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3/239)

37화. 9 – 5

어닝의 손님이라고? 소니아의 얼굴에 의심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자 어닝이 재빨리 소개했다.

“번즈 백작님, 제 어머니이신 소니아 렌시드 자작 부인입니다. 어머니, 여기는 엘리엇 번즈 백작이고요.”

번즈 백작이라면 안다. 소니아는 그제야 의심을 풀고 엘리엇에게 인사했다. 아들이 이런 사람과도 안다는 게 놀라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어볼 때가 아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네가 초대했어?”

자작 부인이 떠나고, 유제니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어닝에게 물었다. 엘리엇과 친하게 지내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녀의 질문에 어닝은 다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클럽에서 만난 번즈 백작이 초대받아야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클럽에서 만나서.”

그렇구나. 유제니는 잘했다고 말하려 했다. 어닝이 엘리엇과 그녀가 친해지는 걸 못마땅해하는 것과 별개로 그녀는 엘리엇과 어닝의 사이가 어긋나는 게 안타까웠다.

둘 다 좋은 사람이다. 화해하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줄리아가 다가왔다.

“유제니, 좀 도와줘요.”

아까 로렌을 찾는다고 가지 않았나? 도와달라는 말에 유제니는 물론 어닝과 엘리엇의 시선이 줄리아를 향했다. 급한 마음에 유제니의 곁에 두 남자가 있는 것까지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줄리아는 그제야 어닝과 엘리엇을 발견하고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유제니에게 속삭였다.

“세케이 경이 와 있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물어보려던 유제니의 머릿속에 이 자리에 로렌과 마스터슨 경도 와 있다는 게 떠올랐다.

“어디 있어?”

세케이 경이 어떻게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여기저기 사업에 투자하고 있으니 친분 있는 누군가와 동행했을 것이다. 아니면 렌시드 자작이 초대했거나.

유제니의 말에 줄리아는 그녀를 안내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어닝이 나섰다.

“괜히 끼어들지 마, 유제니.”

어닝의 만류에 유제니는 물론 줄리아도 멈칫했다. 두 사람이 돌아보자 어닝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들 일이잖아.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아.”

“내 친구 일이에요.”

화가 난 줄리아가 반박하자 어닝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로렌이 안타까운 게 아니라 순진한 줄리아가 안타까운 거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줄리아에게 말했다.

“에스컬레. 너도 이제 현실을 알아야지. 세케이 경의 정부가 되는 게 네 친구에게 더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어.”

“뭐라고요?”

줄리아는 믿을 수 없는 말에 입을 딱 벌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맞냐고 묻기 위해 유제니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그녀 역시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닝, 말조심해.”

유제니가 경고했지만 어닝은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유제니가 너무 무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로렌이라는 아이는 몰락 귀족이다. 그것도 돌봐 줄 사람이 없는.

그럴듯한 집안도, 돈도 없는 여자를 누가 신부로 맞이한단 말인가.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여자애, 몰락한 집이라며. 지참금도 없는 여자를 누가 데려가려고 하겠어?”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유제니는 어닝이 그 정도로 잔인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줄리아는 단번에 어닝이 싫어졌다.

“로렌은 예뻐요.”

“줄리아!”

어닝에게 반박하기 위해 끼어든 줄리아에게 유제니가 핀잔했다. 배우자를 찾는 데 재력과 외모가 중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믿었다.

“그 미모가 있으니 정부라도 될 수 있는 거라고. 에스컬레, 네 친구가 못생기기까지 했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어닝, 그만해.”

도저히 못 들어 주겠다. 유제니는 어린아이처럼 줄리아와 다투는 어닝을 막았다. 그리고 줄리아에게 말했다.

“먼저 가 있어. 따라갈게.”

줄리아의 시선이 어닝을 향했다. 조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실제로도 그녀가 그동안 만나서 잠깐씩 인사를 나눴을 때는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다. 오늘 기분이 안 좋은 건가? 아니면 줄리아가 몰랐을 뿐 원래 저런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유제니가 몰랐을 리가 없다. 줄리아는 유제니도 어닝의 말에 당황한 것을 깨달았다. 이럴 때는 자리를 비켜 줘야 한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물러났다.

“왜 그러는 거야?”

줄리아가 떠나자 유제니는 작은 목소리로 어닝을 힐난했다. 방금 전 그의 언행은 정말로 무례했다. 아니, 무례하다는 거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어닝은 유제니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뭘?”

“조금 전에 한 말 말이야.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난 현실을 알려 주었을 뿐이야. 에스컬레도 아버지가 기사단장이라고 콧대만 높을 거 아냐.”

“그건 에스컬레 경과 줄리아가 알아서 할 일이야. 너와 내가 신경 쓸 이유도, 필요도 없고.”

그렇다 해도 어닝은 줄리아나 로렌 같은 사람이 싫었다. 예쁘거나 좋은 아버지를 둔 어린 여자애들.

그리고 그의 편을 들지 않는 유제니도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어닝은 허리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적대적이야?”

“무슨 소리야?”

“얼마 전부터 자꾸 나한테 반대만 하잖아. 번즈 백작도 그렇고 에스컬레도 그렇고.”

“그건 네가 자꾸 무례하게 구니까 그러는 거지.”

“무례한 게 아니라 현실적인 거지.”

뜬구름 잡는 에스컬레나 유제니를 가르쳐 주려는 것뿐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솔직해져 봐. 집안도, 돈도 없는 여자가 어떻게 좋은 곳에 시집을 가겠어?”

꼭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 유제니는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게 어렵다는 것을 인정했다. 차라리 아주 부유한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로렌 같은 사람은 어려울 것이다. 보호해 줄 사람이 전혀 없으니까.

“그럼 뭐가 필요하지?”

꼭 정부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냐고, 유제니가 반문하려 했을 때 엘리엇이 나섰다. 그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던 어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유제니, 좋은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뭐가 필요할까요?”

아무 말도 못 하는 어닝을 대신해서 엘리엇이 이번에는 유제니에게 물었다. 그녀 역시 엘리엇이 곁에 있다는 것을 잊고 있던 터였다.

유제니는 엘리엇의 질문에 인상을 쓰다가 곧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서로 마음이 맞아야죠.”

적어도 서로 같은 마음이어야 한다. 결혼을 비즈니스라고 생각한다면 상대방도 그래야 한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결혼을 사랑하는 사람의 결합이라고 생각한다면 상대방도 그래야 하고.

유제니의 대답에 엘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어닝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한다는군. 렌시드 경, 자네는 어때?”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어닝의 머릿속에서는 그렇다는 대답이 뱅글뱅글 돌았다. 유제니뿐이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엘리엇 때문에 어닝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저런.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보지?”

“아, 아니…….”

하얗게 굳은 얼굴로 어닝은 뭐라도 말하려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입을 뻐끔거릴 뿐이었다.

“제가 좀 촌스러워요.”

그때, 유제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촌스럽다고? 어닝과 엘리엇이 자신을 쳐다보자 유제니는 약간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부부가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요. 촌스럽죠. 하지만 전 그런 게 좋더라고요.”

엘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촌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유제니는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말했다.

그런 부분이 좋았다. 동시에 그가 알 수 없었던, 그녀가 절대 말하지 않는 부분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유제니의 손을 잡았다. 그는 딱히 촌스럽다거나 세련됐다거나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유제니가 촌스러운 것을 좋아한다면, 그도 그렇게 좋았다.

그는 유제니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좋더라고요.”

역시 번즈 백작은 유제니에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가 유제니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을 보는 어닝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어닝의 머릿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놀랍게도 그건 자신이라는 약혼자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유제니에게 추파를 던지는 엘리엇을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저런 남자에게 관심을 받는 유제니를 향한 분노였다.

* * *

“여자들은 공연을 좋아하지? 내가 극장에 좌석을 하나 가지고 있거든.”

같은 시각, 로렌은 세케이 경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아저씨에게는 관심 없으니 꺼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저쪽에 마스터슨 경이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세케이 경을 불쾌하게 했다간 마스터슨 경이 당장 쫓아올 게 뻔하다.

“오페라는 어때? 그런 거 좋아하지? 아, 본 적 없겠군. 내가 무슨 내용인지 다 설명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맙소사. 로렌은 지금 여기서 세케이 경을 때리면 안 되는 이유를 마음속으로 나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때려야 하는 이유가 때리면 안 되는 이유보다 많다.

물론 이유가 더 많다고 해서 때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녀의 시선이 마스터슨 경을 향했다.

조금 전 그녀를 세케이 경에게 데려가면서 마스터슨 경이 말했다. 그동안 길러 줬으니 이 정도 일은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의 사업이 그리 좋지 않다는 말도 했다. 잘못하면 마스터슨 가는 물론 그와 그의 부인까지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다는 말도.

그녀가 세케이 경과 대화를 나누는 건 그래서다. 어쨌든 마스터슨 경은, 루스트는 부모님을 잃은 그녀가 지금까지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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