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27/239)

31화. 8 – 3

덤덤한 엘리엇의 말에 유제니의 고개가 그를 향해 휙 돌아갔다. 생각도 못 했다. 그녀의 얼굴에 충격과 약간의 죄책감이 떠올랐다.

엘리엇은 유제니의 이런 점이 늘 새삼스러우면서 좋았다.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한다는 거. 그리고 그걸 고치려 한다는 점이.

곧이어 유제니는 아이들과 함께 마차에 오르는 부모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요.”

그녀는 좋은 지배자가 될 것이다. 엘리엇은 유제니가 비스컨 가의 둘째라는 것을, 비스컨 가에는 이미 올리버라는 후계자가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갈까요?”

할로웨이까지는 이틀이 걸리니 중간에 몇몇 마을에 정차한다. 생리 현상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밤에는 잠을 자야 하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좀 빨리 움직이면 마차가 처음 멈추는 마을에서 로렌과 줄리아를 붙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두 사람은 제일 처음 멈춘 마차에서 로렌과 줄리아를 봤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가씨들, 할로웨이로 간다고?”

할로웨이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로렌과 줄리아를 지켜보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돌아가라는 로렌과 할로웨이에 도착하는 걸 보고 가겠다는 줄리아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다.

다들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좁은 마차 안이라 이야기가 다 들린다.

“생각 중이에요.”

로렌은 재빨리 대답했다. 할로웨이로 갈 거지만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생각은 없다.

남자 역시 로렌의 생각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히쭉 웃으며 말했다.

“에이, 거기로 간다며. 거긴 왜 가?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별로 이야기할 생각이 안 든다. 로렌은 입을 다물었고 줄리아는 그녀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남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내가 잡아먹는대? 할로웨이 간다며? 내가 아는 사람이 거기서 힘이 좀 있거든. 어때? 괜찮은 일자리 소개해 줄 수 있는데.”

줄리아는 남자의 무례함에 당황했다. 기사단장인 아버지 덕분에 젊은 남자를 접할 기회가 많긴 했지만 다들 그래도 기사다.

이 정도로 무례한 사람은 줄리아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건 로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꿈에서 정부였다 해도 그녀가 상대한 건 귀족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상대하라는 남자들은 있었지만 다들 은유적이었다.

두 사람은 남자의 태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가장 좋은 건 무시하는 거지만 두 사람 다, 무시해도 되는지 몰랐다.

결국, 로렌이 나섰다.

“필요 없어요.”

“왜? 할로웨이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누군데? 내가 할로웨이를 잘 알거든.”

할로웨이를 잘 안다는 말에 로렌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정말 남자가 할로웨이를 잘 안다면 어설프게 거짓말을 했다간 들킬 수 있다.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자 남자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동료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런 곳에서 이런 괜찮은 물건을 발견할 줄이야.

둘 다 어리고 순진해 보인다. 특히나 망설이는 여자 쪽은 외모가 뛰어났다. 갖다 팔면 꽤 괜찮은 돈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거, 그만 물어봐. 대답하기 싫다잖아.”

미리 약속한 대로 남자의 동료는 로렌과 줄리아를 도와주려는 것처럼 끼어들었다. 두 사람은 로렌과 줄리아를 속이기 위해 약간의 연극을 이어 갔다.

“아, 내가 잡아먹는대? 아는 사람 없으면 도와주려고 했지.”

“싫다잖아. 그만 물어봐.”

동료의 말에 남자는 투덜거리며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줄리아와 로렌의 얼굴에 안도감이 찾아왔다.

“감사합니다.”

마차가 휴식을 위해 마을에 멈추자 마차에서 내린 줄리아와 로렌이 자신을 도와준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모르는 척 지나가는 동료를 향해 눈짓을 보낸 뒤 줄리아와 로렌을 향해 말했다.

“아가씨들, 조심해. 세상에 위험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안다. 로렌은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경험은 한정돼 있었고 또 다른 종류의 위험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로렌이 인사를 하자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역 앞에 있는 술집으로 이끌며 말했다.

“마차 탈 때 내 옆에 앉아. 아까 그놈이 접근 못 하게 막아 줄 테니까.”

좋은 사람이네. 줄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의 뒤를 따랐다.

“그 아가씨들 데리러 온 거요?”

엘리엇이 찾아낸 승합 마차의 마부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렇다. 유제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시선이 역 앞에 있는 작은 술집으로 향했다.

“그거 잘됐군요. 기다려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술집에 가 보라는 마부의 말에 유제니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 마을에 있구나. 수도 커런트에서 마차로 세 시간쯤 걸리는 거리에 떨어진 조금 큰 마을이었다. 도시까지는 아니고.

“고마워요.”

유제니는 인사를 하고 술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뒤에 남은 엘리엇이 마부에게 능숙하게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고맙네.”

마부의 손안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그는 엘리엇이 슬쩍 찔러 준 동전을 보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유제니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가 또 다른 정보를 줄 것을 안다는 듯 기다리고 서 있는 엘리엇에게 말했다.

“마차 안에서 좀 시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아가씨들, 좋은 옷 입고 있던데요.”

지금 가는 저 아가씨처럼 말이다. 유제니의 옷차림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부유한 귀족답게 좋은 천을 사용한 거였고 몇 개 안 되는 장식도 훌륭했다. 당연히 그녀가 대로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로렌과 줄리아의 옷차림은 유제니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부의 눈에는 충분히 괜찮아 보였다. 그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런 좋은 집 아가씨들이 단둘이 여행을 가면 어찌 되는지 모르십니까?”

안다. 엘리엇은 지나가는 마차를 피하고자 멈춰 선 유제니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좋은 집 아가씨를 혼자 술집에 보내면 안 되는 것도 알지.”

빨리 말하라는 말이다. 마부는 재빨리 말했다.

“술집에서 소란이 있었다더군요. 도망치긴 했다는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마부는 술집 이 층을 쳐다봤다. 역 앞에 있는 술집은 보통 이 층을 여관으로 영업한다. 그리고 엘리엇의 경험상 저 여관은 그리 수준이 높지 않을 것이다.

밖으로 도망치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로렌과 줄리아가 여관방에 숨었다면 문을 부수지 않는 한은 두 사람을 끌고 갈 수 없을 테니까.

“알았네.”

엘리엇은 정보에 대한 대가로 동전을 하나 더 마부에게 건네고 재빨리 유제니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로렌과 유제니는 마부의 말대로 여관 이 층에 있었다. 두 사람은 한 명이 눕기에도 좁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무서워서 못 나가겠다. 로렌은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세상에를 내뱉었다.

두 사람을 도와줄 것처럼 보였던 남자는 술집에 들어가더니 커다란 맥주를 한 잔 주문했다. 그리고 도와줬으니 로렌이 내야 한다고 말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마차에서 시비를 걸던 남자가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술에 취한 남자와 시비를 건 남자가 싸우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다른 남자들이 몰려왔다. 로렌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말했다.

“둘이 한패였던 것 같지?”

“응.”

줄리아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싸운 남자들은 자신들이 다쳤으니 줄리아와 로렌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장 뭔가에 서명을 하라며 떠들어 대는 남자도 있었다.

거기서 줄리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자식들, 다 한패 아냐?

“우리가 안 탔는데도 마차가 떠날까?”

줄리아의 질문에 로렌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떠날 거다. 마부가 손님 둘을 위해 언제까지나 기다려 줄 리가 없으니까.

만약 마부도 한패라면 또 다르지만.

밖에 아직 그 남자들이 있을까? 줄리아는 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다가가서 귀를 가져다 댔다. 두 사람을 쫓아오며 위협적으로 굴던 남자들은 어느새 조용해져 있었다.

하지만 줄리아는 문을 여는 도박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다시 조용히 침대로 돌아와 로렌의 옆에 앉았다.

“줄리아, 넌 그만 가도 돼.”

로렌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처음부터 그녀가 따라온다고 했을 때 말렸어야 했다. 하지만 줄리아는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마차에 올랐고 로렌이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마차가 움직인 뒤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너만 두고?”

줄리아는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위협적으로 굴던 남자들을 잠시라도 멈칫하게 만든 건 줄리아였다. 두 사람을 끌고 가려는 남자들에게 줄리아는 그녀의 아버지가 에스컬레 경이라고 외쳤고 두 사람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었다.

“나 때문이잖아.”

어쩌면 로렌은 정부가 될 운명인지도 모른다. 비참하고 처참한 기분에 로렌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

아무도, 무엇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걱정하지 마, 로렌.”

줄리아는 우울해하는 로렌을 위로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비밀로 했지만, 이제는 말해야겠다. 그녀는 로렌을 따라 마차를 타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이야기했다.

“유제니가 도와줄 거야.”

“유제니? 레이디 비스컨?”

갑자기 레이디 비스컨의 이름이 나오자 놀라는 로렌에게 줄리아는 오기 전에 유제니에게 연락을 했다는 것을 밝혔다. 유제니는 그녀를 도와줄 거다. 분명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다시 데려가려 하겠지.

하지만 로렌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유제니가 사람을 보낼 테니 조금만 버티라는 줄리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만약 그녀가 꿈에서처럼 정부가 될 운명이라면, 그녀는 줄리아에게 말을 해 줘야 한다. 줄리아가 피할 수 없다면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하니까.

“줄리아, 내가 꾼 꿈 중에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줄리아에게도 그녀가 얻은 기회를 나눠 줘야 한다. 로렌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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