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4 – 2
“제이크.”
나는 제이크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건넸다. 약간 왜소한 체격의 에스턴 자작과 달리 제이크는 그의 어머니를 닮아 체격이 좋다.
그건 참 다행이지. 아, 물론, 이건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거다.
“너야?”
제이크는 응접실로 들어오며 느닷없이 물었다. 나는 질문 내용보다 그의 거친 말투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뭐가?”
“제이크!”
내가 되물어보는 것과 동시에 에스턴 자작 부인이 깜짝 놀라서 제이크를 힐난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인 걸까. 나는 적대적인 포즈를 취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손을 허리에 얹거나 가슴 앞에 팔짱을 끼지 않았다는 말이다.
“유제니는 우리를 위해 와 준 거야. 그러니 건방지게 굴지 마라.”
“건방이요? 어머니, 참 태평한 말씀을 하시네요. 아버지가 오늘내일하는데 말이죠.”
이게 문제다.
나는 손님 앞에서 자기 어머니에게 건방지게 구는 제이크의 태도에 반응하지 않으려 애썼다. 부유한 에스턴 자작가의 후계자임에도 제이크가 아직 약혼하지 못한 이유.
그리고 내가 그의 구혼을 거절한 이유는 바로 이거였다.
제이크 에스턴은 싸가지가 없다.
“자, 말해 봐, 유제니. 내 아버지를 어떻게 공격했지? 아주 야무지게도 때렸던데?”
“제이크!”
자작 부인의 힐난에 제이크가 자신의 어머니를 노려봤다. 그는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자작 부인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조용히 계세요. 그놈의 무도회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아버지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요?”
오, 맙소사.
이런 상황에 끼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지금 여기는 너무 끔찍했다. 에스턴 자작 부인은 수치심과 상처로 새하얗게 얼룩졌고 하인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제이크 에스턴은 그냥 싸가지 없는 게 아니었군.
나는 자작 부인에게 동정하는 시선을 보내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자신의 망나니 아들이 손님 앞에서 이딴 짓을 하고 있다니.
동정심이 너무 커서 분노가 잦아들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이크를 쳐다봤다.
“다, 다 내 탓이야.”
“에이, 씨.”
자작 부인이 눈물을 보이기 시작하자 제이크는 짜증 난다는 듯 욕을 내뱉더니 떠나 버렸다.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자작 부인을 위로했다.
“괜찮을 거예요.”
제이크를 보고 나자 우리 집 말썽꾸러기는 그나마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적어도 올리버는 어머니께 그따위로 말하지는 않으니까.
나는 에스턴 자작 부인의 등을 문지르며 그녀를 위로했다. 이런 일이 꽤 흔한지 제이크가 떠나자마자 하인들이 따듯한 차와 손수건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남의 가정사를 본다는 건 그리 달갑지 않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눈물을 닦아 낸 자작 부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구나, 유제니.”
부끄러운 모습이다. 올리버가 손님들 앞에서 어머니께 저따위로 행동했다면 나는 그날 밤 잠자는 올리버의 목을 졸랐을 거다.
하지만 더 이상 자작 부인을 수치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해해요. 아버지가 의식이 없으시면 누구라도 제정신이 아닐 테니까요.”
내 위로에 에스턴 자작 부인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안다. 제이크의 저 행동은 아버지가 걱정돼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그는 원래 저런 놈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말하면 자작 부인의 수치심이 조금이라도 덜어지겠지.
다행히 자작 부인은 내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
“네가 제이크의 구혼을 거절해서 다행인지 안타까운지 모르겠구나.”
나는 말없이 웃었다. 제이크의 구혼을 거절하고 우리 집과 에스턴 자작가의 사이가 잠시 서먹해졌었다. 다행히 양 집안의 노력으로 다시 가까워지긴 했지만.
두 집안이 다시 가까워지는 데 제이크가 무슨 노력을 했냐는 질문이 들어온다면 그가 어제 무도회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는 거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우리 집 하인 말로는 네가 어떤 남자를 봤다고 했다던데.”
그녀는 나와 함께 이 층으로 올라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어디서 남자를 만났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물론 어쩌다 그 남자를 만났는지는 적당히 둘러댔다. 줄리아가 보이지 않아서 찾으러 다녔다는 소문이 나서 좋을 게 없으니까.
“그래서 하인에게 위층을 확인해 보라고 했어요. 저는 그 남자가 뭔가를 훔치려 하거나 밀회를 즐기려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남자와 부딪친 장소에 와서 자작 부인과 따라오는 하녀에게 말했다. 자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하녀가 조용히 물러났다.
“여기서 이상한 남자를 만났다는 걸 혹시 다른 누군가에게 말한 적 있니?”
누군가에게 말했냐고? 자작 부인의 질문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들은 자기 집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이 비밀로 하고 싶어 한다. 당연히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부인의 무도회에서 어떤 남자가 도둑질을 하는 거 같다고 떠들어 댔냐는 말씀이세요?”
나는 부드럽게 지적했다. 그런 짓을 하는 사람도 무례하지만 그랬냐고 묻는 것도 무례하다. 다행히 자작 부인은 내 지적에 얼굴을 붉히더니 재빨리 변명했다.
“미안하다, 유제니. 사실, 오늘 아침에 치안관이 왔거든.”
“치안관이요?”
부르는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어느 도시나 치안을 관리하는 기관이 있다. 수도에는 치안관이 있지만 치안관이 귀족이 사는 동네에 오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가 치안관을 신뢰하지 않는다거나 무시해서가 아니다. 치안관이 집에 온다는 건 그 집에 불명예스러운 일이 발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싸움이 일어났다거나 도둑이 들었다거나.
어느 쪽이나 귀족 집안에서는 알려지는 게 달갑지 않은 일이다. 당연히 대부분 귀족은 조용히 해결하려 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친분이 있는 기사에게 연락하거나 더 상급 기관인 수사관에게 연락한다.
“누가 신고했대.”
자작 부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내며 속삭였다. 자작님이 공격을 받았다고 누군가가 치안관에게 신고를 했다는 말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중 누구도 신고를 했을 리 없다. 나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가 재빨리 물었다.
“하인들이 신고한 거 아니에요?”
“아니야. 오늘 아침에 신고가 들어왔다는데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이 집에서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이미 자작 부인은 집사를 시켜 확인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신고자는 외부인이 된다. 나는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 치안관은 무슨 신고를 받고 왔대요?”
그게 중요하다. 에스턴 자작가에 도둑이 들었다는 신고인지 자작이 공격을 당해 의식 불명이라는 신고인지.
자작 부인은 내 질문을 듣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속삭였다.
“맙소사.”
후자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데 누구에게 들릴세라 속삭였다.
“남편이 누구와 크게 다퉜다고…….”
과연, 그렇게 신고가 들어간 거군. 당연히 하인들을 확인했을 거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나를 의심한 거고.
신고자는 치안관이 자작님의 상태를 확인하도록 콕 집어서 신고를 했다. 그렇다면 그 신고자가 가장 의심스럽다.
“유제니, 고맙다. 네 덕분에 제이크를…….”
내 손을 잡고 그렇게 말하던 자작 부인이 멈칫했다. 제이크를? 나는 그녀를 쳐다보고 물었다.
“치안관이 제이크를 의심하는군요?”
자작 부인의 얼굴에 실수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군. 그래서 아까 제이크가 내게 적대적이었던 거다. 아버지를 공격한 범인을 찾아야 자신의 누명을 벗을 수 있으니까.
잠깐, 그게 진짜 누명이긴 한가?
나는 자작 부인에게 부디 지금 들은 이야기는 비밀로 해 달라는 신신당부를 듣고 에스턴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에스턴 자작님을 만나 보고 싶었지만, 여전히 의식 불명이라는 말에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 물론 자작님이 의식 불명이라는 것도 비밀로 해 달라는 부탁을 들었고.
“아가씨, 아가씨.”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나는 과연 제이크가 자작님을 공격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가 어머니인 자작 부인에게 어떻게 구는지 봤다. 어머니에게 그렇게 구는 자가 아버지에게는 순종할까?
골똘히 생각하느라 나는 마부가 나를 부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창문을 열고 왜 그러냐고 묻자 마부가 말했다.
“뒤에서 누가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뒤에서? 뒤를 확인하자 마부의 말대로 누군가가 내 마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런 시내에서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나는 말을 타고 나를 쫓아오는 사람이 제이크라는 것을 확인하고 인상을 썼다.
“그냥 가요, 아가씨.”
앤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마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나도 그냥 무시하고 가고 싶다. 하지만 저러다가 누가 제이크의 말에 치여 크게 다치면 죄책감이 들 것 같다.
물론 제이크만 다친다는 보장만 있다면 얼마든지 무시할 용의가 있지만.
“제이크.”
마차가 멈추고 제이크가 다가오자 나는 마차 창문을 열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까의 실례를 사과한다면 관대하게 받아 줄 수 있다.
하지만 제이크 에스턴은 제이크 에스턴이었다. 그는 사과는커녕 말에서 펄쩍 뛰어내리더니 마차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유제니 비스컨!”
“엄마야!”
덕분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람. 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내 이름을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내 비난에 제이크가 잠시 멈칫했다. 그는 내 비난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물었다.
“너지? 네 짓이지?”
확신하건대 제이크는 국어 점수가 형편없을 거다. 아, 물론 다른 수업 점수는 높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카데미의 교육 수준이 높다고 들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