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1/239)

23화. 6 – 2

“어서 와요, 번즈 백작. 그리고 레이디 비스컨.”

거마로트 공작의 연회는 유제니의 예상대로 꽤 규모가 컸다. 공작 부부를 포함해 서른 명의 사람이 참석했는데 다들 어마어마한 부자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번즈 백작이 레이디 비스컨과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엘리엇과 유제니를 본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 한마디씩 던졌다. 유제니 비스컨은 사교 활동이 활발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소수의 지인과 친분을 유지했고 활동하는 사교회라고는 미혼 여성들의 봉사 모임인 흰장미회뿐이었다.

“아, 비스컨 경과 친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외라는 태도에 엘리엇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것만으로 모든 설명이 가능하다는 듯이.

그리고 그의 여유로운 태도 덕분에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올리버가 누이에게 번즈 백작의 동행을 부탁했다고.

“연회에 처음 왔다고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으며 유제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렇게 능숙하게 대화를 피하는 건 올리버도 하지 못할 것이다.

유제니의 질문에 엘리엇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하인이 가져다주는 찻잔을 받아 주며 말했다.

“처음이라는 말은 한 적 없는데요.”

뭐라고? 유제니의 시선이 휙 하고 엘리엇을 향했다. 그녀는 속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엘리엇은 정말로 연회에 처음 가 본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그저, 귀족 예법에 익숙하지 않았다고 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그는 연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수도에 나타난 뒤로 국왕의 친절 덕분에 왕궁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국왕의 초대로 왕궁에 머물고 있는 사람만큼 왕궁 내 소식에 빠른 사람은 없다. 다들 왕궁에 머무는 사람을 초대해 왕궁 소식을 듣고 싶어 한다.

그게 최근 사교계를 들썩이게 하는 신흥 귀족, 엘리엇 번즈 백작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번즈 백작이 연회에 참석했다면 분명 소식이 들렸을 테고 그런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유제니는 그가 참석한 적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번즈 백작은 고향이 어디죠?”

당연하게도 이번 연회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번즈 백작을 향했다. 엘리엇은 약간 무례하다 싶을 정도의 관심에도 여유롭게 대답했다.

“모르실 겁니다. 북부 쪽이거든요.”

“북부면 이즈인가요?”

“네, 그쪽입니다.”

꽤 추운 곳에서 자랐다. 사람들의 눈빛을 본 엘리엇은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열두 살 이후로는 발시안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수도로 올라왔습니다.”

“오, 그러면 수도에서 꽤 오래 살았군요?”

엘리엇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산 기간만 세자면 수도는 가장 짧게 산 곳이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런 말을 해서 저들의 호기심을 부채질해 줄 생각이 없었다.

“부모님은요? 아직 이즈에 사나요?”

공작 부인의 질문에 엘리엇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응접실 안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낯익은 얼굴들이다. 그중에서 특히 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엘리엇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핸더슨 후작 부인까지 시선을 돌렸다가 공작 부인에게 말했다.

“아니요. 돌아가셨습니다.”

“저런.”

안타깝다는 한숨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그건 유제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몰랐다. 당연히 이 남자에게도 그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부모가 있겠지.

하지만 엘리엇의 여유로운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그가 가족이나 친구 같은 관계에 초연하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몰랐어요.”

유제니는 엘리엇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덮으며 속삭였다. 상대방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니 이건 그녀가 생각해도 좀 너무했다.

엘리엇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열두 살 때 사망했다. 엘리엇이 발시안 아카데미에 가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사람들의 동정이 싫어서 그는 일부러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제니의 동정은 기분이 좋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덮은 유제니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놓으며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어렸을 때니까요.”

유제니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젠장. 엘리엇은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하고 그런 유제니가 귀엽기도 해서 헛웃음을 지었다.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재빨리 덧붙였다.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워낙 예전 일이라서요.”

정말 예전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엘리엇은 어머니의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그리고 그건 유제니를 더욱 슬프게 했다. 그렇게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다니. 그녀는 가슴이 아파서 엘리엇의 손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번즈.”

유제니가 엘리엇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떼어 냈을 때, 창문 옆에 서 있던 나이 든 남자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패터슨 자작이었다.

시작했군. 유제니는 패터슨 자작이 엘리엇을 번즈 백작이 아니라 번즈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귀족 예법이란 결국 귀족들이 만든 것이다. 나이가 어리고 신흥 귀족일수록 예법을 지키기를 강요한다. 그런 점에서 엘리엇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이었다.

유제니는 엘리엇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줬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나이 든 후작이나 공작이 좀 무례하게 굴 수 있다고.

하지만 패터슨 자작이 나선 걸 보니 거마로트 공작은 뒤로 물러나 있기로 한 모양이다.

“네, 패터슨 자작님.”

엘리엇은 패터슨 자작의 기선 제압 시도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패터슨 자작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이런, 실수했군. 자네가 귀족이라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야.”

순식간에 부드럽던 응접실 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여기 초대된 사람들은 사교계의 예법이나 사람들의 관계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다들 패터슨 자작이 일부러 번즈 백작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패터슨 자작의 뒤에 거마로트 공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괜찮습니다. 저도 익숙하지 않으니까요.”

부드러운 엘리엇의 대꾸에 응접실 안에 긴장이 풀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제니 역시 그가 여유롭게 받아치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패터슨 자작은 품에서 커터를 꺼내 담배 끝을 잘라 냈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어떻게 드래곤의 둥지를 찾아냈는지 매우 궁금하군. 말해 줄 수 있나?”

약간 도발적인 요구였지만 드래곤의 둥지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이미 흥분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그게 궁금해서 엘리엇을 만나고 싶어 하던 차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다아리브혼을 만났는지 묻고 싶어 했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엇이 드래곤의 둥지에서 얼마나 많은 보석을 가져왔는지 묻고 싶어 했다.

물론 패터슨 자작은 후자였다.

“자네가 드래곤의 둥지에서 가져온 보석이 상당하다던데. 작위를 사고도 남았다지?”

무례한 패터슨 자작의 질문에 다시 응접실 안의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남의 재산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부족해서 엘리엇이 돈을 주고 작위를 샀다는 말을 한 거다.

다들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문 채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브랜든, 너무 짓궂군.”

거마로트 공작은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기 위해 나섰다. 물론, 이건 패터슨 자작과 공작이 미리 말을 맞춰 둔 거다. 자작이 무례하게 굴면 공작이 나서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로.

이렇게 하면 타겟을 조종하기가 좀 더 쉬워진다. 공작은 자작에게 수고했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때,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짓궂긴요. 누구나 궁금해하는 건데요.”

엘리엇이 기분 상하지 않았다는 반응을 보이자 응접실에 있던 사람들은 다행이라는 생각에 엘리엇에게 동조하기 시작했다.

다들 궁금해하긴 했다. 번즈 백작이 과연 드래곤의 둥지에서 얼마나 많은 보석을 가지고 나왔는지. 그리고 정말 국왕 전하께서 번즈 백작에게 보석을 받고 작위를 내린 건지.

거마로트 공작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더 짓궂게 굴라고 해야겠군.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패터슨 자작을 쳐다봤을 때였다.

‘달칵’ 하고 엘리엇이 자신의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약간 큰 소리라 공작과 자작은 그걸로 엘리엇을 조롱하려 했다.

찻잔을 내려놓을 때 조용히 내려놓아야 하는 것도 못 배웠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작님?”

“찻잔을, 뭐라고?”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던 공작은 엘리엇의 질문에 멈칫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뭐를?

그는 당황했지만, 곧 여유를 찾았다. 그래 봤자 운 좋게 귀족이 된 촌뜨기다. 공작 부인만 아니었으면 그가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을.

솔직히 말하면 공작은 번즈 백작이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것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평민들은 대부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건 그가 공작이기 때문이다. 현 왕의 삼촌이자 공작인 사람 앞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귀족들도 그럴진대 하물며 귀족을 만날 일이 적은 평민들은 그게 더 심할 거다.

하지만 로날드 거마로트는 평민들은 다들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하고 더듬거나 말을 흐린다고만 생각했다.

“작위 말입니다. 여기 자작님께서는 국왕 전하께서 돈을 받고 작위를 내린다고 하셨는데요.”

거기까지 말한 엘리엇은 패터슨 자작을 쳐다보며 확인했다.

“맞죠?”

그제야 패터슨 자작과 거마로트 공작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히 평민 따위가 그들의 말에 반격을 할 줄 몰랐다.

응접실 안에서 음식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도 반은 흥미롭게, 반은 긴장해서 번즈 백작과 거마로트 공작을 쳐다보고 시작했다.

지금 번즈 백작이 거마로트 공작과 패터슨 자작에게 반격한 건가?

응접실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거마로트 공작과 패터슨 자작이 한편이라는 것을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패터슨 자작이 영향력이 낮은 귀족을 조롱하기를 즐긴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걸 거마로트 공작이 묵인한다는 것도.

하지만 그 타겟이 대놓고 반격하는 건 처음이다.

“어, 그게…….”

“아니었습니까? 작위를 사고도 남았냐고 물어보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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