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9 – 2
나도 그걸 어닝에게 지적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번즈 백작의 입에서 나온 걸 들으니 더 이상하게 들린다. 그의 말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는 건가?
“아, 아니, 친구와 선약을 해서…….”
허둥지둥하는 어닝의 태도는 아까보다 더 이상해 보였다. 번즈 백작은 고개를 기울이더니 빈정거리듯 말했다.
“약혼자 대신 선택한 친구라니, 대단히 가까운 사이인가 보군요?”
빈정거리는 거 맞지? 나는 번즈 백작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꼭 어닝이 바람을 피운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어닝이 다른 여자와 있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거든.
그의 인생에 가장 가까운 여자는 그의 어머니와 나 둘뿐이다. 그게 이 약혼이 성사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고.
“아니, 그게…….”
어닝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게 안됐으면서 동시에 한심했다. 나 같으면 지금이라도 약혼자와 같이 공연을 보겠다고 하겠다.
하지만 반드시 친구와 둘이서만 공연을 봐야 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나도 이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데.
“시간이 다 됐는데 어서 그 사랑하는 친구에게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번즈 백작의 빈정거림에 어닝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렇게 보면 어닝이 나와 번즈 백작의 교류를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와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 약혼자와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는 재빨리 번즈 백작에게 말했다.
“백작님, 어닝은 제 약혼자예요. 무례하게 굴지 마세요.”
두 사람의 행동이 멈췄다. 이런 상황은 불편하다. 둘 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고 그중 한 명은 결혼할 사이다. 나는 번즈 백작에게 다시 말했다.
“사과하세요.”
번즈 백작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어닝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매우 예의 바른 태도로 말했다.
“무례에 사과드립니다, 렌시드 경.”
예의 바른 번즈 백작의 태도에 어닝은 약간 넋을 잃은 모양이었지만 금세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그가 허둥지둥 찻집에서 떠나는 것을 보고 번즈 백작에게 비난을 던졌다.
“왜 그렇게 어닝을 싫어하는 거예요?”
“제가 말입니까?”
번즈 백작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 남자, 연기를 진짜 잘한다. 나는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번즈 백작을 잘 몰랐다면 그가 원래 그렇게 무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번즈 백작은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다. 가끔 좀 무섭긴 하지만.
나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어닝한테 못되게 굴었잖아요.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어닝이 당신 돈을 뺏기라도 했어요?”
그러진 않았을 거다. 일단 번즈 백작에게서 뭔가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거 같거든.
게다가 어닝이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빼앗았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나는 적어도 어닝이 선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번즈 백작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닝이 자기 돈을 뺏었다는 게 그에게도 어이가 없게 느껴지나? 그렇게 생각하는 데 번즈 백작이 시계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슬슬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맞다. 나는 그제야 잊고 있던 공연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닝이 찻값을 내지 않고 갔다는 것도.
“이건 제가 내죠.”
번즈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동전을 몇 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괜찮은데.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무례하게 행동했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찻값을 내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와 함께 찻집에서 나와 길을 건너 극장으로 향하며 물었다.
“뭐 마시려고 들어온 거 아니었어요?”
“네. 들어가기 전에 출출해서 간단하게 뭔가를 먹을까 했죠.”
그걸 나와 어닝과 만나는 바람에 놓쳤다는 거다. 저런. 나는 나보다 훨씬 큰 그의 체구를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크면 먹는 것도 많이 먹어야 하겠지.
“먹을 걸 좀 주문해야겠네요.”
나는 그의 팔 안쪽에 손을 얹은 채 걸으며 물었다. 이렇게 키가 큰데도 같이 걷는 게 힘들지 않다는 게 신기하다. 어닝이나 올리버와 걸을 때는 바쁘게 걸어야 했거든.
때때로 종종거려야 할 때도 있었고.
“중간 휴식 시간에 다녀와도 됩니다.”
번즈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좌석으로 안내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다들 자기 좌석으로 음식을 가져오는 걸 선호한다.
잠깐. 중간 휴식 시간이 있다는 걸 아네?
나는 놀라서 번즈 백작을 쳐다봤다. 공연 중에 중간 휴식 시간이 있다는 걸 나는 공연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이 사람도 공연을 본 적이 있나?
그러고 보니 전에 유명한 공연 몇 가지는 안다고 했다. 그게 줄거리를 안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봐서 안다는 거였나? 그렇게 물어보려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어떻게 같이 오는 거죠?”
어머니와 올리버는 이미 극장에 도착해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뿐 아니라 올리버 역시 내가 번즈 백작과 같이 오는 걸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어닝과 함께 있는데 번즈 백작을 만났다는 것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어닝이 널 두고 혼자 갔다고?”
올리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자기 약혼자를 다른 남자와 단둘이 두고 가 버린 거잖아? 심지어 자기가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한 사람인데.
하지만 그는 내 약혼자고 그가 나를 버리고 간 것과 상관없이 나는 의리를 지켜야 한다.
나는 어닝을 두둔하기 위해 말했다.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만나야 하잖아.”
“잠깐. 그럼 어닝은 친구들과 있는 거니?”
이크. 어머니의 지적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괜히 이야기를 했나? 여기서 친구들이 아니라 친구라고 하면 더 난리가 나겠지.
“그렇다더군요. 심지어…….”
그때 번즈 백작이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나는 깜짝 놀라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지만 어찌나 단단하던지 찌른 내 팔꿈치만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도 덕분에 번즈 백작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음을 기다리는 어머니와 올리버를 재촉했다.
“공연 시작하겠어요. 어서 들어가죠.”
이미 로비는 사람들이 다들 들어간 탓에 한산해져 있었다. 우리는 직원의 안내를 따라 번즈 백작의 좌석으로 향했다.
“흠.”
좌석을 확인한 올리버의 표정이 놀랍다는 듯 변했다. 그는 직원이 우리를 안내하고 떠나자 곧바로 번즈 백작에게 물었다.
“에두아르 백작님과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극장의 박스석은 보통 건축할 때 팔린다. 돈 많은 사람이 몇 개나 선점하기도 한다. 연간 이용비만 내면 계속 유지가 가능하기 때문에 번즈 백작 같은 신흥 귀족이 차지하기란 쉽지 않다.
당연히 우리는 번즈 백작이 친분 있는 귀족에게 잠시 빌린 거라고 생각했다. 많이들 그러거든. 친척, 친구를 초대하거나 한두 번 정도 빌려주기도 한다.
“없습니다.”
하지만 번즈 백작은 우리의 기대를 간단하게 무너트렸다. 그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더니 어머니께 제일 앞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필요 없으신 것 같기에 제게 넘겨 달라고 부탁드렸죠.”
필요 없는 것 같다고? 나와 올리버의 시선이 부딪쳤다. 물론 이런 극장의 박스석 같은 건 필요와 불필요 중에서 고르라고 하면 불필요에 가깝긴 하다.
솔직히 말하면 박스석은 과시용이거든. 공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비스컨 가도 박스석이 없다. 어머니는 공연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극장에 자주 가는 편이 아니고 아버지는 그쪽으로는 아예 관심이 없다. 게다가 비스컨 가는 가난하고.
그나마 극장에 갈 만큼 여유가 있어진 건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한 뒤라고 들었다. 그전에는 박스석을 소유하기는커녕, 일반석에서 공연을 볼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앉자.”
공연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번즈 백작이 앞자리를 내게 양보했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와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우리 뒤로 올리버와 번즈 백작이 앉았다.
“에두아르 백작의 최근 경제 사정이 안 좋아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쌍안경으로 무대를 살펴보는데 뒤에서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하마터면 고개가 돌아갈 뻔했지만 나는 시선을 무대에 고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습니까?”
번즈 백작은 몰랐다는 듯 반문했다. 지금 그의 표정을 알 것 같아서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뻔뻔하게도 눈을 깜빡이며 몰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겠지.
그의 푸른 눈동자가 그럴 때면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게 눈에 선했다.
“몰랐다고?”
올리버의 질문에 번즈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으으, 표정을 못 보니까 답답하다. 그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어 죽겠다.
다시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끼리니까 말해 보게. 에두아르 백작에게 얼마를 주고 샀나?”
“산 게 아닙니다.”
오라버니의 채근에도 번즈 백작은 꿋꿋했다. 진짜로 에두아르 백작님이 그냥 넘겼나?
박스석은 시장에 나오는 일이 없다. 에두아르 백작님처럼 경제 사정이 안 좋아져서 유지할 수 없게 되면 가까운 사람에게 넘기는 게 보통이다.
번즈 백작처럼 친분이 없는 사람에게 넘기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 이 박스석을 얻기 위해 번즈 백작이 상당한 돈을 지불했으리라는 예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물론, 대가를 받고 박스석을 팔았다는 게 알려지면 수치스러우니까 서로 그냥 넘겨줬다고 말을 맞추는 것도 보통이고.
“유제니, 사람 좀 불려 주련?”
어느새 공연은 중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탁에 고개를 들어 보니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후드를 눌러쓴 여자에게 뭔가를 듣고 있었다.
저주인가? 아니면 예언?
나는 뒤늦게라도 공연에 관심을 두려 애쓰며 물었다.
“뭐 주문할까요?”
직원을 불러 간단한 간식을 주문할 수 있다. 차나 볶은 땅콩 정도지만.
어머니는 차를 주문해 달라고 말했다. 나가서 직원을 부르는 김에 화장실도 다녀와야겠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번즈 백작이 나를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다녀오죠.”
“괜찮아요. 잠깐 바람도 쐬고 싶거든요.”
“혼자 다녀오시게 할 수 없죠.”
화장실 가는 데 이 남자를 달고 가고 싶진 않은데. 하지만 괜히 지체하다가 중간 휴식 시간이 되어 버리면 복도가 번잡해질 거다.
화장실 앞에서 줄을 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