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6 – 1
“대장.”
옷을 입고 있던 엘리엇은 더그가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손을 저어 하인들을 내보냈다.
이 좁은 방 안에서 하인들의 수발을 받는다는 게 고문처럼 느껴지던 차였다. 특히나 그 하인들이 수많은 귀족에게 엘리엇에 대해 알아내는 게 있다면 뭐든 제보하기로 하고 돈을 받은 자들이라면 더욱더.
이건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엘리엇은 늘 왕궁이 싫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계급 상관없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 한 명 빼고.
“집을 구매했습니다.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그의 보고에 엘리엇은 크라바트를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이 좁은 왕궁에서 벗어날 때가 왔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왕궁이 엄청나게 크고 화려하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화려하고 큰 방에 살 수 있는 사람은 한정돼 있다.
손님 대부분은 침대와 옷장만 들어가는 한 칸짜리 방을 받을 뿐이다. 당연히 엘리엇은 이렇게 좁은 방이 싫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킨이 출발했습니다. 인원은 지난번에 말씀드린 수에서 다섯 명 더 늘어났습니다.”
이어진 보고에 엘리엇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부하들에게 원한다면 그의 영지에서 살아도 좋다고 말했다.
대부분이 영지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영지민이 되기 위해 영주에게 지불해야 하는 정착금도 탕감해 주었다.
“결정되면 알려 주게.”
엘리엇의 말에 더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로 내려간 전원이 영지에 정착하는 건 아니다. 살펴보고 결정하겠다는 사람이 더 많았다.
엘리엇은 드래곤의 둥지에서 가져온 보물을 기여도에 따라 부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가장 적게 받은 사람조차 어느 영지의 영지민 신분을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그러니 꼭 번즈 백작의 영지에 정착할 필요는 없다. 엘리엇 역시 강제할 생각은 없었다. 어느 영지에 정착할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다.
“전에 말씀하신 건물도 거래를 끝냈습니다.
더그의 보고가 이어졌다.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지시한 것들이다. 몇 채의 건물을 사고 회사를 설립했다. 투자용으로 몇몇 사업가와 만나 거래를 하기도 했고.
어떤 거래는 안정적이었지만 어떤 거래는 이런 거래를 왜 하냐고 생각할 만한 거래였다. 그런 면에서 더그는 훌륭한 부하였다. 엘리엇의 지시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수행했을 뿐 아니라 입도 무거웠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엘리엇이 지시한 것들을 전부 보고한 뒤 더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엘리엇은 정보 길드에 꽤 많은 돈을 내고 가입했을 뿐 아니라 수도에 있는 몇 가지 신문사도 후원했다.
그것만으로도 더그는 엘리엇이 정보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았다. 그는 엘리엇이 신경 쓰는 몇 가지에 대해 독자적으로 정보를 수집했고 그중 한 가지에 관한 이야기를 오는 길에 들었다.
“에스턴 자작 사건에 이변이 생겼습니다.”
에스턴 자작? 전혀 관심 없는 이야기가 더그의 입에서 나왔지만 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더그의 눈치와 일 처리를 믿었다.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조심스럽게 꺼낼 리가 없다.
“자작을 공격한 범인에 대해 안다는 제보가 있었답니다.”
“제이크 에스턴?”
엘리엇의 말에 더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제보자는 자작을 공격한 사람이 제이크라고 하기는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제이크가 아니다.
엘리엇은 더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계속 말하라는 태도에 더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제니 비스컨 양 말입니다.”
“레이디 비스컨.”
곧바로 유제니의 호칭을 고쳐 주는 엘리엇의 말에 더그는 잠시 당황했다가 다시 말했다.
“네, 레이디 비스컨이요. 그분이 연루됐다고 했답니다.”
엘리엇의 푸른색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더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릴 뻔하다가 멈출 수 있었다.
신기한 남자다. 그는 엘리엇의 시선을 피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생각했다.
더그가 엘리엇 번즈를 만난 것은 고작해야 일 년쯤 전이다. 고작 일 년 만에 그가 엘리엇에게 충성하게 된 것은 엘리엇 번즈라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일 뿐 아니라 그의 인생을 구해 줬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음에도 엘리엇 번즈는 통찰력이 있었다. 게다가 사람을 부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위압감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가끔은 엘리엇이 정말 인간이 맞을지 의심한 적도 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목숨에 약간 초연하게 굴었다. 그런 모든 것이 합쳐져서 엘리엇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극과 극의 반응을 보였다.
더그처럼 엘리엇을 존경하고 충성하거나, 그를 무서워하거나.
“어떻게 할까요?”
엘리엇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참다못한 더그가 물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들으면 엘리엇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척 궁금했다.
유제니 비스컨. 비스컨 백작가의 둘째로 평범한 아가씨다. 일단 그가 알아본 바로는 그랬다.
백작이 될 오빠가 한 명 있고 본인은 자작이 될 남자와 약혼했다. 약간 융통성이 없다는 평이 있지만 그것뿐.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지거나 온갖 분야에서 탐낼 만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닌, 그냥 평범한 귀족 아가씨일 뿐이다.
그런 여자에게 왜 관심을 가지는 걸까. 더그의 머릿속에 엘리엇이 저먼 경의 심부름꾼에게 편지를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편지를 받아 든 엘리엇이 아무 말 없이 말을 타고 떠나 버렸기 때문에 뒤에 남은 더그가 그가 버리고 간 편지를 보고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그리고 뒤늦게 사람들과 레이디 비스컨이 납치된 집에 도착했을 때, 더그는 엘리엇이 레이디 비스컨에게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알 수 있었다.
저택 안에 남아 있는 사람 중 신체가 멀쩡하게 붙어 있는 건 서재에서 기절한 채 발견된 용병 하나뿐이었다.
“제보자는?”
짤막한 엘리엇의 질문에 더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존경하고 따르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엘리엇이 무서웠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두렵기도 했다.
“찾고 있습니다.”
“일단 찾은 다음에 이야기하지.”
“아들 쪽은 어떻게 할까요?”
에스턴 자작 쪽은 이미 조사가 끝났다.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원한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물론 사람이란 몇 푼의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존재이기는 하다.
하지만 에스턴 자작은 괜찮은 사람이었고, 심각한 원한을 살 만한 사건에 연루된 바도 없었다.
“찾아보게.”
엘리엇의 지시에 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 하자 엘리엇이 재빨리 덧붙였다.
“약한 트러블 쪽으로 찾아봐.”
“약한 트러블이요?”
상대방의 아버지를 죽이고 누명을 씌울 정도면 상당한 원한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엘리엇은 좀 다르게 생각했다.
“불만은 품고 있지만, 친분은 유지할 정도의 관계 말이야.”
그 정도로 상대방의 아버지를 살해하지는 않을 텐데. 더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저 고개를 꾸벅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채비를 마친 엘리엇도 마차를 타고 비스컨 백작가로 향했다.
“번즈 백작님.”
엘리엇을 기다리고 있던 유제니는 그가 도착했다는 말에 곧바로 이 층에서 내려오다가 멈칫했다.
계단 아래에 어두운 남색 정장을 입은 엘리엇이 서 있었다. 미리 그녀가 일러 준 대로 너무 튀지 않는 디자인에 일부러 어두운 남색의 천으로 새로 지은 옷이다.
하지만 엘리엇의 얼굴이 문제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는 어두운 남색 정장에 받쳐 도드라졌고 튀지 않는 디자인이 오히려 엘리엇의 외모가 얼마나 뛰어난지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거마로트 공작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 유제니는 다시 계단을 내려오다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엘리엇의 얼굴을 보고 멈췄다.
그는 마치 그녀를 처음 봤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약간 충격받은 것 같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멍한, 살면서 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유제니는 자신의 옷차림에 문제가 있나 싶어서 재빨리 살폈다. 그녀도 어두운 남색 드레스를 입었다. 머리는 하나로 묶어서 뒤로 동그랗게 틀고.
너무 파였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유제니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으로 향했지만, 그녀의 드레스는 고작해야 빗장뼈까지만 파였을 뿐이다. 저녁용 드레스는 어깨까지 드러내는 경우도 많다.
“번즈 백작님?”
유제니가 고개를 들며 엘리엇을 부르자 그녀의 귀에서 길게 늘어진 귀걸이가 찰랑이며 반짝였다. 엘리엇은 재빨리 그녀에게 가져온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디서 이런 말을 배운 걸까. 유제니는 엘리엇의 인사말에 감탄하며 꽃을 받아 들었다. 꽃다발이 어찌나 큰지 양팔로 끌어안아야 할 정도였다.
“고마워요. 이렇게 큰 꽃다발은 처음 받았어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 유제니는 다가온 집사에게 꽃다발을 넘기고 가족들에게 인사한 뒤 저택을 나섰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엘리엇은 마차를 타고 온 모양이었다.
말이 아닌 건 다행이군. 유제니는 지난번에 엘리엇이 말을 타고 왔던 것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참, 오늘 아주 멋있어요.”
마차에 올라탄 뒤 유제니는 재빨리 엘리엇에게 칭찬을 건넸다. 파트너에게 칭찬을 하는 건 예의지만 꼭 예의상 하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오늘 번즈 백작은 아주 멋있었다. 평소에도 잘생기긴 했지만.
엘리엇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는 평소보다 우아한 유제니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에 유제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비스컨도 아주 아름답습니다.”
예의상 하는 말이다.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예의라는 건 아주 중요하다. 어떤 이유로 하는 거든 상황에 맞춰 예의를 지킬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이 그 정도 상황 파악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문득 이렇게 큰 꽃다발은 처음이라고 말했던 게 생각나서 유제니의 얼굴이 붉어졌다. 꼭 꽃다발을 처음 받은 듯한 말이었다. 그녀는 마차의 바퀴 소리에 지지 않을 정도지만 밖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말했다.
“아, 그리고 꽃다발도 감사해요. 어닝 외의 남자에게 꽃다발을 받는 건 처음이에요.”
알고 있다. 엘리엇은 말없이 웃었다. 그는 이 사교계의 남자들이 유제니에게 꽃을 선물하지 않을 정도로 멍청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유제니의 약혼자인 어닝 렌시드가 구혼 중에 한 번, 유제니의 생일날 한 번, 이렇게 딱 두 번 꽃다발을 선물했다는 것도 알았다.
“혹시 약혼자 외의 남자가 꽃다발을 선물하면 예의에 어긋납니까?”
엘리엇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닌 걸 안다. 다행히 그의 연기에 속은 유제니가 웃으며 말했다.
“구혼하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어요.”
“그렇군요.”
그는 과도하게 안도했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표정에 유제니가 웃음을 터트리자 엘리엇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