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2/239)

36화. 9 – 4

“그 공연, 나도 보고 싶었는데.”

전날 번즈 백작의 초대를 받아 공연을 보고 왔다는 유제니의 말에 줄리아는 부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요즘 유명한 공연이지만 줄리아는 아직 못 봤다.

약간 잔인한 복수극이라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연 내용에 반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 장면을 보고 싶었다.

“많이 잔인해요?”

줄리아의 질문에 유제니는 부채를 손에 든 채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공연 내내 올리버와 번즈 백작의 대화를 엿듣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부끄러운 일이다. 유제니는 어머니의 반응을 떠올리며 말했다.

“조금. 그런데 어머니는 마지막에 반전 때문에 재미있으셨나 봐.”

“아, 알아요. 어떤 놈도 주인공을 죽일 수 없을 거라는 예언 말하는 거죠?”

다행히 유제니도 그 부분은 봤다. 누명을 쓰고 귀양을 간 주인공은 복수를 하던 도중 어떤 놈도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예언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예언에 용기를 얻어 복수귀가 된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의 복수 과정에 무고한 희생자도 다수 발생하고.

“알아?”

유제니는 줄리아가 내용을 안다는 말에 놀라 물었다. 그 부분은 반전이라 신문이나 잡지에도 나오지 않는다.

줄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이다한테 들었어요. 걘 가족들과 보고 왔다더라고요.”

어디 사는 융통성 없는 아버지를 둔 불쌍한 딸과는 다르게 말이다. 줄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아이다의 아버지인 파딜라 씨는 파딜라 상회의 사장으로 딸 중 하나가 귀족과 결혼하는 게 소원인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 딸들을 귀족들과 만날 가능성이 큰 장소에 데리고 다니는 거고. 물론 극장도 그런 장소 중 하나다.

“다음에 나랑 보러 가자.”

유제니는 마지막 부분을 빼면 그냥 그랬다고 말하려다가 말을 바꿨다. 솔직히 말하면 복수귀가 된 남자의 이야기는 그녀의 관심 밖이다. 유제니는 마지막에 나온 기사 쪽이 더 관심 있었다.

“마지막 부분은 나도 다시 보고 싶어.”

“저도요. 그 부분을 직접 보고 싶어요. 어땠어요?”

줄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이다가 그 부분이 가장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해 줬다. 복수에 성공한 주인공은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전쟁의 선두에서 싸우다가 호리호리한 기사와 대치하게 된다.

주인공은 어떤 놈도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외치고, 호리호리한 기사는 투구를 벗으며 외친다.

난 어떤 년이다, 이 자식아.

“투구를 벗으면 이렇게 긴 머리가 쏟아져. 멋있더라.”

하지만 올리버는 투덜거렸다. 실제로 투구 안에 머리카락을 저렇게 풀어 둘 수는 없다고 말이다. 유제니의 설명에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기사들은 긴 머리가 없잖아요. 여자들도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거나 묶는대요. 아, 여자 하니까 말인데.”

줄리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녀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기사단에 여자가 들어왔대요.”

“기사단에 여자가 없어?”

그게 그렇게 신기하게 이야기할 거리인가? 그렇게 생각한 유제니는 다음 순간 기사단에서 여자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도 입궐한 적이 몇 번 있지만 남기사만 봤을 뿐 여기사는 본 적이 없다.

진짜로 없네? 놀라는 그녀에게 줄리아가 말했다.

“흰 사자 기사단에 들어갔대요. 원래는 검은 늑대 쪽에 들어오려고 했는데…….”

발시안에는 기사단이 두 개 있다. 흰 사자와 검은 늑대. 검은 늑대는 왕을, 흰 사자는 왕의 가족을 지킨다. 두 기사단은 근무 조건이나 입단 조건에 차이가 없지만 검은 늑대 기사단이 더 선호되는 편이다.

왕을 지키는 기사단이니까.

들어오려고 했는데? 유제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줄리아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버지가 거절했대요.”

검은 늑대 기사단의 단장인 에스컬레 경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흰 사자 기사단에 들어갔고.

저런. 유제니는 한숨을 내뱉었다. 에스컬레 경은 약간 고지식하다. 그게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있다. 지금 같은 때가 나쁠 때다.

기사단에 여자가 들어오는 일을 반기지 않았던 거겠지. 과거에도 여자가 기사가 된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역사적으로 여자로만 이뤄진 기사단도 있었다.

하지만 검은 늑대나 흰 사자에 들어온 여자는 적었고 그런 이유로 에스컬레 경처럼 여자는 기사단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아버지, 완전 꼰대예요, 꼰대.”

줄리아의 투덜거림에 유제니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우스운 것과 별개로 단어 선택에 주의를 해야 한다. 유제니는 재빨리 표정을 관리한 뒤 말했다.

“꼰대라니, 다른 데서는 사용하면 안 돼.”

안다. 심지어 아버지에게 쓰기엔 너무 버릇없는 말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줄리아가 이러는 건 유제니 앞에서뿐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유제니에게 다가오는 어닝과 렌시드 자작 부인을 보고 슬쩍 물러났다.

“전 로렌이 왔나 찾아오러 갈게요.”

“리즈 양이 여기에 왔어?”

여기는 렌시드 자작가에서 열린 무도회다. 그래서 유제니는 물론 올리버와 두 사람의 어머니까지 모두 참석했다. 줄리아는 유제니가 데려왔고.

“온다고 하던데요. 자작 부인에게 초대받았대요.”

“리즈 양이?”

“마스터슨 경이요. 자작 부인이 마스터슨 부인과 아는 사이인 모양이던데요.”

그렇구나. 유제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줄리아를 보냈다. 적어도 여기서라면 로렌이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진 않을 거다.

아무리 마스터슨 경이라 해도 렌시드 자작가에서 열린 무도회에서 로렌과 세케이 경을 이어 주려 하지는 않겠지.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유제니.”

때마침 다가온 어닝과 렌시드 자작 부인이 유제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렌시드 자작 부인은 유제니의 인사에 고개를 까닥이더니 멀어지는 줄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혼처를 찾아야 할 텐데. 에스컬레 경도 걱정이 많겠어.”

그 반대다. 유제니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스컬레 경은 줄리아가 최대한 늦게 결혼하길 바랄걸요?”

“그럴 리가. 자기 딸이 노처녀가 되길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렇긴 하다. 하지만 줄리아는 이제 고작 열여덟 살이고 노처녀라는 말을 들으려면 한참 멀었다. 유제니가 그 부분을 지적하려 할 때 어닝이 말했다.

“게다가 기사단에 저런 여자애가 돌아다니는 게 그리 좋은 일도 아니고.”

“줄리아가 기사단에 왜 돌아다녀?”

유제니의 질문에 어닝과 렌시드 자작 부인의 시선이 부딪쳤다. 두 사람은 이래서 유제니가 마음에 들었다. 요즘 여자애들답지 않게 얌전한 게.

자작 부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나이의 여자애들이 남자한테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알잖니. 기회만 되면 기사단에 들락거리려고 할 거다.”

이상한 소리를 하네. 유제니는 깜짝 놀라서 렌시드 자작 부인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동의하냐는 표정으로 어닝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제니는 안 그래요, 어머니.”

어닝은 뿌듯한 표정으로 어머니에게 말하고 유제니를 쳐다봤다. 그의 어머니 앞에서 며느리가 될 유제니를 두둔해 준 거니 그녀는 그에게 감사해야 할 거다.

하지만 유제니는 전혀 감사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줄리아는 제 사촌 동생이에요. 방금 그 말씀은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어닝과 자작 부인의 시선이 부딪쳤다. 두 사람이 유제니를 마음에 들어 하면서 동시에 불편해하는 부분이었다. 융통성이 없는 거.

어닝은 어머니와 유제니의 사이를 조율하기 위해 끼어들었다.

“어머니 말씀은 줄리아가 그런다는 게 아니라, 기사단에 괜찮은 남자가 있다는 소리에 꺅꺅대는 여자들이 있어서 하는 말이야.”

벌써부터 고부 사이를 조율해야 한다니. 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게 결혼생활이라는 거겠지. 어닝은 자신이 잘했는지 확인받기 위해 어머니를 쳐다봤다.

그리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유제니를 바라보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말조심해, 어닝. 기사단의 여자를 보고 꺅꺅대던, 남자를 보고 꺅꺅대던,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유제니가 정색하고 말하자 어닝의 입이 닫혔다. 그는 반사적으로 렌시드 자작 부인을 쳐다봤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소니아 렌시드는 아들에게 참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약혼했다고는 하나 아직 결혼한 건 아니다. 그녀는 주제를 바꾸기 위해 유제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보다 다과는 어떠니? 어닝이 네 걱정을 어찌나 하던지.”

중간중간 손님을 위해 마련해 둔 다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음료는 물론이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도 있다. 그중에 렌시드 자작가에서 가장 뿌듯해하는 건 크림이었다.

부드럽고 달콤해서 과자에 얹어 먹거나 과일을 찍어 먹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여름철에 크림을 내놓을 수 있다는 부유함 때문이다.

그녀는 유제니를 다과와 음료를 놓아둔 진열대로 데려가며 말했다.

“어닝이 널 위해 크림을 꼭 준비해 달라고 하더구나. 참 다정한 아이야. 그렇지?”

어닝이 말했다면 유제니는 자신이 언제 크림을 좋아한다고 했냐고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소니아 렌시드 자작 부인이고 그녀보다 윗사람이다.

유제니는 소니아를 민망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이 상황을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심지어 방금 전에 어닝에게 말조심하라고 지적한 상황이라 더 그랬다.

“크림을 좋아하시는 줄 몰랐습니다만.”

그때, 두 사람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렌시드 자작 부인은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남자를 발견했다.

키가 어찌나 큰지 고개를 들었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목과 어깨뿐이었다. 그녀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다가 그대로 식음료대에 부딪쳤다.

“어머니!”

“자작 부인!”

깜짝 놀란 유제니와 어닝이 소니아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지만 이미 늦었다. 부딪친 충격으로 음료가 소니아의 드레스에 튀어 있었다.

“어머, 세상에!”

소니아는 포도주로 얼룩진 드레스를 내려다보다가 화가 나서 번즈 백작을 쳐다봤다.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하냐고 화를 낼 셈이었다.

하지만 번즈 백작의 얼굴을 본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세상에, 잘생겼네.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 놀라는 그녀에게 엘리엇이 말했다.

“괜찮습니까?”

괜찮지 않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드레스였는데 이렇게 얼룩이 졌으니 버리게 됐다. 소니아는 애써 위엄을 찾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남편의 손님인 모양이군요.”

“아, 렌시드 자작 부인이시군요. 아드님께서 초대하셨습니다.”

어닝이? 소니아와 유제니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어닝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초대하고 싶어서 초대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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