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4 – 1
줄리아 에스컬레는 평범한 소녀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상관없이 말이다.
그녀는 유제니 비스컨처럼 상급 귀족도 아니었고 에스턴 자작처럼 부자도 아니었으며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만, 로렌 리즈처럼 눈에 띄는 미인도 아니었다.
심지어 엘리엇 번즈처럼 아카데미 시절에 어떤 한 가지 분야에서 빛나는 천재성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했다.
때문에 사람들은 줄리아를 검은 늑대 기사단의 단장인 에스컬레 경의 딸이라고 기억하곤 했다. 그건 열 살의 줄리아에게는 꽤나 특권이었다. 수도 어디를 가도 로인 에스컬레 경의 딸이라고 하면 그녀를 알은척해 줬으니까.
하지만 열여덟 살의 줄리아는 다르다. 그녀는 아버지가 에스컬레 경이라는 게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나 무도회에서 아무도 그녀에게 춤을 청하지 않을 때라면 말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에스컬레 경이라 한심한 놈들이 안 붙는 건 좋잖아.”
샌드위치를 먹던 아이다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녀도 며칠 전에 무도회에 다녀왔다. 줄리아보다는 좀 낫긴 했지만, 아이다도 그리 마음에 드는 무도회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춤을 권유한 남자는 세 명이었는데 셋 다 나이가 너무 많거나 기분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아이다는 줄리아가 부러웠다. 적어도 줄리아는 그녀의 뒤에 기사단장이라는 아버지가 있으니까.
“한심한 놈이 문제가 아냐. 이러다가 연애는 한 번도 못 하겠어.”
줄리아는 자기 몫의 오믈렛을 먹으며 투덜거렸다. 아카데미에서도 그녀는 유명하다. 정확히 말하면 에스컬레 경이 유명하다.
가끔 아카데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습을 하기도 하는 데다가 아카데미 학생 중에는 기사단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너는 어때, 로렌? 너도 이틀 전에 무도회에 다녀왔잖아.”
아이다는 투덜거리는 줄리아의 손을 토닥이며 로렌에게 물었다. 세 사람은 방학일 때도 만나서 식사를 할 정도로 친하게 지내지만 모든 계급이 다니는 발시안 아카데미의 학생답게 입장은 다 달랐다.
작위나 영지는 없지만 그래도 귀족의 둘째인 아버지 덕에 귀족 사회에 속한 줄리아. 귀족은 아니지만 부유한 상인 집안인 아이다.
그리고 몰락 귀족으로 후견인의 도움이 아니면 아카데미에 들어올 수 없었을 로렌.
“로렌, 괜찮아?”
줄리아는 아까 전부터 로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물었다. 무도회 이야기라면 이전에도 몇 번이나 했다. 게다가 로렌은 후견인의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 후견인이 먼 친척인 데다가 꽤 여유 있어서 오히려 줄리아보다 더 많은 드레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무도회 때문에 그녀의 표정이 안 좋은 건 아닐 거다.
“나…….”
로렌은 거의 손대지 않은 자신의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며칠 전부터 입맛이 없어서 먹는 둥 마는 둥 한 탓에 그녀는 방학 전보다 좀 말라 있었다.
“나 아카데미를 그만둘까 해.”
느닷없는 로렌의 폭탄선언에 줄리아와 아이다의 눈이 동그래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로렌에게 고개를 돌려 제각각 설득과 위로를 하기 시작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만둔다니? 왜? 혹시?”
후견인이 더 이상 후원을 안 해 준다고 하는 건가? 아이다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거라면 해결할 수 있다. 그녀가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로렌을 후원해 달라고 하면 된다.
물론 로렌은 거절하겠지만 거절하게 둘 아이다가 아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로렌은 두 친구의 걱정에 입을 다물었다. 어제 밤새도록 그녀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내린 결론이 그거였다.
아카데미를 그만두자.
정확하게는 지금 그녀를 후원해 주는 마스터슨 경에게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걸 친구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로렌은 긴 침묵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말을 안 믿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그녀도 믿지 못했으니까.
로렌의 말에 아이다와 줄리아의 시선이 부딪쳤다. 두 친구 앞에서 로렌은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내가 꿈을 꿨거든.”
* * *
줄리아를 찾느라 너무 긴장한 탓인지 에스턴 자작의 무도회에 다녀온 다음 날 나는 늦게까지 침실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고, 힘들다. 무도회용 구두를 신고 그 넓은 에스턴 자작의 저택을 돌아다녔더니 다리도 아팠다.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긴 의자에 앉아 다리를 올렸다.
오늘도 더울 것 같다. 열어 둔 창문으로 벌써 후덥지근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날 뜨거운 차라니, 갑자기 리사가 보고 싶어지네.
집에 놀러 가도 되는지 편지를 써 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내 대답도 듣기 전에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앤? 무슨 일 있어?”
급하게 들어온 앤은 내게 빠르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에스턴 저택이 문제가 생겼대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렇게 물어보려던 찰나, 머릿속에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그 남자. 하인용 계단에서 내려왔을 거라고 예상되던 남자.
나는 그때 하인에게 위층을 확인해 보라고 말했다. 부디 나와 부딪친 남자가 단순히 밀회 장소를 찾은 거이길 바라면서.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다리야. 근육통 때문에 인상을 쓰는 사이 앤이 나를 위해 옷을 가져왔다.
이윽고 밖에서 집사가 다가와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에스턴 자작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어젯밤 일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합니다만.”
옷을 갈아입고 응접실로 내려와 보니 이미 어머니는 자작가에서 나온 심부름꾼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문 앞에 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바닥을 들어 오지 말라는 시늉을 하더니 심부름꾼에게 말했다.
“그래서, 자작님이 내 딸에게 원하는 게 정확히 뭐지?”
나이가 지긋한 심부름꾼은 어머니의 질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그러나 당당하게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그저 레이디 비스컨과 이야기를 하고 싶으실 뿐입니다.”
“그렇다면 자작님이 직접 오셨겠지. 내 딸이 오기를 바란다면 목적을 정확히 알아야겠네.”
내가 자작가로 가길 바란다고? 왜?
나는 어머니와 심부름꾼의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가만히 서 있었다. 도둑이 든 일로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자작가에서 사람이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나를 오라고 한다는 건 무례한 행동이다. 그러니 어머니께서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거고. 결국,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심부름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사실은 자작님께서 보내신 게 아닙니다.”
“그렇겠지.”
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자작님이라면 나를 오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다. 내가 도둑들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누가 나를 오라고 하는 거지?
나는 어느새 숨을 죽이고 응접실 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건 내 이야기니까 엿듣는 게 아니라고 합리화를 하면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님. 사실, 어제저녁 자작님께서는 습격을 받아서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뭐라고?”
누구 입에서 나온 소린지 모르겠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가 “뭐라고”라는 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내 바로 뒤에 올리버가 서 있었다.
“쉿.”
올리버는 내가 자신을 발견하자 재빨리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뭐라는 거야. 자기가 제일 시끄럽게 소리 내 놓고.
나는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다시 응접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틀렸다. 이미 안쪽에 있던 어머니와 심부름꾼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다 올리버 때문이다.
나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는 어머니를 모른 척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는 뻔뻔하게 구는 게 최고다.
“에스턴 자작가에서 왔다고 들었는데요.”
안의 이야기를 못 들은 척하는 내게 심부름꾼 역시 모르는 척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제 일어난 일 때문에 에스턴 자작가에서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같이 가 줬으면 한다고.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는 질문에 그는 어머니에게 한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했다. 어제의 습격으로 에스턴 자작이 의식을 잃었다고.
“습격받았다고? 누구에게?”
나를 따라 들어오기로 했는지 어느새 내 옆에 선 올리버가 물었다. 심부름꾼은 올리버의 질문에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걸 확인하려고 방문해 주십사 하는 겁니다.”
“왜 유제니지?”
이어진 어머니의 질문에 심부름꾼이 어머니를 쳐다봤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그 남자.”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나와 부딪친 남자. 단순히 도둑이거나 밀회를 즐기려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나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어머니와 올리버에게 설명했다.
“어제 무도회에서 줄리아 아니, 잠깐 뭘 좀 찾다가 어떤 남자와 부딪쳤거든요.”
그 남자가 에스턴 자작을 공격한 걸까? 나는 그런지 궁금해서 심부름꾼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제가 들은 거라고는 주인어른을 공격한 사람 관련으로 레이디 비스컨께 여쭙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할까. 어머니와 내 시선이 부딪쳤다. 다른 때라면 무례하다고 화를 냈을 테지만 에스턴 자작이 의식 불명이라니 걱정스러웠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어머니께 말했다.
“다녀올게요.”
에스턴 자작가는 마치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다. 어젯밤의 화려한 무도회가 거짓말 같아서 나는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유제니.”
메리 에스턴 자작 부인은 하루 사이에 핼쑥해진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무도회가 열리는 도중에 남편이 누군가의 습격을 받았다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
“괜찮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 말씀만 하세요.”
“여기까지 오라고 해서 내가 미안하지. 제이크가 너무 완강해서…….”
역시 내가 와야 한다고 한 건 에스턴 자작 부부가 아니라 그들의 아들인 제이크 에스턴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괜찮다고 말하는 사이 응접실 문 너머로 약간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나타났다.
“유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