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3/239)

27화. 7 – 2

“편지는 왜요?”

마음이 조금 가라앉자 나는 번즈 백작에게 물었다. 조금 진정이 된 덕분에 번즈 백작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러게. 조금 전 일은 어닝이 잘못했다. 내 의지를 무시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걱정한 건 그의 안위가 아니라 내 안위였을 거라 믿는다.

공작이 우리 집에 화를 내면 내 안위가 문제지 어닝의 안위가 문제는 아닐 거 아닌가. 설마, 우리가 결혼한 다음 공작의 분노가 렌시드 자작가로 향할까 봐 걱정한 건 아니겠지.

“저도 같이 하고 싶어서요. 같이 보내는 게 좀 더 확실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번즈 백작은 어닝에게 차갑게 굴었던 게 거짓말인 듯 부드럽게 말했다. 꼭 다른 사람 같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같이 한다면 더 힘이 실리겠지.

“그리고 알아보니 레이디 비스컨께서 에스턴 자작의 무도회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고 하던데요.”

응?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번즈 백작의 말에 행동을 멈췄다. 이상한 사람? 에스턴 자작 부인에게 말하긴 했다. 하지만 그걸 그가 어떻게 알지?

나는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지었고 번즈 백작은 겸손한 표정으로 말했다.

“범인을 잡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수사관에서 물어봤습니다.”

내가 에스턴 자작 부인에게 말했으니 자작 부인은 제이크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이상한 남자가 있었다고 말했을 거다. 그게 번즈 백작에게까지 갔다는 말이다.

“어, 맞아요. 만났어요.”

“제게 말씀하셨어야죠.”

번즈 백작은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무례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번즈 백작이 멈칫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어닝에게와 달리 그에게는 미안하지 않았다. 어닝은 몇 년 동안이나 우리 가족의 친구였고 내 약혼자다.

하지만 번즈 백작은 만난 지 몇 주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백작님은 제게 범인을 찾고 있다고 말한 적도 없고 이상한 사람을 만났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제가 왜 우리 집안 친구의 집 안에서 수상한 사람이 활보하는 걸 봤다고 말해야 하죠?”

번즈 백작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알고 싶으니까요. 레이디 비스컨, 당신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뿐 아니라 나쁜 일과 별것 아닌 일들도요.”

그의 파란색 눈동자가 빛을 뿜는 것처럼 느껴졌다. 뭘까. 나는 이 남자가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다가 지금 상황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옳지 않다. 나는 어닝과 약혼했고 어닝이 아닌 다른 남자의 이런 관심은 원하지 않는다.

“번즈 백작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다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 남자가 날 좋아하나? 머릿속에 제일 먼저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에게는 중요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이어서 떠올랐다.

여자라고 했다. 번즈 백작이 마음에 둔 사람.

누굴까. 나는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번즈 백작을 쳐다보며 그가 소중하게 여긴다는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남자를 혼자 두는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번즈 백작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 진짜로 소중한가 보다.

그의 표정을 보자 그가 그 사람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 것 같았다. 번즈 백작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나왔다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말을 이었다.

“그런 다정한 말은 그 소중하다는 분께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음 순간, 번즈 백작의 얼굴이 무너졌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사실 나도 내가 본 게 맞는지 모르겠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으니까.

번즈 백작은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더니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겠군. 나는 약간의 부끄러움과 질투심을 느끼며 생각했다. 내게 이럴 정도면 그 여자에게는 더하겠지.

문득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궁금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분인지 궁금하네요. 제가 아는 분인가요?”

“글쎄요.”

번즈 백작은 나를 따라 일어났다. 덕분에 나는 그동안 내가 일어나 있었고 그가 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목이 편하더라.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하긴, 내가 아는 사람인지 그가 알 리가 없다. 어떤 사람일까.

나는 알고 있는 사람 중 번즈 백작이 이렇게 마음에 둘 만한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했다. 어쩌면 린델 양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정말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거든.

아니면 로슈인 영애일지도 모르겠다. 로슈인 영애도 좋은 사람이다. 편지를 참 잘 쓴다.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번즈 백작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젠가는요.”

그가 손을 잡는 바람에 생각났다. 반지.

전에 내가 돌려준다고 했는데 그가 거절했다. 나는 손등에 입을 맞추려는 번즈 백작을 말리며 말했다.

“반지 가져올게요.”

“반지요?”

“백작님이 주신 거 말이에요.”

그것도 꽤 오래됐다. 전에도 돌려주려고 했는데 못 돌려줬다. 왜 그랬지?

금세 왜 반지를 돌려주지 못했는지 떠올렸다. 그때도 번즈 백작이 이상하게 굴었다. 그래서 말을 돌려 버렸지.

나는 내가 나빴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그래도 돌려줬어야 했다. 말을 돌리는 게 아니라.

“아닙니다.”

반지를 가지러 가기 위해 응접실에서 나가려는데 이번에는 번즈 백작이 나를 말렸다. 아니라고? 내가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레이디 비스컨, 당신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고 번즈 백작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이 남자, 장갑도 안 끼고 있네. 그가 장갑을 끼고 있지 않은 탓에 우리는 맨손이 닿아 있었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갈 때는 장갑을 껴야 한다는 걸 알려 줘야 할지, 반지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야 할지 망설였다.

“인장 반지를 타인에게 주면 안 돼요.”

우선 가장 중요한 걸 알려 주자. 나는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빼려 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건 당신의 권리를 사용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번즈 백작님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요.”

“압니다.”

“아는데 왜…….”

나한테 보낸 건지 모르겠네.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번즈 백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한숨 쉴 건 나거든?

“언젠가.”

응?

한숨을 내쉰 번즈 백작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려는 시도를 멈췄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과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가 레이디 비스컨. 당신 곁에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가 올 수 있습니다.”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내 곁에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가 온다는 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나는 인상을 쓴 채 그를 쳐다봤다.

“그때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반지를요.”

이상한 소리를 하네. 내가 번즈 백작을 잘 몰랐다면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재빨리 내보냈겠지.

하지만 내가 아는 번즈 백작은 이상한 사람이, 아, 아니네. 이상한 사람 맞네.

나는 그가 했던 이상한 행동을 떠올렸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장갑, 끼고 다녀야 해요.”

결국, 내 입에서 나온 건 두 번째로 중요한 이야기였다. 집 밖에 나올 땐 장갑을 껴야 한다. 내 지적에 번즈 백작은 무슨 소리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고 나는 그가 잡은 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집 밖으로 나갈 때는 장갑을 끼고 있어야 해요.”

“아.”

그제야 번즈 백작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더워서요.”

여름 날씨는 덥고 습도가 높으니 장갑을 끼고 다니기 좀 불편하긴 하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장갑을 끼는 번즈 백작에게 물었다.

“그럼 반지는…….”

“당신 겁니다.”

진짜로 돌려받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인상을 쓴 채 번즈 백작이 장갑을 끼는 것을 지켜봤다.

왜 자기 인장 반지를 극구 남에게 주려고 하는 거지? 혹시 그의 인장 반지를 노리는 사람이라도 있나?

그럴듯한 상상이 머릿속에 흘러갔다. 나는 번즈 백작이 긴 그의 손가락에 장갑을 끼우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며 번즈 백작의 인장 반지를 빼앗을 악의 무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유제니.”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어닝이 돌아왔다. 이제는 좀 진정이 됐는지 그의 표정은 약간 붉었지만 침착해 보였다.

“어닝, 괜찮아?”

나는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마음이 좀 진정됐기를 빈다. 어닝은 번즈 백작을 쳐다보더니 곧바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사과할게.”

다행이다. 나는 그의 사과를 받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는 어닝이다. 참을성 있고 신사적인. 약간 호들갑을 떠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나는 그런 모든 점을 포함해서 어닝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가 너무…….”

“저는 이만 가죠.”

어닝의 말을 자르며 번즈 백작이 말했다. 나는 집사를 불러 그를 배웅해 달라고 부탁했고 번즈 백작은 내 손에 입을 맞춘 뒤 떠났다.

“저자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번즈 백작이 떠나고 둘이 남자 어닝이 말했다. 그는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다. 내 약혼자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솔직히 최근에 나는 번즈 백작과 좀 가깝게 지내긴 했다. 이게 다 올리버 때문이지만 어닝이 불편해하는 것도 인정한다. 나도 만약 어닝이 다른 여자와 너무 가깝게 지낸다면 불편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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