

이번에는 일부러 좀 크게 말했다. 유제니의 목소리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속삭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루스트는 당황해서 유제니에게 다가왔다.

“아, 아니, 오해예요.”

“다가오지 마세요.”

유제니는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무슨 변명을 하려는 건지 몰라도 로렌의 곁에 다가오는 걸 허락할 생각은 없다.

그녀의 태도에 루스트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유제니를 설득하기 위해 말했다.

“전 로렌을 교육하고 있던 것뿐입니다. 생각하시는 것과 달라요.”

“무슨 교육인지 매우 알고 싶군요.”

유제니의 말에 루스트의 말문이 막혔다. 무슨 교육이냐고? 그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횡설수설 말했다.

“그, 그러니까, 그게 뭐냐, 그, 어른의 말을 잘 듣자는…….”

“이런 곳에서 팔에 멍이 들도록 세게 잡고 가르칠 정도면 아주 중요한 거였겠네요. 저도 한 수 배우고 싶으니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주변이 조용해졌다. 루스트가 무슨 교육을 하려 했는지 사람들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일이길래 저러는 거죠?”

“마스터슨 경이 후원하는 소녀를 교육하고 있었다네요.”

“여기서요?”

굳이? 사람들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후견인이 후원하는 아이를 교육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부모와 가정 교사가 아이를 교육하는 것처럼 집 안에서 교육을 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로렌은 십 대 후반으로 보인다. 저 정도 나이의 아이를 보는 눈도 많은 곳에서 혼을 내는 건 그리 보기 좋은 일이 아니다.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런 거죠?”

이제 사람들의 호기심은 로렌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로 넘어갔다. 사람들에게 아주 무례했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그때, 줄리아가 끼어들었다.

“솔직하게 말하세요. 세케이 경과 단둘이 공연을 보기 싫다고 해서 혼내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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