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26/239)

30화. 8 – 2

줄리아는 활짝 열린 문과 너무 깨끗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옷장을 열어 그 안에 옷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줄리아는 흠칫 놀라 로렌의 옷을 살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드레스는 남아 있었다. 몇 달 전에 그녀의 친척이 새로 사 준 드레스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로렌이 평소에 입는 옷은 없었다. 그리고 속옷도.

“린다!”

줄리아는 로렌의 서랍을 확인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로렌과 같은 기숙사생을 발견하고 소리쳐 불렀다.

서랍에 있는 건 대부분 그대로 있었지만 딴 한 종류, 전혀 보이지 않는 게 있었다. 로렌의 액세서리들. 진짜 보석이라고 자랑했던 반지와 브로치가 보이지 않았다.

“비스컨 저택 알아?”

줄리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아버지가 아닌 유제니였다. 아버지인 에스컬레 경이 엮이면 일이 너무 커진다는 걸 그녀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았다.

“비스컨 저택에 가서 레이디 비스컨께 말 좀 전해 줘. 레이디 비스컨이야. 비스컨 부인이 아니라. 나중에 보답할게. 급해!”

줄리아보다 한 살 어린 린다는 급한 줄리아의 부탁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녀는 비스컨 저택이 어딘지 알았다. 비스컨 백작가는 유서 깊은 집안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비스컨 저택은 수도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였고 비스컨 백작 부인이 과거 공주님의 시종이었다는 것까지 더해져서 비스컨 백작가는 꽤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건 귀족이 아닌 린다가 알 정도는 아니고, 그녀가 탄 삯마차의 마부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가씨, 린다 메르벤라는 여자분이 찾아왔습니다.”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유제니는 집사의 말에 자신이 아는 사람 중 메르벤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있던가 하고 잠시 고민했다.

다행히 집사는 줄리아의 부탁으로 왔으며 꼭 직접 전해야 하는데 급하다고 했다는 것까지 전해 주었다.

“어디로 갔다고?”

곧바로 린다를 만난 유제니는 줄리아의 전언을 확인했다. 로렌이 가방을 챙겨서 기숙사에서 나갔다고 한다. 유제니는 줄리아가 로렌을 찾으러 갔다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할로웨이 쪽으로 가 보겠다고 했어요.”

전에 로렌이 줄리아에게 할로웨이 쪽으로 가 보려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제니는 느닷없는 지명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알겠다고 말했다.

이걸 어째야 할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에스컬레 경에게도 알리라는 말은 안 했다고 한다. 린다는 하인이 가져다준 찻잔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스컬레 경께도 알릴까요?”

알려야 할 것 같은데. 유제니는 그대로 서재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걸 어째야 하지? 할로웨이라면 여기서 마차로 이틀 정도 걸린다.

거기를 여자애 둘이서 어떻게 간다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유제니는 에스컬레 경에게도 가서 알리라고 말하려다 멈칫했다.

린다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있는 과자를 향해 있었다. 차와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하인이 두어 개 같이 가져왔다. 그녀는 린다가 자신의 몫까지 먹을 수 있도록 과자 접시를 린다 쪽으로 밀어 주며 말했다.

“과자 더 가져오라고 할게. 먹고 싶은 만큼 먹어. 나는 일이 있어서.”

에스컬레 경에게 알리려나 보다. 린다는 찻잔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갈게요.”

“괜찮아. 여기까지 전해 주러 왔잖아. 케이크 가져오라고 할게. 편하게 쉬다가 가.”

케이크까지 나오다니. 린다의 기분이 훨씬 더 좋아졌다. 그녀는 그 순간, 손님에게 과자와 케이크까지 내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레이디 비스컨?”

하인을 시켜 에스컬레 경에게 알리라고 지시한 유제니가 저택에서 나왔을 때 때마침 지나가던 번즈 백작이 그녀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마차에 오르던 유제니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갑자기 나타난 번즈 백작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번즈 백작님? 여긴 어쩐 일로…….”

번즈 백작은 왕궁에서 머물고 있다. 그녀의 머릿속에 번즈 백작이 집을 샀다던 말이 떠올랐다. 이 근처에 있는 집을 샀나?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데 엘리엇이 말했다.

“어제 비스컨 경이 편지를 보냈던데요. 식사에 초대한다고요.”

“아.”

그랬다. 유제니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요. 저를 도와주셨잖아요.”

“도움을 받은 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렇다 해도 보답은 해야 한다. 그리고 유제니는 지금 그런 거로 말씨름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그럼 백작님도 나중에 식사 대접 하세요.”

왜 저렇게 서두르는 걸까. 엘리엇은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제니가 탄 마차의 문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식사 대접 대신 공연 대접은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좋다. 유제니는 엘리엇에게 짜증을 낼 뻔했다. 그녀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했다.

“좋아요. 그런데 제가 지금 바빠서요.”

“아, 그렇군요.”

엘리엇은 뻔뻔하게도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대로 마차 문을 잡은 채 물었다.

“어디 가시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유제니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냥은 안 보내 줄 것 같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유제니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드래곤의 둥지에서 살아나온 사람이다.

이만큼 훌륭한 호위가 또 있을까.

자신의 생각이 마음에 든 유제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본 엘리엇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둘 중 한 명에게 마차가 있습니까?”

유제니의 마차에 올라 이야기를 들은 엘리엇이 제일 먼저 물은 건 그거였다. 여자애 둘이 할로웨이로 간다고? 마차로 이틀 거리를?

누군가가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엘리엇은 그걸 그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냐고 반문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유제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녀가 자신의 사촌 동생이 할로웨이로 갔다고 생각한다면 그도 그렇게 믿었다.

“아니요.”

로렌은 당연하고 줄리아 역시 개인 마차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하지 않다. 유제니의 말에 엘리엇은 재빨리 마부에게 승합 마차 역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에스컬레 양과 리즈 양이 승합 마차를 탈 줄 압니까?”

역으로 가는 길에 엘리엇은 유제니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물론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별것 아니라는,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은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줄리아는 그녀의 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친척이다. 어릴 때부터 봐 왔고 연상자로서, 그리고 친척으로서의 책임감이 있었다.

물론 로렌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다. 알아봐 주겠다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그녀를 할로웨이로 이끌고 있었다.

“모르겠네요. 둘 다 안 타 봤을 것 같은데요.”

일반적인 귀족은 개인 마차가 아니더라도 집안에서 이용하는 공용 마차가 있다. 초대를 받거나 가족 모두가 이동해야 할 때 사용한다.

물론 에스컬레 가에도 마차가 있었다. 하지만 줄리아가 마차를 타고 할로웨이로 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겁 좀 먹겠군요.”

엘리엇은 픽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승합 마차는 제일 큰 마차가 스물두 명까지 탈 수 있다. 말 그대로 다닥다닥 붙어 앉아야 한다.

부유하지 않다고 해도 귀족의 친척으로 살아온, 순진한 두 소녀가 사용하기엔 충격적인 공간일 것이다.

“그렇게 별로예요?”

유제니는 호기심에 물었다. 그녀는 승합 마차라는 게 있다는 건 안다. 물론 본 적도 있다.

하지만 타 본 적은 물론 어떻게 이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아는 거라곤 각각 마차비를 내고 타기 때문에 사람 수가 많을수록 마차비가 저렴해진다는 것뿐이다.

“불편하실 겁니다.”

엘리엇은 그렇게만 말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유제니가 평생 승합 마차가 얼마나 불편한지 몰랐으면 했다.

“그런데, 에스컬레 양은 리즈 양을 따라갔다고 하면, 리즈 양은 왜 할로웨이로 간 겁니까?”

“아, 그거요.”

유제니는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 모든 게 꿈 때문이라고 하면 번즈 백작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그녀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리즈 양이 꿈을 꿨대요.”

“꿈이요?”

엘리엇은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저먼이 떠올라 있었다.

“그게, 좀 이상한 꿈이었나 봐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자기 인생을 미리 살아 보는 꿈이었다고 할까요?”

솔직히 말하면 유제니는 아직도 로렌이 꿨다는 꿈이 정확히 어떤 꿈인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물론 비슷한 꿈은 그녀도 꾼 적이 있다.

다음 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잔 날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인지 그녀는 씻고 옷을 갈아입는 꿈을 꿨다.

그리고 마차에 오른 순간, 잠에서 깬 것이다.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른다. 꿈에서 그렇게 허둥지둥 씻고 옷을 갈아입었는데 그걸 또 해야 하다니.

로렌도 그런 비슷한 꿈인 걸까. 하지만 전 인생을 다 꿈꿀 수 있나? 여전히 유제니는 로렌이 꿨다는 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봤답니다. 젊은 여자 둘이 할로웨이로 향하는 마차에 타는 걸.”

역에 도착한 엘리엇은 직원에게 로렌과 줄리아의 행방을 알아 왔다. 그동안 역 안을 살피던 유제니는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승합 마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네요.”

그녀의 어머니와 올리버는 물론 방금 엘리엇도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엘리엇은 유제니를 따라 역 안을 둘러보았다.

그렇군. 그 역시 역에 와 본 건 굉장히 오랜만이다. 엘리엇은 즐거운 표정으로 가방을 들고 마차에 오르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여름 휴가를 갈 때니까요.”

“휴가를 승합 마차를 타고 가는군요.”

유제니의 시선에 아이들과 함께 마차에 오르는 부부가 들어왔다. 그녀도 어릴 때 부모님과 휴가를 떠난 적이 있다. 하지만 한 마차에 가족이 다 함께 타고 간 적은 없었다.

늘 어머니와 아버지가 한 마차를 이용하고 그녀는 올리버와 함께 유모의 보호 아래 다른 마차를 타고 갔다.

“휴가를 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꽤 사정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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