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29/239)

33화. 9 – 1

로렌과 줄리아를 데리고 다시 수도로 돌아온 것은 저녁 식사가 한참 지난 다음이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크게 혼이 났다. 줄리아는 에스컬레 경에게. 로렌은 기숙사 사감 선생님에게.

“할 만큼 했잖아. 표정이 왜 그래?”

다음 날, 찻집에서 만난 어닝은 내 이야기를 듣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이해를 못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달라진 게 없잖아.”

로렌을 데려오긴 했지만, 그녀의 두려움을 없애 준 건 아니다.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후견인이 자신을 정부로 팔아넘길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고 나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단언할 수가 없다.

그게 내 기분을 안 좋게 했다. 내가 로렌을 위해 근본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속상했다.

“그건 그 애 인생이지. 뭘 거기까지 신경을 쓰고 그래?”

어닝의 말이 맞다. 그건 로렌의 인생이다. 내가 신경 써야 할 의무도 없고 그 어떤 책임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경 쓰였다.

“그냥. 걔는 열여덟 살이고 벌써 정부가 될까 봐 걱정한다는 게 좀 가슴 아프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공연 시간은 아직 좀 더 남았다. 어닝은 차를 홀짝 마시며 말했다.

“내 말은, 걔가 정부가 되고 말고는 걔 선택이라는 말이야. 누가 강요했어? 아니잖아. 설령 후견인이 강요했다고 해도 열여덟 살이면 뿌리칠 수도 있어야지.”

뭐라고? 나는 어닝의 말에 놀라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내 표정을 본 어닝이 다시 말했다.

“그렇잖아. 열여덟 살이라며. 정부가 무슨 일인지도 알고 후견인이 정부로 보내려는 것도 안다며. 그럼 자기가 알아서 빠져나와야지. 거기서 뭘 더 도와줘?”

나는 어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끔거렸다. 나는 로렌이 어떤 압박을 받는지 이해한다. 내가 약혼할 때도 그랬으니까.

부모님뿐 아니라 나를 아는 모든 주변 사람이 내가 어서 약혼하길 바랐고 내게 수없이 많은 남자를 들이밀었다.

그중에서는 나보다 나이가 열 살 이상 많은 남자도 있었고.

내가 내 또래의, 이야기가 통하는 남자와 약혼할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보통 귀족들은 집안의 수준이 맞느냐가 먼저거든.

자기보다 열 살 이상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여자들이 아직도 있다. 어닝은 옛날이야기라고 하겠지만.

“유제니.”

내 표정이 안 좋았는지 어닝은 재빨리 찻잔을 내려놓더니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에스컬레 양의 친구라 걱정하는 건 알아. 하지만 에스컬레 양은 에스컬레 경의 딸이잖아. 그런 여자애랑은 다른 인생을 살 거야. 걱정하지 마.”

대체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나는 어닝이 아주 멀게 느껴졌다.

로렌이 줄리아의 친구라 걱정하는 건 맞지만 줄리아도 그렇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나는 어닝의 손에서 내 손을 빼며 말했다.

“난 원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될까 봐 걱정하는 여자애를 걱정하는 거야. 나나 내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러자 어닝은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어닝은 내 손을 쳐다보더니 약간 딱딱하게 말했다.

“왜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어?”

“뭐?”

지금 이 상황에서 이기적이라는 말이 어떻게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당황하는 내게 어닝이 말했다.

“충고를 좀 받아들여. 번즈 백작도 말이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

아, 그거.

그건 할 말이 없다. 어제도 번즈 백작과 함께 로렌과 줄리아를 데리러 다녀왔으니까. 게다가 오늘 볼 공연도 번즈 백작이 초대한 거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노력하고 있어.”

오늘 공연도 안 오려고 했다. 하지만 번즈 백작은 우리 가족을 모두 초대했고 나만 빠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번즈 백작과 같이 공연을 보잖아.”

어닝의 지적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쳐다봤다. 내가 번즈 백작이 초대했을 때 홀랑 받아들였으면 할 말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너한테 물어봤잖아. 같이 공연 봐도 되냐고.”

오늘 공연은 어닝도 보러 간다. 나는 번즈 백작의 초대를 거절하기 위해 어닝에게 같이 보자고 연락했고 그는 거절했다.

친구와 같이 봐야 한다는 게 그의 이유였다.

내 지적에 이번에는 어닝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거절했어야지. 나랑 못 본다고 번즈 백작과 같이 보러 가는 게 번즈 백작을 멀리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너 지금 빈정거리는 거니?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어닝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어닝, 너는 지금 내가 굳이 가족을 모두 초대받은 걸 거절하고 이 시간에 혼자 집에 있길 바랐다는 거네?”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 난 그냥 번즈 백작의 초대를 거절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거야.”

가르쳐 준다고? 네가? 감히?

점점 더 내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까는 로렌 때문이었다면 지금은 어닝 때문에.

나는 몸을 뒤로 빼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댔다. 그리고 어닝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번즈 백작과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싫었다면 친구 대신 나와 공연을 봤으면 되는 거잖아?”

“어떻게 그래? 친구가 먼저 같이 보자고 했는데.”

“그럼 나까지 셋이 보면 되지.”

“그건…….”

어닝이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번즈 백작처럼 어닝도 박스석을 샀다고 들었다. 박스석에 나까지 들어간다고 그렇게 좁지는 않을 텐데.

대체 친구와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 욕이라도 하나? 아니면 다른 여자 이야기라도 하나?

나는 가슴 앞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번즈 백작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건 이해하겠어. 나도 네가 다른 여자와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게 싫으니까.”

뭐, 친한 친구와 단둘이 있는 거니까. 내 욕 정도는 하겠지. 내가 모르는 데서 하는 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다. 어닝도 내게 가끔 허드슨 경과 다툰 이야기를 하곤 한다.

제일 친한 친구와 싸운 이야기를 내게 한다면 나와 다툰 이야기를 허드슨 경에게도 하겠지. 그게 어쩌면 나와 허드슨 경의 사이가 어색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나도 네가 허드슨 경과 너무 시간을 보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오늘 일도 그래. 번즈 백작의 초대를 거절하려고 같이 공연을 보자고 한 거잖아.”

그런데도 어닝은 거절했다. 친구와 둘이 공연을 보기 위해서.

심지어 나는 번즈 백작과 단둘이 공연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니다. 그는 우리 가족을 모두 초대했고 어머니와 올리버는 흔쾌히 승낙했단 말이다.

결국, 어닝이 요구하는 건 그가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가족들도 밖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을 때 나 혼자 집에 있으라는 말밖에 안 된다.

“꼭 나나 번즈 백작과 공연을 봐야 해? 다른 친구랑 같이 가도 되잖아.”

드디어 붙었던 입이 떨어졌는지 어닝이 말했다. 뭐가 더 대단한지 모르겠네. 입이 붙어 있었던 것과 단단하게 붙은 입을 뗀 것 중에서.

나는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너도 꼭 허드슨 경과 봐야 해? 다른 친구랑 보면 되잖아?”

“마르셀과 번즈 백작은 다르지!”

다르겠지. 마르셀은 어닝의 가장 친한 친구고 번즈 백작은 최근에야 우리 가족과 가까워진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에 같은 게 없다. 나와 어닝의 입장이 다르듯이.

나는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기적인 건 너야, 어닝 렌시드. 네 이기적임에 맞춰 주기 위해 억지로 다른 친구를 구해서 공연을 보고 싶지도 않고.”

“그런 거 하나만 맞춰 주면 안 돼?”

“하나가 아니잖아.”

번즈 백작과 어울리지 말 것, 허드슨 경과 단둘이 노는 데 끼어들지 말 것. 다른 친구와 공연을 볼 것. 벌써 세 개나 된다.

그걸 퉁 쳐서 하나라고 하는 건 이기적이 아닌 건가? 나는 이기적인 주제에 내게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과 더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다.

슬슬 극장으로 가야 하기도 하고.

“유제니.”

내가 물러나려 하자 어닝이 재빨리 내 손목을 잡았다. 그는 나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약혼해 놓고 다른 남자랑 공연 보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뭐라고? 너 지금 날 협박하니? 난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나는 번즈 백작과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다. 아니, 아예 남들의 의심을 받을 만한 짓도 안 했다.

오늘 공연도 번즈 백작과 단둘이 보는 게 아니라 가족 모두와 보는 거다. 나는 그의 손에서 내 손목을 빼내려 하며 말했다.

“그럼 네가 친구와 단둘이 공연을 보고 내 가족들이 번즈 백작과 공연을 보는데 나만 떨어져 있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 것 같아?”

드디어 어닝이 움찔했다. 그때, 우리 사이에 검은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레이디 비스컨.”

귀에 익은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좀 더 들었다.

번즈 백작이 거기 있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했다.

“일찍 오셨군요.”

“아악!”

동시에 어닝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뭐야? 깜짝 놀라서 쳐다보자 어닝은 새빨개진 얼굴로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손목을.

그러고 보니 내 손목을 놓고 있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 데 그제야 어닝을 발견했는지 번즈 백작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렌시드 경도 있었군.”

뭐지? 어닝이 비명을 지른 게 번즈 백작 때문인 것 같은데 정작 그는 어닝이 왜 그러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재빨리 표정을 폈다.

“당신, 당신, 지금…….”

“레이디 비스컨과 같이 공연을 보나?”

어닝이 뭔가를 말하려는데 번즈 백작이 물었다. 응? 나는 그가 왜 그런 걸 묻는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번즈 백작의 질문에 어닝은 새빨간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다가 말했다.

“다, 당신이 초대했다며?”

“그럼 두 분이 여기서 우연히 만난 모양이군요?”

이번에는 나를 향한 질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어닝도 친구와 공연을 보기로 해서 들어가기 전에 잠깐 차를 마시고 있었어요.”

“그렇습니까?”

번즈 백작의 얼굴에 놀랍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곧장 어닝을 쳐다보며 물었다.

“공연을 약혼자가 아니라 친구와 단둘이 본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