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4 – 3
높은 교육 수준을 영위한 사람치고는 제이크의 수준은 처참하다. 심지어 그는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갑자기 말을 돌려? 아버지를 공격한 게 너지?”
“공격이요?”
구석에 숨어 있던 앤이 깜짝 놀라서 끼어들었다가 제이크가 자신을 노려보자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제이크.”
나는 ‘짝’ 하고 손뼉을 쳐서 제이크의 시선을 내게로 되돌려 놓았다. 앤은 그냥 나를 수행해 줄 뿐이다. 며칠 전에 나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이번에 또 고생하게 할 수는 없다.
“그거 물어보려고 쫓아온 거야?”
다시 말하지만, 제이크에게는 여기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거다. 예를 들면 자신이 못되게 군 어머니에게 사과하는 거라거나. 아니면 슬픔에 빠져 있을 어머니 곁에 있어 주는 거라거나.
하다못해 집 안에서 남편이 습격받았다는 사실에 두려움에 떠는 어머니를 위해 집에 머무른다거나.
어째 선택지가 전부 어머니를 위한 일이긴 한데 이건 어쩔 수 없다. 제이크는 에스턴 자작 부부의 하나뿐인 자식이고 후계자다. 만약 자작님이 이대로 사망한다면 제이크가 가주가 된다. 그러니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척이라도 하란 말이다.
하지만 그 둘 중 하나라도 한다면 내가 제이크의 구혼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봤겠지. 듣자마자 웃음을 터트리는 게 아니라.
나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짓는 제이크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아카데미 교육 수준이 높은 거 맞아?
“진심이야, 제이크 에스턴? 내가 무도회 중에 네 아버지를 공격했다고?”
어이없어하는 내 질문에 제이크의 눈동자가 굴렀다. 어깨 위에 올려둔 게 장식이 아니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하는 게 좋지 않겠어?
“네가 계단 아래에 있었다며?”
뭐라고? 나는 제이크의 자신 없는 질문에 인상을 썼다. 계단 아래라니, 어느 계단?
“계단? 설마 어제 하인에게 위층을 확인해 보라고 말한 거로 이러는 거야?”
설마가 사실이었나 보다. 내 질문에 제이크의 얼굴이 자신만만해졌다. 그는 아까 전의 자신 없는 태도와 달리 이번에는 당당하게 외쳤다.
“그래! 네가 아버지를 공격한 거지? 그러니까 거기 있었던 거야!”
맙소사. 이제는 정말로 에스턴 자작가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정말 괜찮은 거야? 하나뿐인 후계자가 이런 멍청한 놈인데?
나는 제이크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내가 정곡을 찔려서 말을 잃었다고 생각했는지 제이크가 신이 나서 말했다.
“당장 치안관에게 가서 네가 범인이라고 자백해!”
“진심이야?”
나는 제이크가 일부러 바보처럼 구는 걸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물었다. 물론 그 희망은 순식간에 박살 났다.
“그럼 내가 장난하려고 여기까지 널 쫓아왔겠어? 이봐, 마부! 마차 돌려!”
“아가씨.”
제이크의 난동에 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어쩌냐는 앤의 질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제이크에게 말했다.
“진짜로 내가 자작님을 공격해서 의식 불명 상태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 질문에 제이크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앤을 돌아보고 그녀 역시 어이없어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행이군. 순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의 물리력 같은 게 바뀐 줄 알았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제이크 에스턴, 진심이야? 내가 자작님을 공격해서 의식 불명 상태로 만들었다고? 그리고 나는 이렇게 멀쩡하고?”
상식적으로 두 사람이 다퉈서 한 명이 큰 상처를 입으면 상대방도 약간의 상처라도 입어야 한다.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체격이 더 좋다면 쓰러질 확률은 체격이 더 작은 쪽으로 기운다.
그러니까 내가 에스턴 자작님을 공격해서 의식 불명으로 만들고 나는 멀쩡하게 돌아다닐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건, 그건…….”
내 지적에 그제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는지 제이크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하지만 그는 금세 화를 벌컥 내며 소리쳤다.
“공범이 있었겠지?”
공범이라는 단어를 안다는 거에 놀라야 할지, 그런 쪽으로 머리가 돌았다는 거에 놀라야 할지 모르겠네.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리는데 뒤에서 앤이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어쩌면 좋아.”
꽤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에스턴 자작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앤의 한탄이 너무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하나뿐인 후계자가 저 지경이니 에스턴 자작가도 정말 큰일이다.
“왜 웃어?”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앤의 반응이 너무 웃겨서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그걸 제이크가 본 모양이다. 그는 내가 자신을 비웃었다고 생각했는지 벌컥 화를 내며 마차를 흔들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많이 흔들린 건 아니었다. 나와 앤, 마부인 커슬까지 세 명이 탄 사륜구동 마차니까.
하지만 마차가 가볍게 흔들거리자 마부가 깜짝 놀라서 제이크를 말리기 시작했다. 앗, 안 되는데.
나는 마부가 제이크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놀라서 마차에서 뛰어나왔다. 제이크는 유명하다. 성격이 나쁜 거로.
자기 부모님께도 그렇게 구는 놈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보지 않아도 뻔하다. 사실, 나는 몇 번 봤다. 그가 자기 집 하인을 때리는걸.
“넌 뭐야!”
아니나 다를까 제이크는 자신을 말리러 달려온 커슬을 확 밀어 버렸다. 그리고 그에게 화풀이를 하려는 듯 발을 들어 올렸다.
“커슬!”
제이크가 자기 집 하인들에게 못되게 구는 것까지는 내가 어찌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 집 하인들에게는 감히 그렇게 굴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있는 힘껏 제이크를 밀어 버렸다. 다른 때라면 내 힘으로 제이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커슬을 걷어차려고 한쪽 발을 들어 올린 상태였고 내가 밀어 버리자 그대로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악!”
비명과 함께 제이크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지자 무슨 일인가 하고 이쪽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커슬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괜찮아요?”
“아이고, 아이고, 괘, 괜찮습니다.”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커슬은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있었다. 허리를 다치기라도 했으면 큰일이다. 나는 앤에게 커슬을 부축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다.
내가 직접 마차를 끌고 집으로 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때 넘어졌던 제이크가 시뻘게진 얼굴로 일어나서 소리쳤다.
“이, 이 미친…….”
“거기까지.”
그 순간, 마치 마법처럼 제이크의 뒤로 번즈 백작이 나타났다. 진짜로 마법 같았다. 분명 없었는데 어느 순간 나타나 있었으니까.
나는 갑자기 나타난 번즈 백작과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지는 제이크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제이크의 얼굴은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붉어졌다. 그리고 그건 번즈 백작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고.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제이크의 목을 쥔 채 번즈 백작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냉기가 흐를 것처럼 싸늘하던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한 순간 부드러워졌다.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그냥 레이디 비스컨이에요.”
번즈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나를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압니다.”
그때, 제이크가 몸부림을 치며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와 번즈 백작 사이에 있던 뭔가가 깨졌다.
“레이디 비스컨을 모시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게.”
번즈 백작은 커슬을 향해 말했다. 미안한데, 커슬이 날 모시고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커슬을 부축해서 들어가야 한다.
나는 앤을 불러 커슬을 마차 안쪽으로 데려가라고 말하고 번즈 백작에게 말했다.
“그만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이제 제이크의 얼굴은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번즈 백작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제이크 말이에요”
“으윽!”
그 순간, 제이크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엄마야. 나는 흠칫 놀라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번즈 백작에게 말했다.
“에스턴 자작님과 사업을 한다면서요. 그의 후계자를 죽여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은데요.”
“아.”
그제야 번즈 백작은 자신이 목을 쥔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는 제이크의 얼굴을 살피더니 말했다.
“에스턴 자작과 별로 안 닮았군요.”
그야 사람 얼굴이 보라색이면 누구와도 닮아 보이기 어려울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드디어 번즈 백작이 손을 놓았다.
죽은 거 아니겠지?
그대로 제이크가 바닥에 털썩 쓰러지자 나는 재빨리 그의 옆에 주저앉아 제이크가 숨을 쉬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러자 번즈 백작이 내 팔을 움켜잡았다.
“실례.”
내가 쳐다보자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내 팔을 놓았다. 뭘 한 거지? 어리둥절해하는데 번즈 백작이 제이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확인하실 필요 없습니다.”
“콜록, 콜록.”
번즈 백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이크가 기침을 하며 몸을 움직였다. 다행이군.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번즈 백작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자가 당신께 중요한 사람입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도 걱정이 될 정도로요?”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번즈 백작의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어이없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번즈 백작이 오해하는 건 괜찮지만 내가 제이크를 애틋하게 여긴다고 착각하는 건 문제다. 나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뭔가 크게 오해를 하시는 군요, 번즈 백작.”
번즈 백작의 눈동자에 이채롭다는 빛이 떠올랐다. 나는 구경하는 사람 중 심부름꾼으로 쓸 만한 아이를 부르며 말을 이었다.
“난 제이크가 아니라 당신을 걱정한 거예요. 대로에서 살인자가 돼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에스턴 자작가에 제이크를 데려가라고 사람을 보내야 한다. 심부름을 하겠다고 온 아이에게 지시하고 고개를 돌리자 번즈 백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방금 내가 비꼰 걸 이해를 못 했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레이디 비스컨. 저는 얼마든지 살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