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5 – 2
응?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나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묘한 시선을 주고받는 줄리아와 로렌을 보고 멈칫했다.
돈 때문에, 사랑 때문에 정부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때로는 출세하고 싶은 욕심에 지위가 높은 사람의 정부가 되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줄리아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녀의 꿈대로 그녀의 인생이 흘러갈 가능성은 작은 거 아닌가?
“원해서 정부가 되는 사람은 없어요.”
로렌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표정은 열여덟 살이 아니라 서른여덟 살쯤 돼 보여서 이번에는 내가 말을 잃었다.
“마스터슨 경은 제 드레스나 아카데미에 상당한 돈을 쓰고 있어요. 저는 빚을 지고 있는 거죠. 제가 그분이 원하는 걸 거부할 수 있을까요?”
무슨 말인지 알았다. 나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다물었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입 밖에 낼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생각을 고르고 골라 그중 하나를 입에 올렸다.
“마스터슨 경이 네가 세케이 경과 가까워지길 바라는 것 같니?”
로렌은 대답하기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가슴이 답답해져서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로렌이 왜 아카데미를 그만두려고 하는지 알겠다. 하지만 동시에 그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터슨 가는 리즈 가의 사업 실패로 꽤 힘들다고 들었다. 마스터슨 자작가는 몰락했고 그 방계만 간신히 명맥을 이어 가고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리즈의 삼촌인 루스트 마스터슨일 테고.
투자일까. 아니면 빚을 갚아 준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마스터슨 경은 세케이 경에게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 대가로 자신의 조카를 내놓는 거고.
기분이 확 나빠져서 나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세상에 나쁜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나쁜 사람들은 전부 신문이나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했을 뿐이다.
지금 이렇게 가까운 곳에 피해자가 있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잠깐.
나는 열린 창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모든 건 로렌의 꿈이다. 실제로 일어난 건 그녀가 마스터슨 경의 소개로 세케이 경을 만났다는 것밖에 없다.
“어?”
그때, 내 눈에 창밖으로 지나가는 번즈 백작이 들어왔다. 뭐야, 저 남자 왜 여길 지나가?
번즈 백작은 저쪽 길이 아니라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었다. 설마 남의 집 정원을 가로질러서 산책이라도 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데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오늘 번즈 백작이 집에 온다고 했나? 하지만 올리버는 약속이 있다며 아침 일찍 나갔다. 나는 모자를 벗고 인사를 건네는 번즈 백작에게 고개를 끄덕했다. 그리고 재빨리 몸을 돌려 로렌과 줄리아를 쳐다봤다.
내게는 손님이 있다. 이쪽이 먼저다.
“리즈, 네가 꾼 꿈이 예지몽일 가능성은 작지 않을까?”
내가 꾼 꿈과 마찬가지로 로렌도 예지몽을 꿨을 가능성은 작을 것 같은데. 갑자기 예언자가 둘이나 나타날 리도 없고.
아니, 셋이구나.
뿅 하고 머릿속에 얼마 전 왕궁 무도회에서 들은 예언자가 생각났다. 그 남자가 나를 납치했지. 다들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정작 나는 놀라울 정도로 충격이 없었다.
납치된 시간이 짧기도 했고 솔직히 말하면 납치된 충격보다 번즈 백작의 행동이 더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날 가장 피해가 적은 사람이 테토라고 들었다. 그는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이 부러지는 거로 끝났다고.
그 이상은 어떤지 모르겠다. 신나서 말하는 올리버를 어머니가 말린 뒤로 아무도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 주지 않았거든.
물론 나도 굳이 더 물어보지 않았다. 굳이 그들이 얼마나 다쳤는지 알아서 꿈자리가 뒤숭숭해지고 싶지 않았다.
“제 인생이잖아요.”
잠시 생각하던 로렌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레이디 비스컨께서 제 상황이라면 그냥 악몽이라고 넘기실 수 있나요?”
그건 그렇다. 나는 다시 로렌과 줄리아의 맞은편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나 역시 그녀와 비슷하게 행동했다. 번즈 백작과 가족들이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했고 그와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지.
나는 인상을 쓴 채 로렌을 멍하니 쳐다봤다.
나도 꿈과 다르게 행동하려고 애썼는데 로렌을 비난할 수는 없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네 계획은 뭐니?”
“네?”
“네 꿈이 예지몽이 아니게 되려면 다르게 행동해야 하잖아. 어떻게 다르게 행동할 건지 묻는 거야.”
말하면서 나는 스스로 내 꿈과 지금 상황이 다른지 반문했다. 다른가? 모르겠다. 곧이어 집사가 문을 노크하고 들어오더니 내게 다가왔다.
“손님이라면…….”
아까 번즈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남의 집 정원을 산책하기보다는 방문하는 중이었다는 게 더 그럴듯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손님을 만나고 있고 그는 연락 없이 갑자기 찾아왔다.
나는 번즈 백작이 찾아온 거라면 돌려보내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집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번즈 백작님께서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전언이라고? 내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자 빅스가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추천하신 분들이 전부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정신을 번쩍 차렸다. 추천서!
번즈 백작이 예절 교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명단을 적어 줬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걸로 부족할까 싶어 추천서도 적어서 보내 줬다. 내가 번즈 백작의 예절 교육을 맡았다는 소문이 났거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사에게 말했다.
“갔어요?”
“네, 전언만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붙잡아 줘요.”
말도 안 된다. 혹시라도 한두 명이 바쁘거나 할까 봐 일부러 다섯 명이나 적어 줬단 말이다. 그 다섯 명이 전부 거절했다고?
이건 엄청나게 무례한 일이었다. 추천한 내 책임이기도 하고.
나는 번즈 백작을 꼭 붙잡아서 데려와 달라고 집사에게 부탁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번즈 백작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일단 사과를 하고 추천한 사람들이 왜 거절했는지 확인한 뒤 일을 해결해야 한다.
“바쁘시면…….”
나와 빅스의 급박한 행동에 로렌이 말했다. 하지만 이쪽도 그냥 넘길 수 없다. 나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네 인생이 걸려 있잖아. 그래서 계획이 뭐니?”
“아카데미를 그만둘 생각이에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쳤는지 로렌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장사를 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뭘 해?”
“의상실을 할 거예요.”
어, 음.
나도 모르게 시선이 줄리아를 향했다. 너, 이거 알고 있었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줄리아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불안한 듯한 시선을 보고 나는 줄리아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그러니까 세케이 경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 달라는 건 핑계였던 거다. 로렌을 설득하기 위한.
뭐, 옷 가게를 한다는 것 자체는 나쁜 생각이 아니다. 옷은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거고 삯바느질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이 생계를 이어 가는 수단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리즈, 너 옷 만들 줄 아니?”
이거다.
분명 우리는, 그러니까 귀족 집안의 여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수 놓는 법을 배우긴 한다. 시간을 때우는 방법일 뿐 아니라 수를 예쁘게 놓는 건 귀족 아가씨의 기본 소양이기도 하거든.
하지만 수를 놓는 것과 옷을 만드는 건 전혀 다른 기술이다.
로렌은 여전히 당당한 표정이었다. 설마 아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아니요.”
그럼 안 되지. 옷 만들 줄 모르는데 어떻게 옷 가게를 하겠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했을 때, 로렌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 유행할 디자인을 알아요.”
“뭐?”
“그게 정말 예지몽이라면, 저는 앞으로 유행할 디자인을 전부 알고 있는 거예요. 두고 보세요. 올가을에는 격자무늬가 유행할 거예요.”
뭐라고?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로렌을 쳐다봤다. 그녀는 내 반응에 개의치 않고 어떻게 의상실을 할 건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실력은 좋지만 센스는 별로인 재봉사를 찾아 동업할 거라고 한다. 그녀가 꿈에서 본 유행하는 의상 디자인을 그려 주면 재봉사가 그대로 만들어서 파는 거다.
꽤 그럴듯한 계획에 내 입은 닫힐 줄 몰랐다. 줄리아를 쳐다보자 그녀는 로렌의 계획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괜찮은 계획이다. 그게 로렌의 생각대로 진행이 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설령 그대로 진행이 된다고 해도 내년이면 졸업하는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일을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나는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들이미는 집사를 발견하고 로렌과 줄리아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자. 우선 내가 세케이 경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게. 아카데미를 그만두는 건 그다음에 이야기해 보자.”
“의상실을 하는 데 꼭 아카데미를 졸업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다. 그런가?
나는 반사적으로 로렌의 말에 동의하려다 멈칫했다. 나도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아서 아카데미 졸업이 의상실을 하는 데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아는 게 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네 의상실에 찾아올 미래의 고객을 아카데미에서 만들어 둘 수 있지.”
아카데미는 부유한 평민과 귀족의 자식이 다닌다. 그들도 옷이 필요할 테고. 꼭 의상실만 고객이 필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귀족들이 아카데미에 자식을 보내는 거다.
교육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람을 사귀라고.
내 설득에 로렌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 로렌의 아카데미 자퇴는 막았다.
나는 로렌과 줄리아에게 마음껏 케이크와 차를 먹고 가라고 말한 뒤 응접실에서 빠져나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빅스가 나를 재빨리 큰 응접실로 안내했다.
“번즈 백작님.”
번즈 백작은 큰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작은 응접실 하나는 방금 내가 로렌과 줄리아를 만나는 데 썼으니 큰 응접실에 그를 안내한 모양이다.
스무 명이 들어가도 충분한 큰 응접실은 번즈 백작 혼자 있었는데도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람이 커서 그런가.
“레이디 비스컨.”
번즈 백작은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더니 내 손을 잡았다. 그가 허리를 굽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을 보자 이 남자가 대체 뭘 보고 다니는지 궁금해졌다.
이런 인사는 요즘 잘 안 한다. 왕족이나 고위 사제에게라면 모를까. 귀족 예법은 잘 모르는데 이런 옛날 인사는 능숙하게 하는 게 신기했다.
“혹시 공연 같은 거 좋아하세요?”
연극 같은 걸 본 게 아닐까. 역사나 전설을 이야기하는 거. 내 질문에 자세를 바로 한 번즈 백작은 멈칫하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유명한 거 몇 가지만요. 공연에 초대하시는 겁니까?”
실수했네. 누가 들어도 방금 전 내 질문은 공연에 초대할 것 같은 질문이었다. 나는 완곡하게 말했다.
“괜찮은 공연이 있으면 연락 드릴게요.”
번즈 백작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잠깐, 그렇게 좋아하면 죄책감이 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