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32/239)

24화. 6 – 3

잘못 건드렸다. 그제야 패터슨 자작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유제니는 엘리엇을 말리기 위해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녀도 거마로트 공작과 패터슨 자작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엘리엇에게 왜 공작의 초대를 받아들였냐고 했던 거다.

지금까지 패터슨 자작과 거마로트 공작의 타겟이 된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대부분 당황해서였지만 간혹 엘리엇처럼 반격하는 사람도 거마로트 공작이 자작을 지원하기 시작하면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방금 패터슨 자작은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을 건드렸다. 유제니는 자세를 바로 하고 엘리엇을 지원했다.

“그러게요, 자작님. 말실수를 하셨네요.”

유제니까지 끼어들자 패터슨 자작의 벌겋게 물든 얼굴로 공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쩌냐는 그의 시선에 로날드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저 멍청이, 여기서 날 쳐다보면 어쩌자는 거야? 그는 오티스 패터슨이 이렇게 멍청했던가 하고 속으로 한탄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왕의 삼촌인 거마로트 공작의 앞이다. 엘리엇이 당황하고 넘어갔다면 다들 번즈 백작이 당황했다는 사실만 기억했을 것이다.

하지만 번즈 백작은 콕 집어서 공작에게 자작의 말을 어떻게 생각했냐고 물었고 그는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자작. 무엄하네. 어서 취소하게.”

결국, 공작은 자작을 혼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티스가 억울해졌다. 그가 번즈 백작을 조롱한 건 공작이 묵인한 수준이 아니라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지시대로 했는데 사람들 앞에서 혼을 내다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패터슨 자작은 어쩔 수 없이 사과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공작님.”

“다음부터 조심하게.”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 문밖에 선 집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식사가 다 됐는지 확인하라는 신호에 집사가 움직였을 때 일을 이렇게 흐지부지 끝낼 생각이 없는 유제니가 나섰다.

“번즈 백작님께도 사과하셔야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눈치를 보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번즈 백작에게 사과하라고? 사람들은 과연 패터슨 자작이 사과할지 흥미롭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패터슨 자작은 유제니가 자신을 조롱하는 건가 싶어서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당연하지 않냐는 표정이었고 자작을 놀리거나 일부러 괴롭히려는 기색은 없었다.

물론 유제니는 진심으로 패터슨 자작과 거마로트 공작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미, 미안하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채 패터슨 자작이 엘리엇에게 사과를 건넸다. 공작과 함께하면서 상대방에게 사과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엘리엇은 웃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지만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왕족 모독죄로 잡혀가고 싶지 않으시다면요.”

농담 같은 엘리엇의 말에 응접실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집사가 공작에게 식사가 준비됐음을 알렸다.

“이제 식당으로 가시죠.”

거마로트 공작은 손님들에게 이동을 권한 뒤 패터슨 자작을 향해 눈짓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유제니를 향했다.

번즈 백작을 위해 나선 것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다. 보통 자신의 파트너가 공격을 받으면 도와주려 하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유제니 비스컨은 좀 융통성이 없다는 평이다.

“타겟을 바꾸지.”

로날드는 다가오는 오티스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레이디 비스컨은 귀족 예법에 능숙하다. 그녀가 도와주는 한 번즈 백작을 공격하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차라리 레이디 비스컨을 공격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화가 난 레이디 비스컨과 곤란해하는 번즈 백작을 만들면 번즈 백작에게 접근하기가 쉬울 테니까.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군.”

음식이 나오자 공작이 말했다. 거마로트 공작의 연회이니 당연히 식자재는 최고급만 사용했고 요리사 역시 온 힘을 기울여 요리했다.

당연히 아주 훌륭한 음식이었다. 거위 안에 오리, 닭을 순서대로 넣어 통째로 구운 요리부터 버섯과 소고기를 큼직하게 넣어 구운 파이와 대구를 통째로 쪄서 가니시를 얹어서 내왔다.

물론 자잘한 음식도 있었다. 크림을 듬뿍 넣어 만든 감자 샐러드나 갖가지 과일을 섞어 만든 케이크, 말린 과일과 견과류를 넣은 치즈까지.

“이렇게 훌륭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니 운이 좋군요.”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훌륭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주 맛있기도 했고.

“번즈 백작은 어떤가.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

공작은 아직 음식에 손을 대지 않은 엘리엇에게 물었다. 그가 뭐라고 대답하든 그를 비웃을 생각이었다. 맛있다고 한다면 왕궁보다 맛있냐고 물어볼 생각이고 괜찮다고 한다면 입맛이 그리 고급이니 엘리엇이 여는 연회를 기대한다고 할 생각이었다.

물론 별로라고 대답할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바깥쪽 나이프요.”

유제니는 재빨리 엘리엇에게 속삭였다. 그가 음식에 손을 대지 않은 이유가 어떤 식기를 써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녀의 예상이 맞았는지 엘리엇은 유제니가 알려 준 대로 가장 바깥쪽의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거위와 오리, 닭을 모두 맛볼 수 있도록 잘라 낸 고기를 잘라 입에 넣은 뒤 맛을 보고 말했다.

“맛있습니다. 지금 사는 곳보다는 별로지만요.”

그의 대답에 식당 안이 잠시 싸늘해졌다. 하지만 곧바로 유제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꽤 재치 있는 대답이었다. 특히나 거마로트 공작이 엘리엇을 조롱할 거라고 생각했던 유제니로서는.

현재 엘리엇이 왕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도 웃기 시작했다. 다들 엘리엇이 재치 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공작은 사람들을 따라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쓰린 속을 숨기기 위해 번즈 백작에게 말했다.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군.”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능청스럽게도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얄미워 죽겠네. 거마로트 공작은 당장이라도 번즈 백작을 내쫓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공작 부인이 엘리엇에게 두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북부 세넨데로 여행을 떠난 그의 아들은 몇 주 전 보낸 편지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겨 버렸다. 심지어 아들과 동행한 하인이나 아들이 고용한 용병, 그리고 아들의 친구들까지 아무도 연락되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공작 부인은 그대로 쓰러졌고 공작은 비밀리에 아들을 찾아 나섰다. 어느 멍청이가 다아리브혼을 화나게 했는데 그게 그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니 비밀리에 찾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아들의 행방을 묻기 위해 번즈 백작에게 저자세로 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거마로트 공작이다. 현 왕의 삼촌이자 발시안의 단둘뿐인 공작가의 수장이다.

“최근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패터슨 자작은 공작이 눈짓하자 입을 열었다. 방금 전 공작의 행동으로 좀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오늘 계획한 건 진행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참 충직하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에스턴 자작 말입니다.”

“오, 알아요. 정말 비극적이죠.”

그렇지 않아도 사교계에 에스턴 자작 사건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도회가 끝난 다음 날 침입자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알려진 그 사건은 다들 걱정하고 있었다.

유제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사람 중 그녀가 그 사건을 가장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제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들었는데 범인이 꽤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다더군요.”

오티스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반짝였다. 가까운 곳에 있다고? 그렇다면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이라는 말이다. 어느 쪽이건 자극적인 상황이었고 사교계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레이디 비스컨?”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차를 홀짝이고 있던 유제니는 놀라서 오티스를 쳐다봤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녀는 그가 무슨 의도로 물어본 건지 몰라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무섭네요. 조심해야겠어요.”

“레이디 비스컨은 에스턴 경과 꽤 친분이 있다고 하던데요.”

제이크 에스턴의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방금 범인은 꽤 가까운 곳에 있다고도 했고.

사람들의 시선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패터슨 자작이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혹시?’ 하는 눈빛들이 빠르게 교환되고 유제니는 태연히 말했다.

“에스턴 경이 아니라 에스턴 자작님과 친분이 있지요. 정확히 말하면 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에스턴 자작님과 친분이 있고요.”

“하지만 에스턴 경이 레이디 비스컨에게 구혼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렌시드 경과 약혼했고요.”

“하지만 이 자리에는 번즈 백작과 함께 왔군요.”

노골적인 패터슨 자작의 말에 유제니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금세 공작과 자작의 타겟이 자신이 된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왜 번즈 백작을 왜 이렇게까지 공격하는지 의문을 품었다.

패터슨 자작과 거마로트 공작이 영향력이 적은 사람을 놀리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것을 안다. 당연히 번즈 백작을 공격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번즈 백작을 공격하기 위해 비스컨 백작의 딸인 유제니까지 공격한다?

이건 두 사람이 엘리엇에게 깊은 유감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유제니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부탁을 받아서요. 그게 예의라고 배웠거든요. 자작님은 아니신가요?”

“부탁을 받아서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죠.”

“뭐라고요?”

능글능글 웃는 자작의 말에 유제니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누가 뭘 해?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다시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럼 에스턴 자작을 공격한 게 에스턴 경이라는 말이에요?”

“레이디 비스컨이 도와줬다는 거 같네요.”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사실인 것처럼 퍼져 나갔다. 상대가 패터슨 자작이라 더 그랬다. 그때, 엘리엇이 나섰다.

“이상한 일이군요. 그러니까 자작님 말씀은 여기 있는 레이디 비스컨이 에스턴 자작님을 공격했다는 말입니까?”

직설적인 엘리엇의 말에 식당 안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엘리엇은 유제니를 쳐다보고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패터슨 자작에게 말했다.

“자작님, 운동 좀 하셔야겠습니다.”

“뭐, 뭐라고?”

뜬금없는 소리에 패터슨 자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엇은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계속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자작님은 지금, 레이디 비스컨의 공격을 받아서 의식 불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잖습니까? 아니, 얼마나 힘이 없으면…….”

마지막은 웃느라 말이 흐려졌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사람들에게 똑똑히 인식됐다. 금세 식당 안에 웃음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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