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5 – 3
“기대하겠습니다.”
쐐기를 박는 듯한 번즈 백작의 말에 내 가슴이 죄책감으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실수했다, 실수했어. 나는 그가 공연에 대해 더 묻기 전에 재빨리 주제를 바꿨다.
“집사 말로는 제가 드린 명단의 교사들이 전부 거절했다고 하던데요.”
“아, 네.”
미소로 환해졌던 번즈 백작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그는 내가 앉는 것을 보고 내 맞은편에 앉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들 바쁘거나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물론 레이디 비스컨께 다시 요청드리는 건 아닙니다.”
금세 하인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번즈 백작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저 추천을 해 주셨으니 말씀드려야 할 듯해 집사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렇겠지. 빅스도 그랬다. 전언만 남기고 가 버렸다고. 하지만 그건 내 책임이다. 그냥 가게 둘 수는 없다.
“미안해요.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로만 적었는데 그사이에 일이 생겼나 보네요.”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죠.”
번즈 백작이 관대하게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건 내 책임이에요.”
나는 번즈 백작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최대한 그의 요청을 이행해 줄 책임이 있다. 당연히 번즈 백작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신체적 시간적 문제가 없는 사람들을 골라 명단을 작성했단 말이다.
그런데 그 명단 전원이 거부했다고? 이건 진짜, 진짜 말이 안 된다. 예법 교사들의 명예뿐 아니라 소개해 준 내 명예에도 흠이 날 일이다.
이상한데. 나는 무조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엘버트 경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는 도박 문제가 있다. 처음부터 그가 귀족 자제들의 예법 교사가 된 것도 도박 때문이었다. 빚을 갚느라.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도박 문제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엘버트 경은 분명 빚을 갚기 위해 돈이 필요할 거고 번즈 백작의 요청을 반드시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엘버트 경도 거절했어요?”
혹시나 해서 묻자 번즈 백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엘버트 경이 명단에 포함된 사람이라면요.”
명단의 모든 사람이 거절했다고 했지. 내가 한숨을 내쉬자 그가 재빨리 말했다.
“죄송합니다. 무례하게 굴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응? 나는 그가 왜 사과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을 비꼬는 거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번즈 백작이 비난을 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명단에 적을 수 있는 사람은 전부 적었다. 애초에 번즈 백작의 예법 교육에 손을 떼고 싶어서 괜찮은 사람은 다 적었던 거다. 도박 문제가 있는 사람까지 넣었으면 말 다 했지.
남은 건 여자거나 나이가 너무 많은 사람뿐인데 번즈 백작이 십 대면 모를까 여자 교사들은 안 받아 줄 거다.
러스 교수님이 지금 어디 계시지? 나는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하는 분이 지금 수도에 있을지 떠올렸다. 칠십 대인 러스 교수님은 더 이상 학생을 가르치지는 않지만 나와 안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다. 아마 이 시기면 고향에 계실 것 같은데.
“이러면 어떨까요?”
번즈 백작이 입을 열었다. 아차. 나는 너무 오래 손님을 앉혀 놓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는데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 엘버트 경에게 가려는데 레이디 비스컨께서도 같이 가시죠.”
“지금요?”
갑자기 남의 집에 가면 안 된다. 내가 그 사실을 지적하기 전에 번즈 백작이 말했다.
“거절한 이유를 듣고 싶어서 오늘 방문하기로 했거든요. 사실, 전언만 남기고 바로 그분께 가려고 했습니다만.”
아, 그래서 집사에게 전언만 남기고 간 거구나. 그렇다면 심부름을 시킬 하인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길에 전언을 남긴 모양이다.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
“말을 타고 왔습니다.”
“제 마차로 가죠.”
나는 곧바로 말했다. 내가 번즈 백작의 말을 같이 탈 수는 없잖아?
“그러고 보니 친구분들이 방문한 게 아니었습니까?”
순순히 내 마차에 올라탄 번즈 백작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물었다. 가끔 여자의 마차를 같이 타는 걸 자존심 상해하는 남자들이 있는데 번즈 백작은 그런 타입은 아닌 모양이다.
이건 마음에 드네.
“친구는 아니고요.”
아니, 친구가 맞나? 줄리아는 굳이 따지면 내 동생이다. 나는 재빨리 말을 고쳤다.
“사촌 동생이죠. 사촌 동생의 친구가 고민이 있다고 찾아온 거예요.”
“사촌 동생이면, 에스컬레 양 말입니까?”
오, 알고 있네? 어떻게 아냐는 내 표정에 번즈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제게도 귀가 있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처음 번즈 백작을 만난 무도회장에서 그를 국왕 전하께 안내한 사람이 에스컬레 경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줄리아 에스컬레라고 사촌이에요. 나이 차가 좀 나지만 동생이나 마찬가지죠.”
우리의 나이 차는 자매보다는 이모와 조카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자매처럼 지내고 있다. 그러니까 큰 언니와 막냇동생 정도?
“나이 차가 나는군요.”
번즈 백작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말하더니 곧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친구분인 줄 알았습니다.”
이거 칭찬인가?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입바른 소리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번즈 백작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나는 그에게 칭찬 고맙다고 말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대신 로렌이 찾아온 이유를 간단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요. 로렌 리즈라고, 줄리아의 친구인데 자기 미래로 고민이 많은 모양이더라고요.”
“그럴 나이죠.”
덤덤한 번즈 백작의 반응은 이야기하기가 편했다. 그는 과도하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고 내 이야기에 부정적이거나 필요 이상으로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냐는 반응뿐이라 나는 저도 모르게 로렌의 고민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했다.
“꿈을 꿨다는데, 그 꿈 때문에 신경 쓰이는 모양이더라고요. 자기 인생이 꿈처럼 흘러가지 않게 하고 싶대요.”
“예지몽 말입니까?”
곧바로 번즈 백작도 예지몽을 입에 올렸다.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더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듯 물었다.
“레이디 비스컨께서는 꿈을 꾼 것이 현실로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에 자연스럽게 내 꿈이 떠올랐다. 번즈 백작이 오라버니와 어머니를 죽이던 꿈. 말도 안 되는 꿈이다.
처음엔 초조했다. 번즈 백작을 보는 게 무서웠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나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가느다란 믿음 같은 게 있었다. 만약 그가 나를 해칠 거라면, 저먼 경에게서 나를 구해 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예지몽이나 예언 같은 걸 이야기하시는 거라면 안 믿었어요.”
“과거형이군요.”
부드러운 지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안 믿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예언을 하는 예언자를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나와 로렌은 이상한 꿈을 꿨고 꿈에서만 본 사람을 실제로 만났다. 나는 번즈 백작을, 로렌은 자신을 정부 삼을 남자를.
물론 그다음부터는 좀 달라진다. 그러니 로렌의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렌의 입장이라면 다르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의상실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걸 테고.
“잘 모르겠어요. 당신은 어떤가요, 번즈 백작님.”
예언을 믿을까? 안 믿을 것 같다. 그가 믿었다면 용을 물리치러 가지도 않았겠지. 내 예상대로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래가 고정되어 있다고 믿냐고요? 아니요.”
그렇군. 나는 그의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예언이라는 건 미래가 고정되어 있기에 할 수 있는 행위다. 예언을 믿는다는 건 결국 미래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고.
“잠깐, 왼쪽으로 돌아가지.”
마차가 코너를 돌자 번즈 백작이 마부에게 소리쳤다.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깜짝 놀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가 어디지? 얼른 도로를 확인하자 엘버트 경이 사는 거리의 이름이 보였다. 아, 제대로 가고 있군.
내가 안도하자 번즈 백작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쪽 골목이 그리 좋은 길이 아니라서요.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가 가리킨 골목은 약간 좁고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뭐가 좋은 길이 아니라는 거지? 나는 고개를 틀어 골목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골목인데요?”
“레이디 비스컨께서는 모르시는 게 나은 곳입니다.”
나는 모르는 게 나은 곳이 뭘까.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많아서 가늠이 안 된다. 나는 골목 안쪽으로 걸어가는 두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뒷모습이 익숙한데.
“어?”
두 명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려 옆모습이 보이자 나는 깜짝 놀라서 물러섰다. 내가 본 얼굴이 그 얼굴이 맞나? 제대로 보기 위해 창문 밖으로 몸을 빼는데 갑자기 내 몸이 마차 안으로 휙 끌려갔다.
“유제니!”
깜짝이야. 정신을 차려 보니 번즈 백작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 뭐야? 나는 깜짝 놀라서 그의 반대쪽으로 튀어 올랐다.
“뭐, 뭐예요?”
왜 갑자기 사람을 끌어안아? 놀라는 나와 달리 번즈 백작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그는 약간 화난 것 같으면서 나를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잠깐, 저거 죄책감인가? 내가 그의 표정을 읽으려 애쓰는 사이 번즈 백작이 말했다.
“위험하잖습니까.”
“뭐가요?”
“창문 밖으로 나가려고 한 거 말입니다.”
창문 밖으로? 내가?
나는 이 남자가 제정신인가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번즈 백작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군. 내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민 행동이 창문에서 뛰어내리려고 한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릴 생각은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그냥…….”
아는 얼굴을 봤을 뿐이다. 내가 멈칫하자 번즈 백작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냥 뭡니까?”
“그냥, 아는 얼굴을 봤거든요.”
“아는 얼굴이라면……?”
내가 정확하게 본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인상을 쓴 채 내가 본 것을 차근차근 되새기며 말했다.
“어닝이요. 제 약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