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1/239)

35화. 9 – 3

“차는 제가 직원에게 주문해 놨습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번즈 백작이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중간 휴식 시간이 되기 전에 화장실에 먼저 다녀오려고 서둘렀더니 직원을 찾는 걸 잊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수건을 받으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가실까요?”

아직 휴식 시간이 되지 않았는지 복도와 계단은 조용했다. 웅웅 하고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클라이맥스인 모양이다.

나는 번즈 백작의 팔 안쪽에 손을 얹고 걸으며 그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올리버는 이런 걸 아주 싫어한다. 어머니의 쇼핑에 동행하거나 내가 어딘가를 갈 때 동반해 주는 거. 늘 귀찮다는 표정으로 조금 빨리 걸어서 나와 어머니는 천천히 걸으라고 투덜거려야 한다.

하지만 번즈 백작은 귀찮다는 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 이 상황이 즐길 만한 상황이라면 말이다.

“나 때문에 공연을 놓쳤네요.”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나는 가볍게 사과를 건넸다. 공연 중에 나 때문에 자리를 비우게 됐으니 하는 말이다. 번즈 백작은 우뚝 멈추더니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더 좋은 걸 얻었으니 괜찮습니다.”

더 좋은 거? 그게 뭐냐고 물어보려는데 번즈 백작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 뭐지? 나는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계단을 발견했다.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어요?”

내 질문에 번즈 백작은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이 뭔가를 갈등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여기서 갈등할 게 있나? 나는 그가 뭘 고민하는지 몰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번즈 백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렌시드 경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어닝이요? 자기 자리에 있겠죠?”

렌시드 자작가의 좌석이라면 한 층 아래다. 내 대답에 번즈 백작이 말했다.

“아까 전의 무례가 마음에 걸려서요. 사과를 하고 싶은데요.”

그건 참 다행이다. 확실히 공연 전에 어닝을 만난 번즈 백작은 굉장히 무례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어닝의 좌석으로 안내했다.

“어닝.”

한 층 아래로 내려가서 렌시드 가문의 좌석에 도착하자 나는 문을 두드리며 가볍게 어닝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번즈 백작에게 아무도 없는 모양이라고 말하려는데 그가 나섰다.

“렌시드 경, 엘리엇 번즈입니다. 사과를 하고 싶은데 들어가도 됩니까?”

번즈 백작은 그렇게 말하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었다.

잠깐.

말릴 새도 없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번즈 백작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문을 연 뒤였다.

문이 벌컥 열리자마자 안에서 사람들이 후다닥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닝이 안에 있었던 건가?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번즈 백작이 워낙 커서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그를 밀어 내려 애쓰며 말했다.

“어닝, 안에 있어?”

이번에도 돌아온 건 침묵뿐이다. 뭐야, 무슨 일이야? 마음 같아서는 번즈 백작을 꼬집고 싶다. 옆구리를 찌르는 거로는 꿈쩍도 안 했지만 꼬집는 건 반응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무례한 일 이전에 나쁜 짓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번즈 백작을 밀며 부탁했다.

“좀 비켜 주시겠어요?”

“어때.”

응?

내 부탁에 번즈 백작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는 안을 쳐다본 채 계속해서 물었다.

“여기 레이디 비스컨께서 비켜 달라고 하시는데. 비킬까?”

“잠깐.”

어닝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그제야 입을 연 그는 크흠 하고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유, 유제니, 거기 있어?”

있다. 이 사람들이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인상을 쓴 채 번즈 백작을 쳐다봤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고개는 안쪽을 향해 있었다.

“뭐, 뭐 필요한 거 있어? 그러니까 내 말은…….”

왜 왔냐는 거겠지. 그게 좀 상처가 됐다. 왜 왔냐니? 나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약혼자를 보러 오는 데 이유가 필요해? 네 친구에게 인사도 하려고 하는데.”

그리고 번즈 백작이 사과한다고 했지. 안타깝게도 좀 화가 나는 바람에 그건 뒤늦게야 떠올랐다. 비키지 않는 번즈 백작도 번즈 백작이지만 어닝은 왜 얼굴을 비추지 않는 걸까.

“어, 어, 그, 그래.”

그제야 번즈 백작이 비켜섰다. 대체 뭘 한 거야? 나는 나와 헤어질 때와 똑같은 어닝을 보고 인상을 썼다.

누가 보면 좌석에서 사람을 죽이고 숨긴 줄 알겠다. 하지만 이 좌석에는 사람을 숨길 만한 공간도 없고 그 정도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어닝 역시 약간 얼굴이 상기된 것 외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고.

그의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닝의 친구가 마르셀이 아닌 것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가 어닝을 쳐다봤다.

소개 안 해 줄 거야?

어닝은 약간 정신이 나가 보였다. 원래는 그가 나와 그의 친구를 소개해 줘야 한다. 하지만 어닝이 친구를 소개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어닝의 친구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처음 뵙는군요. 저는 유제니 비스컨이에요.”

“어, 저는…….”

“내 친구야.”

그제야 어닝이 끼어들었다. 이제 소개해 줘야 한다는 게 생각났나 보지? 내가 쳐다보자 어닝은 나를 밖으로 내보내려는 것처럼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중에 말해 줄게.”

“뭐?”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니? 아니면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어닝의 태도에 놀라 그의 친구를 쳐다봤다. 하지만 어닝의 친구 역시 내게서 몸을 돌리고 있었다.

“낯을 많이 가려서. 미안. 나중에 이야기해.”

결국, 어닝의 재촉에 나는 번즈 백작과 함께 다시 복도로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나는 무례한 어닝을 향한 분노와 번즈 백작을 향한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 중에 어느 쪽을 먼저 표현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미안합니다, 레이디 비스컨.”

그때, 번즈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중간 휴식 시간이 됐는지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번즈 백작은 재빨리 나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며 다시 사과했다.

“제가 사과를 해야 한다고 우겨서요. 레이디 비스컨과 렌시드 경을 곤란하게 했나 보군요.”

아니다. 번즈 백작은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예의가 없었던 건 오히려 어닝이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그는 번즈 백작과 엮일 때면 항상 약간 예의가 없었다.

잠깐, 번즈 백작이 어닝에게 무례하게 군 게 혹시 어닝이 무례해서였나?

“유제니라고 불러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에게 어닝이 저지른 무례가 웃음으로 소비되려면 나와 번즈 백작의 관계가 아주 가까운 친구여도 부족할 거다.

그래도 호칭을 좀 더 친근하게 바꾸는 게 도움이 되겠지.

“그래도 괜찮습니까?”

어, 뭐야. 나는 번즈 백작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그의 얼굴을 보고 우뚝 멈췄다. 번즈 백작은 정말로 기뻐하고 있었다. 고작 이름을 불러도 된다는 말에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어, 그럼요.”

나는 얼떨떨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호칭이잖아. 친해지면 다들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번즈 백작은 엄청난 선물이라도 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엘리엇이라고 불러 주세요.”

놀랍게도 번즈 백작을 엘리엇이라고 부를 생각을 하자 약간 망설여졌다. 내가 이름으로 부르는 남자는 올리버와 어닝뿐이거든.

나는 약간의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입을 열었다.

“그래요, 엘리엇. 방금 어닝의 무례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엘리엇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어닝의 이름을 듣자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역시 아까 어닝의 태도로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왜 문을 막고 서 있었던 거지? 꼭 내가 못 보게 막으려는 것 같았다. 아니면 못 들어가게 하거나.

“그런데…….”

아까 왜 그랬냐고 물어보려던 차였다. 내 눈앞에 어디서 본 듯한 남자가 휙 지나갔다.

“어?”

나는 몇 걸음 더 간 다음에야 그를 어디서 봤는지 떠올렸다. 잠깐, 그 사람이 맞기는 한가?

“왜 그러십니까?”

엘리엇이 물었다. 나는 그의 팔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돌렸다. 어디로 갔지? 남자의 모습은 중간 휴식 시간을 맞이하여 쏟아져 나온 사람들 틈으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 사람, 봤어요.”

“그 사람이요?”

어리둥절한 엘리엇에게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 입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가 허리를 숙여 주었다.

“에스턴 자작님을 해친 남자요. 아니, 그렇다는 의심을 받는 남자요.”

엘리엇은 그대로 고개를 휙 돌려 내가 쳐다본 쪽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겼습니까?”

“어, 키는 이 정도였고…….”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컸다. 보통 체격이었고. 갈색 머리에 나이는 삼십 대 정도. 나는 엘리엇에게 설명하다 말고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저기요. 저 남자예요.”

남자의 모습이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났다. 내가 엘리엇에게 남자를 알려 준 순간, 그와 나의 시선이 부딪쳤다.

“들어가죠.”

엘리엇은 누군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이 남자는 어떻게 나보다 더 잘 아는 걸까. 재빨리 좌석으로 돌아가자 어머니와 대화하는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겠죠. 실제로 기사단에 들어간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묶는다던걸요.”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다녀왔다는 내 말에 어머니는 찻잔을 들어 올린 채 말했다.

“늦었구나. 좋은 부분을 놓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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