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31/239)

21화. 5 – 4

“약혼자요?”

번즈 백작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내 쪽의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어디서 봤습니까?”

지나갔다. 마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닝을 발견한 골목에서 꽤 떨어진 뒤였다.

좋은 냄새가 나네. 밖을 확인하던 내 뒤통수에 번즈 백작의 몸이 닿았다. 그에게서 꽤 좋은 냄새가 났다. 시원하면서 남성스러운 향기였다. 한여름인데도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 그 골목이요. 제가 모르는 게 낫다고 했던.”

“아.”

어디서 어닝을 봤는지 이야기하자 번즈 백작은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곧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잘못 보았을 겁니다.”

응?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에 어리둥절해하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그의 주장은 일단 말이 안 된다.

번즈 백작은 어닝을 모르니까. 아니, 잠깐. 아나?

나는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어닝을 알아요?”

“아니요.”

꼭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네. 나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흘러나온 대답을 듣고 잠시 그를 쳐다봤다.

“그럼 내가 잘못 봤는지 어떻게 알아요?”

놀랍게도 번즈 백작의 얼굴에 곤란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때, 마부가 소리쳤다. 어느새 마차는 어느 집 앞에 멈춰 있었다. 나는 번즈 백작이 말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곧바로 마차 문을 열더니 밖으로 나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 손 잡으세요.”

마음에 안 든다. 그가 이렇게까지 대답을 피하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나는 주제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번즈 백작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재빨리 거리를 확인했다.

귀족들이 사는 거리에서 약간 떨어져 있긴 하지만 여기도 괜찮은 거리였다. 집들이 깔끔했고 대부분 이층집이었다. 가끔 삼층집도 있었고.

엘버트 경의 집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집이었다. 그러고 보니 엘버트 경이 사는 집에 온 건 처음이군.

나는 삼 층짜리 건물을 올려다보며 엘버트 경이 이 집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생각했다.

엘버트 경은 경이라는 호칭이 붙지만, 엄밀히 말하면 귀족이 아니다. 그는 할아버지가 귀족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작위를 물려받지 못한 셋째였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경이라는 호칭은 엘버트 경의 아버지까지만 쓸 수 있는 호칭이지만 우리는 그냥 엘버트 경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엘버트 씨.”

번즈 백작이 도어 노커를 두드리며 엘버트 경을 불렀다. 내가 명단에 엘버트 경이 아니라 엘버트 씨로 썼던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번즈 백작이 몇 번 더 도어 노커를 두드렸지만 안에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하군요.”

안에서 나오는 사람은커녕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자 번즈 백작이 내게 돌아서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나 역시 굳게 닫힌 창문을 쳐다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창문까지 다 닫아 놓다니, 좀 이상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거기 살던 사람 도망쳤어요.”

뒷문을 찾아서 들어가 볼지 번즈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빈집이라고? 남자는 내 얼굴을 보더니 멈칫했다.

그리고 나와 번즈 백작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빚쟁이인 줄 알았지 뭡니까.”

빚쟁이라고? 살면서 빚쟁이로 오인받아 보기는 처음이다. 황당해하는 내게 남자가 말했다.

“이틀 전부터 웬 험상궂은 남자들이 쫓아와서 나오라고 하도 난리를 쳐야 말이죠. 엘버트 경을 찾아오신 겁니까?”

험상궂은 남자들이 쫓아왔다고? 나는 남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도망쳤다고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사실이었나 보다. 남자는 히쭉 웃으며 말했다.

“어젯밤에요. 설마 그분에게 돈을 빌려주신 건 아니죠? 그렇다면 받기 힘들 겁니다.”

허. 나는 엄청난 소식 앞에서 잠시 망연해서 서 있었다. 빚 때문에 야반도주를 했다고? 황당해하는 내게 남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분의 아버지께서 도와주지 않겠다 하신 모양이죠. 거참, 저 큰 집을 팔아도 해결이 안 되는 빚이었나 봅니다.”

그랬던 모양이다. 나도 그 이야기는 들었다. 엘버트 경의 아버지, 그러니까 진짜 엘버트 경이 아들을 돌보는 데 진저리를 치고 있다고.

매번 아들의 도박 빚을 갚아 주던 것도 진짜 엘버트 경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엘버트 경이 이 큰 집에서 살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덕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남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그를 보냈다. 엘버트 경이 어디로 도망친 건지 궁금하지만 그걸 알아봤자 지금 내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할 수 없죠.”

엘버트 경의 집에서 벗어나며 번즈 백작이 말했다. 어깨를 으쓱하는 모양새가 소년 같다. 이를 어쩐다. 나는 그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다른 사람을 찾아볼게요.”

정 안 되면 올리버가 있다. 애초에 그를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도 올리버였잖아.

하지만 나도 알고 어머니도 아시고 하늘도 알 듯, 올리버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그는 늘 이렇게 일을 벌여 놓고 뒤처리를 나나 어머니께 맡긴 뒤 도망쳐 버리곤 했다.

그래도 오라버니의 마음속에 있는 실낱같은 책임감을 자극하면 나서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번즈 백작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예법이야 차차 배우면 되죠. 문제는…….”

문제는? 그는 적절하게 말을 흐렸고 나는 마차 앞에서 그를 올려다보며 계속 말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초대장을 좀 받았거든요. 그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도와줄 수 있어요.”

귀족가에서 자라면 자연스럽게 익히는 일이 편지의 답장을 쓰는 거다. 특히 초대장을 분류하고 참석할 만한 곳을 선별하는 요령과 승낙과 거절의 답장을 쓰는 법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익히는 거였다.

생각해 보면 번즈 백작은 최근 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꽤 많은 초대장이 날아들 테니 그걸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 할 거다.

“아, 그리고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는데 꼭 와 달라고 해서 그만 가겠다고 했지 뭡니까.”

이어진 번즈 백작의 말에 나는 그것도 도와주겠다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잠깐, 이건 뭘 도와줘야 하는 거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귀족들은 식사 예절이 다르다던데요.”

“그것도 도와줄 수 있어요.”

별거 아니다. 요리마다 사용하는 식기가 조금 달라지는 것 정도. 아, 그리고 어디에 앉는지 같은 거나 식사 후 할 이야기 같은 게 있구나.

끙.

저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진짜로 번즈 백작은 배워야 할 게 많았다. 급한 대로 가르쳐 줘야 할 게 뭐지? 우선 호칭과 인사가 있다.

내 호칭도 몇 번이나 틀렸지. 방금처럼 엘버트 경 같은 경우도 있다. 실제로 작위가 없는데도 예의상 경을 붙여서 불러 줘야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무엇을 먼저 가르쳐 줘야 하는지 하나둘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는데 번즈 백작이 마차 문을 열며 말했다.

“그럼 내일 모시러 가겠습니다.”

“네? 어딜요? 아니, 뭐를요?”

“저녁 식사 말입니다.”

저녁 식사?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번즈 백작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지금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건가? 번즈 백작이 지금 어디 살지? 아직 왕궁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 설명이 부족했군요.”

무슨 저녁 식사를 말하는 건지 혼란스러워하는데 번즈 백작이 내 뒤로 마차에 올라오며 말했다. 그는 허리를 숙인 채 맞은편에 앉더니 조심스럽게 허리를 펴며 말을 이었다.

“내일 저녁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왕궁에서 몇 번 마주쳤는데 밥 먹으러 오라고 하더군요.”

왕궁에서 마주친 사람이라면 무조건 귀족일 것이다. 그리고 밥 먹으러 오라고 하는 건 그냥 밥을 먹는 게 아닐 거고.

당연히 번즈 백작만 초대받았는지 파트너까지 같이 초대받았는지에 따라 그 처신도 달라진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초대한 사람은 누구죠?”

번즈 백작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언뜻 보면 미소였지만 살짝 경멸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내가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초대한 사람을 경멸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일부러 내게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할 리도 없고.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고 번즈 백작이 입을 열었다.

“거마로트 공작님입니다.”

거마로트 공작님? 너무 의외의 인물이라 내 머릿속의 이름과 사람이 바로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을 착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의외의 인물이다. 나는 당연히 혼기가 찬 딸을 둔 귀족가에서 제일 먼저 초대할 줄 알았거든.

아니면 신흥 귀족에게 호의적이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거마로트 공작은 둘 다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 하나밖에 없고 신흥 귀족은 물론 하급 귀족들과도 그리 친하지 않았다.

좀 정확하게 말하면 콧대가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기야 국왕 전하의 삼촌이다. 당연히 콧대가 높을 수밖에 없고, 그걸 콧대가 높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 사람이 번즈 백작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고? 촉이라는 게 없어도 무슨 의도인지 예상할 수 있다.

“왜, 왜 받아들였어요?”

나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는 번즈 백작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라면, 내가 번즈 백작이라면 무슨 핑계를 대서든 거절했을 거다.

이 남자에게는 거마로트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 줄 귀족 친구가 한 명도 없나? 빌어먹을 올리버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왜라뇨?”

번즈 백작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초대받았으니까요. 승낙하는 게 예의 아닙니까?”

공포와 혼란으로 엉망이 된 머릿속이 순진하기까지 한 번즈 백작의 표정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됐다. 젠장,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잘생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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