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8 – 1
“줄리아.”
줄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로렌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가 멈칫했다. 그녀가 무엇을 물어볼지 알았기 때문이다.
방학 기간이긴 하지만 아카데미에서는 몇 가지 수업을 제공한다. 정규 교육 과정에 들어 있는 건 아니지만 자식이 다양한 기술을 익히길 바라는 부모와 번외 수익을 원하는 교사의 이해가 맞았기 때문이다.
물론 신청한 사람만 받을 수 있고 다수의 사람이 함께하는 수업이다 보니 부유한 집에서는 별도의 과외 수업을 시킨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은 교육열은 있지만 크게 부유한 건 아닌 집안이 대부분이었다.
“레이디 비스컨이 연락했어?”
예상했던 대로 친구가 유제니에 관해 묻자 줄리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로렌과 함께 유제니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한 지 며칠이 지났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이걸로 로렌이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야반도주를 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철회할 줄 알았다. 하지만 로렌은 철회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오늘뿐 아니라 어제도, 그리고 그제도 로렌은 줄리아에게 유제니의 연락을 받았는지 물었다. 그때마다 로렌은 아직 확인하는 모양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로렌은 줄리아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녀가 뭐라고 말할지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줄리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아직 확인 중인가 봐. 오늘 가서 물어볼게.”
그럴 줄 알았다. 실망감이 로렌의 가슴에 차올랐지만, 그녀는 곧 털어 냈다. 처음부터 레이디 비스컨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레이디 비스컨을 알았다. 잘은 아니지만, 그녀의 꿈에 약간 나왔다.
그리고 줄리아는.
로렌이 지금까지 레이디 비스컨이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자던 줄리아의 말을 들었던 건 그녀를 향한 죄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렌은 그녀가 아는 것을 줄리아에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녀는 꿈을 꿨다.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사는지 봤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인생도 약간이지만 들었다. 정확히는 전해 들었다. 그녀는 기존에 알던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인생을 산 게 아니었으니까.
“줄리아.”
로렌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레이디 비스컨의 도움은 기대도 안 했다. 그녀가 꿈에서 본 자신의 인생을 바꾸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
하지만 그 전에, 그녀에게 온 기회를 줄리아에게도 나눠 주고 싶었다. 로렌이 자신의 꿈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준 건 줄리아뿐이었으니까.
“춤은 뭐 하러 배우나 몰라.”
그때, 두 사람의 뒤로 지나가던 저학년 아이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줄리아도 그랬다. 그녀도 방학 동안 승마나 댄스, 예법 수업을 배우는 걸 싫어했다. 노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게. 우리가 무도회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고학년이 되면 학년 말에 무도회에 갈 수 있잖아.”
“에이, 아카데미에서 하는 무도회에 이런 고전 춤이 무슨 소용이 있어?”
사교계에서 남녀가 추는 춤은 좀 더 고전적이긴 하다. 그에 비해 아카데미에서 학년말에 열어 주는 무도회는 훨씬 자유롭고.
아카데미에서 여는 무도회는 학생들이 졸업 후 사교계에 나갈 경우를 대비해서 경험을 시켜 주는 거다. 하지만 줄리아와 로렌에게는 그다지 쓸모가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의 무도회와 사교계의 무도회는 달랐다. 아카데미에서야 외모가 빼어나거나 특정 분야에 재능을 나타낸 사람이 인기를 얻지만, 사교계는 작위와 돈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줄리아와 로렌이었다. 아카데미 무도회에서는 로렌이 더 인기가 있었지만, 사교계의 무도회에서는 줄리아가 더 인기 있었다. 몰락 귀족인 로렌과 달리 줄리아는 기사단장인 아버지를 두고 있으니까.
“우리 아빠는 내가 귀족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
말도 안 된다는 소녀의 코웃음에 로렌과 줄리아는 서로를 쳐다봤다. 둘 다 어느샌가 입을 다문 채 후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레이디 비스컨이 봤다면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건 무례한 짓이라고 한마디 했을 테지만 두 사람은 하급생들의 이야기가 퍽 재미있게 느껴졌다.
“귀족 정부가 되는 것도 힘들 텐데.”
한 명이 가볍게 던진 이야기에 로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곧이어 다른 학생이 받아쳤다.
“차라리 정부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적어도 돈 걱정은 안 한다며.”
“맞아. 귀찮은 의무도 없고.”
농담 반 진담 반인 이야기를 나누며 학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줄리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저 중에서 진심으로 정부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기나 할까.
유독 철없는 아이 한 명 정도나 그렇게 생각할 거다.
“정부가 되면 지금 배우는 춤이 쓸모가 있긴 하겠네.”
다른 학생의 비아냥에 웃음이 더욱 커졌다. 그때, 딱딱한 표정으로 말없이 듣고 있던 로렌이 불쑥 끼어들었다.
“정부가 되면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을 거 같니?”
갑자기 끼어든 상급생의 말에 학생들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로렌은 후배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꿈 깨. 어느 정신 나간 인간이 정부를 초대해? 네 주인님이 그런 데 너희를 데려갈 인간이면 정부로 삼는 게 아니라 결혼을 했겠지.”
“로렌.”
깜짝 놀란 줄리아가 로렌을 막으려 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끔찍한 꿈이 현실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부가 뭔지 알아? 네가 인간 이하라는 뜻이야. 아무도 널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 안 해. 넌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 중 그 어떤 것도 가질 수가 없어.”
이 사람 왜 이래? 하급생들은 갑자기 쏘아 대는 로렌의 말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농담처럼 정부가 되면 돈 걱정은 안 한다고 말한 학생이 나섰다.
“인간으로 굶는 것보다 인간 이하로 커다란 집에서 좋은 옷, 좋은 음식 먹고 사는 게 나을 수도 있죠?”
로렌은 후배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울고 싶어졌다.
로맨틱한 이야기에, 드라마에서 포장된 정부라는 것에 이 아이들이 어떤 환상을 가졌는지 생각하자 슬퍼졌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런 꿈을 꾼 자신도.
동시에 무서웠다. 그녀가 꾼 꿈대로 살게 될까 봐.
“커다란 집에서 좋은 옷, 좋은 음식 먹는 건 하인도 마찬가지야. 그 사람들은 적어도 원하는 친구를 사귀고 대낮에 보고 싶은 공연을 보러 갈 수라도 있지.”
그래도. 로렌의 지적에 하급생들의 얼굴에 반발이 떠올랐다. 하인이 되는 것보다 정부가 낫지 않나? 몇 명 정도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보였다.
로렌은 소리 지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쓰며 말했다.
“큰 집, 좋은 옷이 있어도 아무에게도 자랑 못 해. 그걸 받는 대신 무슨 짓을 해야 하는지 아니? 너희, 매튜 선생님 같은 남자랑 키스할 수 있어?”
아카데미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교사의 이름이 로렌의 입에서 나왔다. 다들 “윽” 하고 싫다는 표정을 지었고 로렌은 단호하게 말했다.
“고작 키스한 거로 옷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아? 모든 사람이 알게 되는 거야. 그런 늙고 못생긴 남자와 키스하고 옷 받은 애라고. 그래도 정부가 좋아?”
“꼭 늙고 못생긴 남자일 건 없잖아요. 젊고 잘생긴 남자의 정부가 될 수도 있잖아요.”
뒤에 서 있던 후배의 말에 이번에는 로렌뿐 아니라 줄리아도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의 웃음에 서 있던 하급생들의 얼굴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본 줄리아가 눈물을 닦으며 사과했다.
“아, 미안. 그런데 젊고 잘생기고 정부를 둘 수 있을 정도로 돈도 많은 남자가 왜 정부를 둘 것 같니?”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고 사랑은 나랑 할 수도 있죠.”
전혀 현실감 느껴지지 않는 대답에 줄리아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하급생 중에서도 창피하다는 표정을 짓는 아이가 생겼다.
로렌은 경멸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대단한 사랑이네. 자기는 피해 하나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손가락질받는 짓을 시키다니.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자기 집 개가 욕을 먹어도 화날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화가 났다. 그러게.
이야기할수록 로렌의 기억이 또렷해졌다. 꿈을 꾼 직후 점점 흐려졌던 꿈의 내용이 지금은 그녀가 개를 키웠다는 것까지 생각이 났다.
외로워서 키운 개였는데 결국 그녀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버렸다. 동시에 그녀의 주인은 허니를 이용해서 협박하곤 했다.
허니. 허니였다. 로렌이 키운 개 이름이.
작은 개였다. 큰 개는 드레이크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작은 개는 키워도 된다고 한 건 큰 개보다 작은 개가 걷어차기 쉽게 때문이었을 거다.
빌어먹을 자식. 로렌의 머릿속에 피가 솟구쳤다. 늘 말버릇처럼 말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허니를 그의 아이들에게 가져다줄 거라고.
그녀가 선택하지 않은 인생이었는데 무엇 하나 그녀의 의지대로 흘러간 게 없는 인생이었다.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로렌은 그대로 몸을 휙 돌려 건물에서 나가 버렸다.
“뭐야, 저 사람 왜 저래?”
로렌을 따라가려던 줄리아는 남은 학생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들에게 돌아가 진지하게 말했다.
“너네가 걱정돼서 저러는 거야. 정부라는 건 너네 환상보다 훨씬 더 끔찍하거든.”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아직 이 아카데미에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있네. 줄리아는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에스컬레 경이거든. 맹세하건대, 난 단 한 번도 정부를 본 적이 없어. 이게 무슨 의민지 아니?”
모른다. 학생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자 줄리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그랬다. 하급생일 때는 그런 멍청한 것들이 멋있어 보이는 법이다.
해적, 정부, 도둑 같은 사람들.
“아무도 지켜 주지 않는다는 뜻이야. 자기 자신조차도.”
정부로 무탈한 말년을 보내려면 보통 머리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로 영리한 사람이라면 다른 쪽으로 갔다면 더 나은 인생을 살았겠지.
진짜로 로렌을 따라가야 한다. 줄리아는 선생님께 그녀와 로렌의 몸이 좋지 않아서 결석한다고 전해 달라 부탁한 뒤 로렌의 방으로 향했다.
“로렌, 괜찮아?”
로렌의 방은 기숙사 중에서도 작은 방이다. 상급생이 되면 기숙사에서 살 필요가 없지만 그건 수도 커런트에 집이 있는 학생이나 가능한 일이다.
줄리아는 활짝 열린 로렌의 방문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며 물었다. 로렌의 방은 깔끔했다. 너무 깔끔했다.
“로렌?”
당연한 일이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