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2/239)

25화. 6 – 4

유제니는 에스턴 자작보다 작다. 패터슨 자작은 에스턴 자작보다 크니 자기보다 작은 유제니를 보고 겁을 먹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다시 패터슨 자작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분해서 거마로트 공작을 쳐다봤고 공작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에스턴 경이 도왔겠지.”

공작의 말에 식당 안에 웃음이 뚝 그쳤다. 하지만 엘리엇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굳이 레이디 비스컨을 불러서 도와달라고 한다고요? 에스턴 경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여기 있는 패터슨 자작님보다 작나 보죠?”

그 반대다. 하지만 계속된 비교에 사람들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고 오티스는 수치심에 몸을 떨며 소리쳤다.

“아니! 무도회 중에 공격당했다더군!”

그러자 다시 식당 안이 조용해졌다. 충격적인 사실에 사람들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패터슨 자작은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들었네. 레이디 비스건이 무도회 중에 에스턴 경을 도와 에스턴 자작을 공격했다고 말이야.”

“무례하시군요.”

유제니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사실이 아닐뿐더러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무례한 짓이다. 그녀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아버지와 에스턴 자작님은 오랜 친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방금 그 말씀은 저희 집안뿐 아니라 에스턴 가를 모욕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무도회에서 레이디 비스컨을 본 사람도 없지.”

지켜보고 있던 거마로트 공작이 끼어들었다.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무도회 도중에 레이디 비스컨이 모습을 감췄다던데. 어디 갔는지 말해 줄 수 있나?”

어디 갔냐고? 당연히 줄리아를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사라진 줄리아를 찾으러 다녔다고 말했다간 줄리아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무도회에 와서 동반자의 눈을 피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는 소문이 돌아 버린다.

결국, 유제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지금 저를 취조하시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무죄라면 증명할 수 있겠지.”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온 게 아니다. 유제니는 엘리엇에게 그만 가야겠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면 공작님은 그때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

“뭐? 내가 왜?”

“그 무도회에 공작님도 없었으니까요.”

“나는 아예 참석도 안 했네!”

공작의 호통에 엘리엇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완벽하게 용의자에서 벗어나는 방법 아닙니까? 참석하지 않았으니 다들 공작님을 의심하지 않겠죠.”

“무례하군!”

“아, 무례한 겁니까?”

엘리엇은 능청스럽게 물어보며 유제니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 공작이 한 짓이다. 그는 그대로 패터슨 자작을 쳐다봤다. 그리고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그래!”

패터슨 자작 역시 당당하게 외쳤다. 엘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에 이상하게도 패터슨 자작은 겁이 났다.

“이상하군요. 제가 듣기로 에스턴 자작님은 침실에서 발견됐거든요. 자작님의 제보자는 침실까지 들어가서 에스턴 자작님이 공격당하는 걸 봤다는 말이군요?”

그 제보자가 정말 제보자가 맞냐는 질문에 패터슨 자작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이야기다. 자작의 침실에 들어가서 자작이 공격당하는 걸 보고도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었다면 제보자가 아니라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다시 속삭이기 시작했다. 엘리엇은 사람들이 충분히 속삭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제보자가 누군지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뭐, 뭐?”

“공범이십니까?”

“뭐, 뭐라고?”

패터슨 자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정말로 들은 것뿐이다. 사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거짓말이었다.

아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맞다. 바로 거마로트 공작에게 들은 거니까. 하지만 지금 여기서 거마로트 공작에게 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 나는 레이디 비스컨이 공범이라고…….”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에게 들었다는 말이죠.”

엘리엇은 패터슨 자작이 계속 말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자작의 말허리를 잘라 버린 뒤 공작에게 시선을 던졌다.

거마로트 공작. 그는 전부터 그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공작가는 지금 로날드의 대에서 끝이 난다. 그러므로 굳이 그가 손을 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 아니, 나는…….”

패터슨 자작은 당황해서 공작을 쳐다봤다. 좀 도와주십쇼! 그런 그의 시선에 공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좀 창피해지고 말면 되지 왜 그까지 끌고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로날드는 할 수 없이 나섰다.

“의혹이 있으니까 물어봤을 뿐이잖나.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게.”

“그렇다면 공작님도 무도회 때 어디 계셨는지 말씀해 주시죠.”

유제니는 공작의 말에 재빨리 반격했다. 의혹? 그 의혹 너도 한 번 받아 봐라. 그녀의 공격에 공작이 말했다.

“나? 나는 집에 있었지. 내 하인들이 증인이 될 수 있네.”

그럴 거다. 공작의 하인들이면 공작이 없었어도 있었다고 말해 주겠지. 유제니는 줄리아를 찾으러 다니면서 누구를 만났는지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하도 정신없이 돌아다녀서 사람들이 그녀를 보기나 했는지 의심이 됐다.

“괜찮습니다, 레이디 비스컨.”

그때, 엘리엇이 유제니에게 말했다. 뭐가 괜찮아? 어리둥절한 그녀에게 그가 다시 말했다.

“제가 부탁드린 걸 말씀하셔도 됩니다. 저를 위해 이런 수모를 당하게 할 수는 없죠.”

그게 무슨 소리야? 유제니는 엘리엇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엘리엇은 그런 그녀에게 씩 웃더니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무도회에서 레이디 비스컨이 안 보였던 건 저 때문입니다.”

“뭐야, 둘이?”

엘리엇의 말에 패터슨 자작이 놀랍다는 듯 외쳤다. 그러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에 있었다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럴듯한 이야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오해하지 마시길. 레이디 비스컨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무슨 부탁인지 궁금하군그래.”

패터슨 자작의 말에 엘리엇은 씩 웃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제니의 의자 뒤에 섰다. 그리고 그녀가 앉은 의자의 등받이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귀족들은 예의범절이 아주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만. 레이디 비스컨께 예법 교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의 시선이 패터슨 자작과 거마로트 공작을 향했다. 그리고 이어서 식당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기 시작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조롱하는 인간이나, 그걸 지켜보기만 하는 인간들이나 엘리엇에게는 똑같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패터슨 자작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괜한 걱정이었군요.”

사람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들도 봤다. 패터슨 자작과 거마로트 공작이 번즈 백작을 조롱한 것을. 그리고 레이디 비스컨을 범인 취급한 것을.

둘 다 초대한 손님에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아니, 초대한 게 아니라 초대받았다 해도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미안해요, 번즈 백작님.”

유제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엘리엇에게 사과했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거마로트 공작과 패터슨 자작은 물론 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는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엘리엇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내가 백작님께 과한 환상을 심어 줬군요.”

귀족은 예의 바를 것이라는 기대가 과한 환상이라는 유제니의 비난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엘리엇이 자신의 손에 손을 얹자 거마로트 공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대접을 받을 줄 알았다면 초대를 재고했을 겁니다.”

그대로 유제니는 엘리엇을 끌고 식당에서 나가 버렸다. 그녀에게 손이 잡혀 나가면서 엘리엇은 뒤를 돌아보고 씩 웃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공작은 화난 레이디 비스컨과 달리 그리 화나 보이지 않는 번즈 백작의 모습에 말을 잃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식당 안의 사람들은 다들 굳은 표정으로 공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장 로날드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국왕의 삼촌이니까.

하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하나같이 공작이 무례했다고,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다음 날부터 사교계에 빠르게 퍼져 나갈 터였다.

“미안해요.”

저택에서 나와 마차에 올라탄 유제니는 재빨리 엘리엇에게 사과했다. 공작이 저런 사람이라고 미리 알려 줬어야 했다.

물론 오늘은 좀 더 과하긴 했다. 엘리엇에게 하는 행동은 물론 유제니에게 하는 행동 역시 깜짝 놀랄 정도로 무례했다.

“어머니께서 왕비 전하를 통해 항의하실 거예요.”

이건 시간이 좀 걸린다. 왕비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 편지를 왕비가 왕에게 전해야 하니까.

하지만 유제니는 국왕이 거마로트 공작을 불러 주의를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공작이라 해도 자기 집에 초대한 손님에게 무안을 주고 취조를 했다.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괜찮습니다.”

엘리엇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유제니의 얼굴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공작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예상보다 좀 더 거칠긴 했지만.

“괜찮지 않아요. 저들이 너무 무례했어요.”

단호한 유제니의 말에 엘리엇은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저들이 저렇게 나올 줄 알았습니다. 어디나 텃세가 있으니까요.”

그는 텃세를 많이 겪어 봤다. 솔직히 말하면 이골이 나서 좀 지겨울 정도다.

하지만 유제니는 아니었다. 그녀는 엘리엇을 향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어디나 있다고 해서 당연한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유제니의 말에 잠시 커졌던 엘리엇의 눈이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가 아는 유제니였다. 그의 기분이,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어디나 있다고 해서 당연한 건 아니다. 엘리엇은 그걸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렇죠.”

그는 유제니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늘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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