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39)

14화. 3 – 5

역시 농담이었던 모양이다. 자기 농담에 웃지 않을 수 있다니, 대단한 사람이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사람이 적은 벽 쪽으로 향했다. 반지 하니까 생각났는데 그에게 물어봐야 할 게 있다.

“제게 손수건 말고 또 다른 걸 보내셨죠?”

인장 반지. 그걸 가져온 심부름꾼이 번즈 씨가 보냈다고 했다고 한다. 잘못 들은 거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데 다행히 번즈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혹시 백작님 건가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를 몰랐다면 외국 귀족의 것을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 내가 알고 지낸 번즈 백작은 인장 반지를 빼앗을 만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이제는 당신 거죠.”

느긋한 번즈 백작의 대답에 나는 멈칫했다. 이제는 내 거라니, 설마 나한테 준 거야? 나는 믿을 수 없는 그의 말에 다시 물었다.

“저한테 준 거라고요? 완전히?”

“네, 레이디 비스컨, 당신 겁니다.”

이 남자, 미쳤구나.

하지만 미쳤다고 확신하기 저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한테 준 게 인장 반지라는 건 아시죠?”

“압니다.”

“그게 뭔지도 알고요?”

“네.”

미쳤다. 미친 거야.

나는 슬금슬금 번즈 백작에게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레이디 비스컨이다. 그러니까 예의 바르게 헤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줄리아를 찾아봐야겠어요.”

나는 줄리아 핑계를 대고 번즈 백작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진짜 얘 어디로 갔지?

아까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는 기둥 옆에 있었다. 그런데 그 기둥뿐 아니라 회장 안의 모든 기둥을 살펴봐도 줄리아는 보이지 않았다.

기둥 뒤에 있나? 번즈 백작에게서 멀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줄리아를 찾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컬레 양 말입니까?”

번즈 백작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게 물었다.

“그녀가 무슨 색 옷을 입고 있었죠?”

연한 분홍색이었다. 소매에 러플이 달려 있었고. 내 설명을 들은 번즈 백작은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물었다.

“에스컬레 양이 올해 몇 살입니까?”

줄리아가 지금 몇 살인지랑 그녀를 찾는 게 무슨 상관일까?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열여덟 살이다. 내년에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결혼할 수 있는 나이군요.”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 건데? 내가 인상을 쓰며 쳐다보자 번즈 백작은 실언했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그를 위해 설명했다.

“미혼 여성은 이성과 단둘이 있으면 안 되거든요.”

“오, 그렇습니까?”

응?

묘하게 연극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번즈 백작은 처음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문이 닫힌 공간에 단둘이 있는 걸 사람들에게 들키면 평판에 별로 좋지 않거든요.”

“평판에 안 좋으면 어떻게 됩니까?”

“가장 좋은 건 함께 있던 상대와 결혼하는 거죠.”

내 말에 번즈 백작은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줄리아를 찾기 위해 벽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옛날엔 결혼하지 못하면 수도원으로 가거나 평생 결혼하지 못하기도 했대요.”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뒷말이 따라붙게 된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었냐고. 한동안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지 못할 정도로.

“만약 약혼한 상태로 다른 사람과 단둘이 있다가 들키면 파혼 사유가 되기도 하죠.”

그러니 번즈 백작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이 남자보다 덜 잘생긴 남자들도 멍청하게 구는 걸 봤다. 스캔들이 난 상대와의 결혼을 거부했다가 여자의 오라버니에게 살해당한 남자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건 아주 예전 이야기지만.

나는 내가 들은 이야기를 번즈 백작에게 경고 삼아 해 줄까 하다가 말았다. 그라면 살해당하는 게 아니라 살해하는 쪽일 것 같거든.

“없네요.”

벽을 따라 걸으며 사람들을 찾았지만 줄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줄리아의 행방을 물어볼 수도 없다. 그녀가 동반자의 눈에서 벗어났다는 게 소문 나는 건 더 좋지 않다.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디로 간 걸까. 줄리아가 혈기 왕성하긴 하지만 그렇게 말없이 사라질 아이는 아니다.

“테라스 쪽을 살펴보죠.”

번즈 백작의 말에 나는 제일 먼저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이런 무도회의 테라스라면 그야말로 밀회의 장소다.

하지만 그건 겨울의 이야기다. 추우니까 아무도 안 나가려 하는 테라스만큼 밀회를 즐기기 좋은 곳도 없다고 들었다. 지금은 더운 여름이고 다들 밤공기가 서늘하길 기대하며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중에 줄리아가 포함됐을 수도 있고.

“어쩌면 휴게실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번즈 백작의 지적에 나는 그제야 휴게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줄리아는 휴게실에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각각 테라스와 휴게실을 확인해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내가 휴게실, 번즈 백작이 테라스다.

“고마워요.”

휴게실로 가기 전에 가볍게 고마움을 전하자 번즈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남자는 사람 심장을 여러 번 들었다 놨다 하는 능력이 있다.

에스턴 자작 부인은 몇 개의 휴게실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관례대로 남녀를 구분해 놓았기 때문에 나는 휴게실의 반만 확인하면 된다.

안타깝게도 줄리아는 휴게실 어디에도 없었다. 얘가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슬슬 안 좋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래 내 눈 밖에 벗어나 있을 정도로 책임감이 없는 아이는 아니다. 이렇게 찾아도 없다는 건 어쩌면 비자발적으로 움직인 건 아닐까.

여기는 사람이 많은 무도회지만 나는 바로 얼마 전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납치당했다. 줄리아 역시 그런 거라면 어쩌지?

불안한 나머지 나는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을 보지 못하고 부딪쳤다.

“아!”

“윽!”

아야야. 부딪친 탓에 그대로 뒤로 넘어져서 엉덩이를 부딪쳤다. 나는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앞을 안 보고…….”

“비스컨?”

모르는 목소리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여전히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니, 아나?

어쩌면 한두 번 정도 지나친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통성명을 한 사람은 아니었다.

“제가 당신을 아나요?”

나는 나를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남자에게 물었다. 아는 사이인가? 다시 생각해 봤지만, 여전히 나는 처음 보는 남자였다.

“아니요.”

남자는 고개를 흔들고 그렇게 말하더니 그대로 나를 지나쳤다. 뭐지? 나는 서둘러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앞을 제대로 안 보고 부딪친 건 내 잘못이지만, 그건 저 남자도 마찬가지 아냐? 이런 좁은 복도에서…….

남자가 나왔을 만한 곳을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지만, 맞은편은 그냥 벽이었다. 살짝 들어가 있어서 저쪽도 복도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저 남자,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어리둥절해하며 일어나는데 하인이 놀라서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맞은편의 살짝 들어간 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에 문이 있어?”

“문이요?”

느닷없는 질문에 하인은 내가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게 아닐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방금 저기서 누가 나오는 바람에 부딪혔거든.”

“아, 저기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 계단이라면 이 저택 가운데에 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그가 말하는 계단은 하인용 계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건을 옮기거나 손님이 왔을 때 하인들이 안 보이게 움직이기 위해 사용하는 계단이다.

그렇다면 아까 그 남자는 하인이라는 말이다.

아니었는데?

옷차림이 하인의 옷차림이 아니었다. 게다가 하인이었다면 나와 부딪치고 그렇게 그냥 갔을 리도 없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는 연회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도 끼어들기 십상이다. 아래층에서 시끌벅적하게 노는 사이에 위층에서 도둑질을 하는 거다.

아니면 밀회를 즐기거나.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위층에 올라가서 밀회를 즐기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의심을 피하고자 시간 차를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어느 쪽일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하인에게 말했다.

“나와 부딪친 사람은 하인이 아니었어. 혹시 모르니 위층을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도둑이라면 알려 주는 게 좋다. 나는 밀회라면 남아 있던 여자가 다른 길로 도망쳤기를 바라며 번즈 백작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되돌아갔다.

“유제니!”

줄리아는 거기 있었다. 번즈 백작과.

세상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줄리아의 손을 잡았다. 얘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다시 만난 줄리아는 약간 흥분해 있었다.

“내가 뭘 봤는지 알아요?”

그게 뭔지 몰라도 내 눈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걸 다시 알려 줘야 할 것 같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또 이러면 다시는 같이 무도회에 안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줄리아가 먼저 내게 속삭였다.

“커널 남작 부인에게 애인이 있더라고요.”

뭐라고? 느닷없는 줄리아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커널 남작 부인? 머릿속에 리사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커널 남작 부인에게 애인이 생겨서 그녀의 동생이 걱정한다고 했지.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건 옳지 않아.”

마음이 가라앉자 나는 줄리아에게 주의를 줬다. 누가 밀회를 즐기는지 따라다니는 건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체통 없는 짓이기도 하다.

게다가 줄리아는 아직 미성년자에다 미혼이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 장면을 보는 건 네게 그리 좋지도 않고.”

“중요한 건 보지도 못했어요. 막 시작하려는데…….”

거기까지 말한 줄리아가 고개를 돌려 번즈 백작을 쳐다봤다. 그녀는 약간 뾰로통하게 말했다.

“백작님이 오셨거든요.”

그건 다행이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번즈 백작을 향해 감사의 미소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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