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7 – 3
어쩌면 어닝이 질투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건 좋은 일이다. 부부가 서로에게 연애 감정을 갖는 게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귀족들이 많다는 걸 알지만, 나는 그래도 부부가 이성적으로 감정을 가지는 게 좋을 것 같거든.
“오늘 어닝이 왔지?”
그날 저녁,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온 올리버 덕분에 세 가족이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항상 저녁은 다른 집에 초대를 받아 나가거나 올리버가 클럽에서 먹고 오는 바람에 가족이 셋이 모여서 저녁을 먹는 건 오랜만이었다.
“오라버니가 말했어?”
나는 빵을 먹다 말고 물었다. 어닝이 왔냐고 으스대면서 묻는 걸 보니 내게 있었던 일을 어닝에게 말한 게 올리버였던 모양이다.
늘 그렇듯이 올리버는 잘난 척하며 말했다.
“네 약혼자잖아. 그도 알고 있어야지.”
그래도 어닝은 클럽에서 들었다고 말했다. 그랜더 경에게 들었다고 했지. 올리버가 쪼르르 가서 말했다고 하지 않고. 오라버니보다 나은 약혼자를 가졌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나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내가 말하게 뒀어야지.”
“언제 말하려고?
언제 말하냐고? 나는 고기를 자르며 말했다.
“어닝을 만나면 말하려고 했어.”
“하.”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올리버가 코웃음을 쳤다. 무례한 행동에 조용히 식사를 하던 어머니가 올리버에게 주의를 줬다.
“올리버.”
“죄송합니다.”
올리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그리고 다시 내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요즘 계속 어닝이랑 같이 있었는데도 안 했잖아. 대체 언제 말할 생각이었는데?”
요즘 계속 어닝과 있었다고? 나는 올리버의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마로트 공작의 연회에 참석했던 건 이틀 전이다. 저녁 식사였고.
그 뒤로 어닝을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다. 나는 올리버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라서 물었다.
“요즘 계속 어닝과 있었다니?”
“너 요새 어닝과 함께 있지 않았어?”
아닌데.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 올리버에게 물었다.
“어닝이 나와 함께 있었대?”
올리버의 얼굴이 확 굳었다. 뭐야?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고개를 돌려 보니 어머니 역시 무슨 일인가 하고 올리버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러고 보니 너랑 있다고는 안 했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올리버?”
어머니는 역시 오라버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올리버는 나와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요새 렌시드가 클럽에 자주 안 오거든. 난 너랑 어울리느라 그러는 줄 알았지.”
아, 뭐야.
긴장한 것보다 올리버의 이야기는 별것 아니었다. 발시안의 모든 남자가 올리버 같은 줄 아나.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고 어머니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올리버, 모든 남자가 다 클럽에 죽치고 있지는 않는단다.”
“아, 알죠. 그리고 전 죽치고 있는 게 아니라…….”
“조정 연습이라고?”
나는 빈정대듯 물었다. 곧바로 어머니의 지적이 날아왔다.
“유제니.”
식탁 앞에서 남매끼리 서로에게 무례하게 굴면 안 된다. 오라버니가 먼저 무례하게 굴었다 하더라도.
나는 곧바로 사과했고 어머니는 만족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올리버는 내게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클럽에서 안 보이길래 너랑 있는지 알았지.”
“친구랑 있었나 보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어닝이 친구와 함께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렇겠다.”
올리버 역시 곧바로 인정하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하인에게 차를 더 따라 달라고 신호를 보낸 뒤 올리버에게 말했다.
“매셔 거리에 어닝을 봤거든.”
“매셔 거리?”
앨버트 경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번즈 백작은 그게 어닝이 아닐 거라고 했지만 나는 똑똑히 봤다. 어닝이었다.
“매셔 거리에서 린델 거리로 가는 길에 말이야. 공원 옆에.”
어리둥절해하던 올리버의 얼굴이 확 굳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딱딱하게 빵을 뜯으며 말했다.
“잘못 봤겠지.”
번즈 백작과 같은 소리를 하네. 나는 차를 따라 준 하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올리버에게 말했다.
“아냐. 어닝이 확실해. 같이 간 사람은 얼굴은 못 봤지만 마르셀이었던 거 같고.”
마르셀 허드슨 경은 몇 번 어울린 적이 있다. 좀 기분 나쁜 사람이라 별로 어울리고 싶진 않지만 어닝의 가장 친한 친구라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어닝에게 마르셀과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할 걸 그랬나. 나는 그가 내게 번즈 백작과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요구했던 것을 떠올렸다.
“잘못 본 거야.”
올리버는 식사를 하다 말고 내게 거칠게 말했다. 아니, 내가 똑똑히 봤다는데도 이러네?
나는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봤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었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올리버, 조만간 번즈 백작을 초대하렴.”
“번즈 백작을요?”
“그가 우리 유제니를 도와줬다잖니. 식사 대접을 해야지.”
엇. 그러네. 어수선한 일이 터져서 그가 나를 도와줬다는 건 생각도 못 했다. 거마로트 공작의 연회에서 번즈 백작은 나를 공격하는 공작과 자작에게서 나를 대신해서 싸워 줬다.
나도 그를 위해 싸워 주긴 했지만.
올리버는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일 클럽에 가면 물어보겠노라 말했다.
“번즈 백작이 클럽에 와?”
그건 좀 놀라운데. 클럽에서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는 번즈 백작이라니 상상이 안 된다. 하지만 그럴 수 있지. 올리버도 생긴 건 멀쩡하지만 클럽에 가서 수다를 떠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그리고 커런트의 속삭임도 매번 빠지지 않고 읽고.
“어, 그냥 편지 써야겠다.”
내 질문에 올리버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더니 그가 말했다. 뭐라고? 내가 인상을 쓰자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가끔 오거든. 언제 올지 몰라서 그냥 편지 쓰는 게 낫겠어.”
“아직 왕궁에 사는 거지?”
그가 집을 구했다는 말은 못 들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번즈 백작의 입에서 못 들었다는 말이다.
나는 소문에 늦고 신문에 났을 정도면 커런트의 인구 절반 정도가 알고 있을 때다.
“음. 조만간 이사 간다는 거 같던데.”
“집을 구했다던데 어디로 구했는지 아니?”
이번에는 어머니도 끼어들었다. 나는 차를 홀짝이며 어머니와 오라버니의 대화를 지켜봤다. 집을 구했구나. 생각해 보면 그는 작위가 있고 영지가 있으니 왕궁에서 사는 게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에서 살면 왕족과 만날 일이 늘어나고 정보를 얻기도 좋으니 영지가 없는 귀족들은 왕궁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왕족을 모시는 일이다.
어려운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곁에서 말벗이 되어 주는 정도거든. 예전 일이지만 반역에 휘말린 집안이 있었는데 원래대로라면 집안사람 모두 사형이지만 몇 명만 귀양을 가고 끝난 적이 있었다.
그 집안의 부인이 왕비의 말벗이었기 때문이다. 왕비님께 바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으니까 영향력이 엄청난 거지.
“팔렸다는 집은 몇 채 있는데 그중에 어떤 게 번즈 백작이 산 집인지 모르겠네요.”
올리버와 어머니는 여전히 번즈 백작이 어떤 집을 샀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집이 시장에 나왔나? 나는 식사를 마쳤지만, 자리를 지키느라 차를 한 잔 더 요구하며 생각했다.
린가르드 저택도 비어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엘버트 경도 집을 내놨다는 거 같지? 레이디 데번. 그녀가 파혼했으니 그녀가 결혼 후 가정을 꾸리려 했던 저택도 시장에 나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레이디 데번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머릿속에 로렌이 떠올랐다. 로렌 리즈. 줄리아의 친구.
세상에. 까맣게 잊고 있었네. 나는 어머니와 올리버의 대화가 멈추길 기다렸다가 물었다.
“올리버, 세케이 경을 알아?”
“세케이 경?”
내 질문에 오라버니는 물론 어머니도 멈칫하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은 그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나는 차를 따라 준 하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말했다.
“누가 물어봐서. 어떤 사람이야?”
“누가 물어봤는데?”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다니. 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머니 역시 올리버와 같은 표정인 것을 보고 말했다.
“줄리아의 친구가.”
“줄리아의 친구? 아카데미 학생 말하는 거야?”
“줄리아가 물어본 게 아니고 줄리아의 친구가 물어본 거지?”
어머니와 올리버는 저마다 내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 거지? 나는 질문한 사람이 줄리아가 아닌 게 확실한지 확인하는 어머니와 질문한 사람의 나이를 확인하는 올리버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보니 좀 알 것 같다. 나는 찻잔을 손으로 감싸며 물었다.
“별로 안 좋은 사람인가 보네.”
올리버와 어머니의 시선이 부딪쳤다. 곧이어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줄리아가 아닌 거지?”
“네.”
그럼 됐다. 어머니는 그런 반응이었다. 하지만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얽히지 말라고 하렴.”
“어떤 사람인데요?”
어머니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취했다. 대체 무슨 문제길래 이러시는 걸까. 어머니가 입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부류는 꽤 많다.
처음 번즈 백작이 번즈 경일 때도 같은 반응이었다. 그 태도는 번즈 백작이 우리 집에 와서 올리버에게 도움을 청한 뒤로 훨씬 누그러졌고.
“뭐, 나쁜 사람은 아닌데.”
어머니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올리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쁜 사람이 아닌데 어머니가 저러시냐고 묻고 싶지만, 우리에게는 번즈 백작이라는 선례가 있다.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게.”
내 재촉에 올리버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자를 너무 좋아해.”
“그건 나쁜 게 아니잖아?”
내 반문에 올리버는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를 좋아하는 게 뭐가 나쁘담? 남자를 좋아해도 마찬가지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네.
나는 계속 말하라는 표정을 지었고 올리버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