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7/239)

18화. 5 – 1

“유제니, 듣고 있어요?”

어, 뭐라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줄리아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쳐다봤다.

느닷없이 차를 마시러 와도 되냐고 편지를 보냈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친구까지 한 명 데려왔다. 물론 그건 괜찮다. 줄리아와 이야기하는 건 즐겁고 그녀가 데려온 로렌이라는 친구도 괜찮은 사람 같거든.

문제는 나다. 나는 아직도 어제 겪은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 미안.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내 사과에 줄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에스턴 가에서는 뭐래요? 설마 유제니한테 화낸 건 아니죠?”

고작 어제 일어난 일임에도 제이크가 한 짓과 당한 짓은 벌써 사교계에 소문이 다 난 모양이다. 하긴, 대낮에 대로에서 그 난리를 쳤으니 소문이 안 났을 리가 없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다. 내가 신경 쓰는 건 제이크가 아니라 번즈 백작이었다. 엘리엇 번즈.

“아냐. 오히려 그쪽에서 사과해 왔어. 번즈 백작에게도 사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번즈 백작이 정말 에스턴 경을 죽이려고 했어요?”

그것도 소문이 났구나. 평소라면 줄리아가 내게 소문을 이야기해 주는데 요즘은 어째 처지가 바뀌어 있다. 그리고 그 소문의 가장자리쯤에 내가 위치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달갑지 않다.

“음, 죽이려 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머릿속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살인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끔찍한 말이다. 내가 꾼 꿈까지 더하면 정말 오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인 모양이다. 줄리아가 신이 나서 말했다.

“유제니를 위해서라면 죽일 수 있다고 했다면서요?”

그것까지 알다니, 대체 누구에게 들은 거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줄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앤이나 커슬이겠지. 아니면 그 두 명에게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거나.

앤은 그 말을 아주 좋아했다. 심지어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너무 놀라 있으니까 위로하려고 한 말이지.”

두 번 낭만적이었다간 연쇄 살인마가 탄생하겠다.

나는 담담하게 말하고 더 이상 이 주제를 이어 가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꺼림칙하다. 그 꿈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와 번즈 백작은 잘 아는 사이도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왜 그런 소리는 하냐고.

“내게 물어볼 게 있다고 들었는데?”

주제를 바꾸자는 내 태도에 줄리아와 로렌의 시선이 부딪쳤다. 두 사람은 서로 먼저 말하라는 듯 눈짓하더니 줄리아가 입을 열었다.

“혹시 세케이 경이라는 사람, 알아요?”

세케이 경? 잘 모르는 이름이다. 아니, 잠깐. 세케이 백작이라면 안다. 나이가 꽤 있는 분인데. 세케이 경이라면 그분의 아들이거나 조카일 것이다.

“세케이 백작이라면 아는데.”

딱히 사교계에 활발하게 활동하는 분은 아니다. 영지가 있는 귀족은 사교 시즌을 제외하면 자기 영지에 머무르는데 가끔 사교 시즌에도 영지에만 머무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 나이가 있는 남자들이고 그중에 아버지도 포함돼 있지.

“그 사람이 왜?”

내 질문에 다시 줄리아와 로렌의 시선이 부딪쳤다. 아, 뭔데? 나는 두 사람을 재촉하지 않기 위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세케이 경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 줄 수 있어요?”

“어떤 사람?”

줄리아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 달라니, 너무 포괄적이다. 이런 건 보통 목적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면 구혼을 받았는데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이성 문제는 없는지, 집안은 어떻고 빚은 얼마나 있는지 같은 걸 말한다.

하지만 로렌과 줄리아는 열여덟 살이고 아직 아카데미를 졸업하려면 일 년 남았으니 구혼 문제는 아닐 것 같은데.

아닌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 사람이 너나 리즈 양에게 구혼을 했니?”

그 순간 로렌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어, 뭐야? 나는 그녀의 무례한 태도에 놀라 멈칫했고 로렌은 재빨리 사과했다.

“죄송해요. 레이디 비스컨을 비웃은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비웃은 건 맞는다는 거군. 어느 부분을 비웃은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케이 경을 어떻게 아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니까 물어봤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아느냐다.

내 질문에 로렌과 줄리아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다, 내게 이유를 말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보통 두 가지다.

상대방이 비웃을까 봐, 아니면 혼날까 봐.

“에스컬레 경이 아셔야 하는 일이니?”

나는 이번에는 줄리아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혼날 일이라면, 그중에서도 줄리아의 아버지인 에스컬레 경이 알아야 할 일이라면 나는 손 뗄 거다.

에스컬레 경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요.”

아버지에게 말할까 봐 걱정됐는지 줄리아는 재빨리 대답했다. 흠, 정말 에스컬레 경이 알아야 할 일인지 몰라도 될 일인지는 들어야 할 수 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망설이던 로렌이 입을 열었다.

“제 친척이 누군지는 아시죠?”

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슨 경이라고 들었다. 아마 마스터슨 자작가의 방계겠지. 마스터슨 가는 불행한 사건으로 크게 휘청인 뒤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불행한 사건이라는 건 리즈 가와 마스터슨 가가 동업하던 사업이 아주 크게 실패했다는 거고. 굉장한 타격이었다고 들었다. 어릴 때였는데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걱정하시던 기억이 나거든.

당시에는 리즈 상회가 그렇게 파산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리즈 상회는 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리즈 가에서 가지고 있던 사업이고.

동업하던 두 가문이 파산으로 휘청이고 둘 다 회복을 못 하고 있다면 두 가문의 사이가 좋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 와중에 로렌을 마스터슨 경이 돌봐주고 있으니 다들 마스터슨 경이 대단히 관대하다고 생각할 테고.

“얼마 전에 루스트 삼촌과 무도회에 갔다가 세케이 경을 소개받았거든요.”

그런데? 나는 아무 말 없이 로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루스트 삼촌이란 루스트 마스터슨 경을 말하는 걸 테지. 삼촌과 같이 있는데 세케이 경이 로렌에게 이상한 짓을 했을 리 없다.

“이건 그냥, 그러니까 그냥 제가 너무 기분이 이상해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사실 며칠 전에 제가 꿈을 꿨는데요.”

“꿈?”

꿈이라는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꿈이라고? 머릿속에 내가 꾼 꿈이 떠올랐다.

같은 꿈을 꿨을 리는 없다. 하지만 꿈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이 신경 쓰인다니, 나와 좀 비슷한 상황이다.

“꿈에서 제가, 그, 세케이 경의 정부로 살았거든요.”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 버렸다. 뭐로 살아? 정부?

아카데미 졸업도 안 한 열여덟 살짜리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 끔찍한 단어다. 게다가 정부를 본 것도 아니고 정부가 되는 꿈을 꾸었다고?

내 표정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었는지 로렌은 재빨리 변명하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꿈이에요. 별다른 의미는 없을 거예요. 제가 그 며칠 전에 커런트의 속삭임을 너무 열심히 읽어서 그런 꿈을 꾼 건지도 몰라요.”

“그럴 거야. 근데 너무 찝찝하잖아. 그래서 찾아온 거예요.”

불쑥 끼어든 줄리아가 로렌을 위로하더니 내게 고개를 돌렸다. 뒷말은 내게 한 말인 모양이다.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멍하니 로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와 상황이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내 꿈은 번즈 백작이 내 가족을 모두 죽이는 거였고 로렌은 세케이 경의 정부가 된다는 것뿐이다.

“그, 그러게. 커런트의 속삭임을 너무 열심히 읽은 모양이네.”

나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나랑 비슷한 꿈을 꿨는데? 이거 그냥 우연인가?

“그냥 악몽인 것 같지만요. 꿈이 너무, 현실적이었거든요. 게다가 세케이 경을 소개받은 것도 꿈이랑 너무 똑같아서요.”

그래서 세케이 경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건가? 자기가 정말 세케이 경의 정부가 될까 봐?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정부가 되고 말고는 로렌의 선택이다. 그녀가 안 하면 되는 거잖아?

“세케이 경이 정부를 둘 만한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거니?”

내 질문에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로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로렌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단순한 악몽이라고 말한 것과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세케이 경이 어떤 사람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로렌!”

로렌의 말에 줄리아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세케이 경에 대해 알아봐 달라는 건 로렌의 부탁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차를 홀짝이며 로렌과 줄리아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저도 바보 같은 꿈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악몽이라고, 며칠 전에 너무 자극적인 기사를 읽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무도회에서 마스터슨 경에게 세케이 경을 소개받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꿈에서 본 광경과 똑같았다고 한다.

“그게 만약 예지몽이라면, 저는 제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아요. 세케이 경의 정부로 이십 대를 날리고 삼십 대가 되면 세케이 경이 저를 만도 백작에게 넘길 거예요.”

“만도 백작? 잠깐, 어거스트 만도 백작?”

익숙한 이름에 나는 깜짝 놀라서 끼어들었다. 어거스트 만도 백작은 내 아버지뻘이다. 심지어 나는 만도 백작 부인에게 초대장을 받았다. 며칠 후에 만도 저택에서 열리는 무도회 초대장이다.

“칠십 대에 이쪽에 점이 있는 할아버지예요.”

정확하다. 아니, 나이는 좀 다르다. 만도 백작은 이제 오십이니까. 하지만 로렌이 삼십 대가 된다면 만도 백작은 칠십 대가 되겠지.

“맞군요.”

내 반응에 로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모습을 안다. 나도 그랬다. 번즈 백작을 처음 봤을 때.

“전 세케이 경이 어떤 사람인지 관심 없어요. 그와 엮이고 싶지도 않고요. 원래는 아카데미를 그만두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내가 말렸어요. 그냥 악몽이라고.”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는 거다. 세케이 경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려고. 정부를 둘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로렌의 꿈은 예지몽이 아니라 그냥 악몽이 되니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로렌과 줄리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리즈. 나는 너를 잘 몰라. 하지만 네가 이렇게까지 걱정한다면 네가 누군가의 정부가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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