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7 – 1
“공작님과 문제가 있었다면서?”
이틀 뒤, 점심 식사 뒤에 방문한 어닝이 내 뺨에 입을 맞추자마자 물었다. 나는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지었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클럽에서.”
분명 올리버가 가는 클럽이겠지. 그 클럽 이름을 ‘높은 모자 클럽’이 아니라 ‘수다 클럽’이라고 바꿔야 한다니까.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올리버가 벌써 이야기했나 봐?”
“아니야.”
어닝은 재빨리 올리버의 편을 들어 주었다. 가끔 보면 이 남자가 내 약혼자인지 올리버의 약혼자인지 모르겠다. 물론 올리버는 펄쩍 뛰겠지만.
그는 나를 달래려는 것처럼 내 손을 잡고 부드럽게 다독이며 말했다.
“그랜더 경이 그러더군.”
아, 그랜더 백작. 머릿속에 그랜더 경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어제저녁 연회에 참가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랜더 백작. 나와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랜더 백작 부인으로부터 편지도 왔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어제저녁 일이 소문이 나고 있긴 한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만 두 통 왔다. 점심 먹고 나서 한 통 왔고.
두 통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였다. 거마로트 공작이나 패터슨 자작이 보낸 건 아니다. 그랜더 백작 부인처럼 동석해 있던 귀족들이 보고만 있어서 미안하다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물론 미안함보다는 거마로트 공작과 패터슨 자작이 그렇게 무례할 줄 몰랐다는 놀라움 섞인 수다가 더 많았지만.
한 통은 괜찮냐는 편지였고. 어제 그 자리에 없었지만 전해 듣고 나와 함께 화내 주는 편지였다. 덕분에 지금은 화가 많이 사그라들었다.
“음. 어머니께서 지금 편지를 쓰고 계셔.”
“무슨 편지?”
무슨 편지긴? 나는 하인이 가져다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왕비 전하께 어제의 일을 알려야지.”
거마로트 공작이나 패터슨 자작은 먼저 사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있다면 어제 그딴 식으로 행동하지도 않았겠지.
어머니는 공작이 나를 에스턴 자작을 해치려 한 범인이라고 몰아갔다는 사실에 매우 화가 나셨다. 편지를 쓰기 위해 마음을 좀 다스려야겠다고 하실 정도로.
“왕비 전하께 공작을 이르겠다고? 유제니, 그건 좀 과한 게 아닐까?”
뭐라고? 나는 어닝의 말에 그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쳐다봤다. 어닝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다 공작님이 비스컨 가에 유감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유감?”
“거마로트 공작님은 국왕 전하의 삼촌이잖아. 그런 분께 잘못 보여서 좋을 게 없어서 하는 말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마로트 공작이 국왕의 삼촌이라 다들 그의 앞에서는 조심하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른 귀족보다 낫거나 다른 귀족들에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그게 허가된다면 귀족들은 국왕 전하가 아니라 거마로트 공작에게 충성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걸 국왕이 달가워할 리가 없다. 공작은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어닝의 걱정을 위로하기 위해 말했다.
“먼저 무례하게 나온 건 저쪽이야. 공작이 국왕 전하의 삼촌이라고 해서 무례해도 된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어?”
아무리 공작이라 해도 소문만 듣고 손님을 사람을 해친 범인 취급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기적으로 굴지 마, 유제니.”
“뭐? 뭐가 이기적이라는 건데?”
나는 어닝이 왜 화를 내는지 몰라 물었다. 그때, 밖에서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살짝 열려 있었으니 나와 어닝이 다투는 걸 들었을 것이다. 우리의 다툼을 말리기 위해 끼어든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창피해라. 나는 입을 다물고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요?”
오늘은 오기로 한 사람이 없다. 줄리아가 왔나?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집사가 들어와서 말했다.
“번즈 백작님입니다.”
평소였다면 돌려보내라고 했을 거다. 우리는 연락 없이 찾아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닝 때문에 화가 나 있었고 어닝과 단둘이 이야기하느니 연락 없이 찾아온 번즈 백작과 함께 있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셔요.”
내 말에 집사는 말없이 어닝을 쳐다봤다. 그리고 내게 다시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여기로요. 어닝에게 번즈 백작님을 소개해 주려고요.”
“알겠습니다.”
이제 어닝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자신과 함께 있는데 다른 남자를 들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레이디 비스컨.”
곧이어 번즈 백작이 집사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는 내게 다가와 내 손에 입을 맞추더니 고개를 돌려 어닝을 쳐다보며 말했다.
“친구분도 함께 계신 줄 몰랐습니다.”
“오, 아니에요.”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남자와 단둘이 있으면 보통 약혼자라고 생각하지 않나?
게다가 그는 내가 약혼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재빨리 어닝을 번즈 백작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제 약혼자, 어닝 렌시드 경이에요. 어닝, 이쪽이 번즈 백작님이셔.”
“아, 렌시드 경이군요.”
번즈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어닝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엘리엇 번즈입니다. 최근 레이디 비스컨께 많은 도움을 받고 있죠.”
어닝은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멍하니 번즈 백작을 쳐다보다가 뒤늦게 그의 손을 발견하고 마주 잡았다.
“어, 렌시드입니다. 어닝이요.”
“약혼자와 계시는 줄 알았다면 좀 나중에 올 걸 그랬군요.”
번즈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어닝의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악!”
갑자기 어닝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두 사람을 쳐다봤고 번즈 백작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어닝에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엇, 아니…….”
어닝의 시선이 번즈 백작의 손을 향했다. 이미 두 사람의 손은 떨어진 뒤였다. 뭐야? 나는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고 번즈 백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어닝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제가 뭘 착각했나 봅니다.”
싱겁긴. 나는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고 소파에 앉았다. 금세 하인이 번즈 백작을 위한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어제 제게 왕비 전하께 편지를 보내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찻잔을 들어 올리며 번즈 백작이 입을 열었다. 나는 어닝을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네. 어머니께서 지금 작성하고 계세요.”
“그거, 잠시 중단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째서?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어닝이 끼어들었다.
“역시 번즈 백작님도 걱정이 되는 거죠?”
“네?”
번즈 백작의 시선이 어닝을 향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그의 얼굴에 대고 어닝이 내게 한 말을 다시 했다.
“거마로트 공작님은 국왕 전하의 삼촌이잖습니까. 그런 분께 잘못 보여서 좋을 게 없죠. 역시 번즈 백작님은 현명하신 분일 거라 믿었습니다.”
번즈 백작은 어닝의 말에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웃으며 물었다.
“레이디 비스컨의 약혼자라고요?”
그런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물었다.
“누구 소개였습니까?”
누구 소개냐고? 나는 잠시 고민했다. 잘 기억 안 난다. 우리는 어느 파티에서 만났고 몇 년간 친구로 지냈다. 그러다가 어닝이 내게 구혼을 했고 약혼한 지 몇 달밖에 안 됐다.
“제 어머니 소개였습니다.”
나 대신 대답한 건 어닝이었다. 번즈 백작은 어닝을 보더니 픽 웃었다. 그리고 확실히 말하는데 그 미소는 그리 좋은 의도가 아니었다.
왜 그렇게 웃냐고 묻고 싶었는데 그보다 먼저 번즈 백작이 말했다.
“흥미롭군요. 약혼자가 불쾌한 일을 당하고 왔는데 자기 안위를 먼저 생각한다니 말입니다.”
어닝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나는 번즈 백작에게 화를 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니, 나는 유제니가 걱정돼서…….”
“약혼자를 사람을 해친 흉악한 범인으로 몰았는데 상대방이 더 강하니까 가만히 있으라니, 남자로서는 둘째 치고 귀족으로서나 성인으로서의 자존심도 없습니까?”
번즈 백작의 비난은 날카로웠다. 나는 그의 차가운 태도에 놀라 그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닝 역시 마치 칼에 찔리기라도 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본 번즈 백작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렌시드 자작가의 후계자는 고작 이 정도 수준이군요.”
“번즈 백작.”
거기까지. 나는 정신을 차리고 번즈 백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날카로운 건 처음이다. 내가 어닝과 번즈 백작이 지금 처음 본 사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어닝이 번즈 백작에게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만두세요.”
어닝은 수치심에 몸을 떨고 있었다. 아니면 공포에 떨고 있거나.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번즈 백작을 멍하니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휙 나가 버렸다.
“어닝!”
내가 불렀지만 어닝은 멈추지 않았다. 젠장.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았다.
“레이디 비스컨.”
번즈 백작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지 마세요.”
“하지만…….”
어닝은 내 약혼자다. 그가 내 지인에게 공격을 받았으니 내가 위로해 줘야 한다. 하지만 번즈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렌시드 경은 당신을 무시했습니다. 여기서 굳이 피해자를 고르자면 당신이죠.”
그건 그렇다. 나는 머뭇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