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39)

13화. 3 – 4

내뱉고 나서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귀족이 아니라고 해서 그의 친구들도 귀족이 아니라는 법은 없다.

특히나 아카데미에 다녔다면 귀족들과 어울렸을 테니 귀족 친구가 있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오랜 친구라면 이름으로 부를 테니까 기껏해야 공식적인 자리나 편지 봉투에 쓰는 이름을 틀리는 정도다. 나는 안젤라가 결혼한 뒤 그녀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편지 봉투를 꼭 두 번 써야 했다.

매번 크럼 남작 부인이 아니라 알바니 양이라고 쓴다니까.

“친구는 아닙니다.”

홀 가운데에 도착한 번즈 백작은 나와 나란히 서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헷갈릴 일이 있나? 나는 음악이 시작하기 전에 재빨리 번즈 백작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번즈 백작은 그제야 내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크, 몰랐나 보다.

나는 그가 귀족 예법을 가르쳐 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는 지금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전혀 모르는 세계에 들어왔으니까.

“사교춤은 아카데미에서 배웠나요?”

음악이 시작되자 나는 번즈 백작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내 허리에 닿았다. 태도를 보니 춤을 춰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그의 손은 내 허리에 닿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망설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번즈 백작이 나와 춤추는 것 때문에 너무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춤은 능숙했다. 번즈 백작은 어려움 없이 다음 스텝을 밟으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아카데미에서 배운 건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잘 추는데요?”

어닝보다 더 잘 춘다. 어닝은 가끔 스텝이 헷갈렸는지 나와 부딪칠 때가 있다.

하지만 번즈 백작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그의 뒤에서 거리 조절한 남자가 부딪쳐 왔을 때도 번즈 백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부딪친 남자는 살짝 튕겨 나갈 정도였는데 번즈 백작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질문에 그는 되레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부딪쳤다. 남자가 부딪쳤을 때 내 허리에 얹은 번즈 백작의 손에 힘이 들어갔으니까.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번즈 백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가볍게 스친 정도라서요.”

가볍게 스친 게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그의 허세 아닌 허세가 귀여워서 나는 피식 웃고 넘어갔다. 이런 면도 있군.

번즈 백작은 나를 따라 웃으며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과 춤을 추기 위해 연습했다고 하면 믿으실 겁니까?”

그건 정말 재미있는 농담이다. 나는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가 깜짝 놀라서 입을 막았다.

“듣기 좋은 말씀을 하시네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듣기는 좋다. 평소에 이런 흰소리를 안 할 것 같은 사람이라 더.

번즈 백작 역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표정이 없을 때는 꽤 무서운 얼굴인데 웃을 때면 소년 같아지는구나.

잠깐, 이럴 때가 아니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바람에 박자를 놓쳐 버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 서둘러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잊고 있었던 게 하나 있다. 내 허리에 아직 번즈 백작의 손이 올라가 있었다는 거.

“헉.”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뒤로 물러나려던 나와 달리 번즈 백작은 내가 물러날 줄 몰랐기 때문에 내가 넘어지는 줄 알고 나를 잡아당긴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그의 가슴에 뺨을 대고 안겨 있었다.

“괜찮습니까?”

상황 파악은 아주 천천히 이뤄졌다. 그리고 파악하자마자 내 반응은 아주 빨랐다.

나는 빛의 속도로 번즈 백작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허둥지둥 말했다.

“괘, 괜찮아요. 아주 든든 아니, 튼튼, 아니, 이게 아니라…….”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사이 내 얼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맙소사.

차라리 어디 아픈 거였으면 좋겠다. 얼굴이 붉어진 게 아니라.

“든든하셨다니 다행이군요.”

얄밉게도 번즈 백작은 웃으며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 상황에서는 그대로 춤을 추는 게 낫다. 창피하다고 도망쳐 버리면 두고두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될 거다.

그리고 어쩌면 이틀 뒤 커런트의 속삭임에 작게 실리겠지.

신문에 내 이야기가 실린다고 생각하자 다시는 집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번즈 백작의 손을 잡고 다른 사람들을 따라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비밀 하나 이야기해 드릴까요?”

잠시 어색하게 춤을 추는데 번즈 백작이 말했다. 이 어색함을 피하려면 무슨 이야기라도 좋다. 나는 너무 절실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번즈 백작이 정말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내게 고개를 숙이더니 귓속말을 했다.

“사실 전 이런 무도회가 싫습니다.”

“왜요?”

춤추는 게 싫어서? 올리버는 그래서 무도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게 너무 낯간지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성과 공개된 장소에서 사적으로 친해지려면 춤이 최고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저는 좀 소규모가 좋거든요.”

“저도요.”

공통점이 생겼다는 기쁨에 나는 재빨리 말했다. 나도 이런 번잡한 규모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무도회가 싫다.

사교계에서 미혼 여성은 춤을 청할 수 없다. 오직 남성들의 청을 승낙하거나 거부할 수만 있다. 그러니 우리가 무도회에서 춤을 몇 번 권유받느냐는 눈에 보이는 인기 척도가 되어 버린다.

물론 나는 운이 좋았다. 내게는 올리버 비스컨이라는 오라버니가 있으니까. 오라버니의 친구들은 친구의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예의 바르게 내게 춤을 청해 주곤 했다. 허, 이렇게 생각하니 쓸모없는 올리버가 도움이 되긴 했네.

“여기 온 것도 에스턴 자작님과 아버지가 사업상으로 친분이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많아도 열 명 정도 모임이 좋더라고요.”

별로 안 좋아하면서 에스턴 자작의 무도회에 온 건 이게 사회생활인 동시에 의무이기 때문이다. 귀족 사회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은 내가 귀족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거다. 그 제반 비용은 아버지의 영지에서 나오는 세금과 가족이 경영하는 사업에서 나온다. 그 사업에는 에스턴 자작의 사업과도 얽혀 있고.

나는 비스컨 백작의 딸로서 에스턴 자작가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다른 귀족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는 더 작은 규모가 좋습니다.”

다시 세 걸음 떨어졌다가 돌아오며 번즈 백작이 속삭였다. 나도 소규모가 좋다고 말했잖아?

하지만 번즈가 말하는 규모가 작다는 건 좀 다른 이야기였다. 그는 내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중요한 사람 단 한 명만 있으면 되지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빨리 지나가서 그게 무슨 기분인지 깨달을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와 손바닥을 대고 오른쪽으로 두 발짝 걸으며 물었다.

“여성분인가요?”

고개를 돌려 보니 번즈 백작은 이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네.”

조금 전 빠르게 스쳐 지나간 감정이 뭔지 좀 알 것 같았다. 약간의 질투심. 그리고 부러움.

하지만 누가 부러운 건지 모르겠다. 단 한 명만 있으면 될 정도로 중요한 사람을 찾은 번즈 백작인지, 아니면 이 사람에게 그런 존재가 된 여자인지.

결혼할 사람인가? 하지만 번즈 백작은 약혼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호기심과 무례함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번즈 백작이 물었다.

“약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내가 약혼한 걸 아는군. 그 사실을 깨닫자 기분이 다시 이상해졌다. 사실, 나는 그가 나를 유혹하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중요한 여자가 있다고 말하기 전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건 확실히 말하자면 번즈 백작의 잘못이다. 그의 행동이 오해할 만했단 말이다.

번즈 백작은 내 허리에 손을 얹거나 내 손바닥과 손바닥을 댈 때면 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방금 전에도 나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굴었다.

보통 이러면 나한테 꽤 강한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너무 싫어서 먼저 춤을 청하지는 않을 거 아냐.

나는 번즈 백작의 행동을 해석하느라 미간을 찡그린 채 말했다.

“반년 전에요.”

“혹시 약혼에 대한 걸 묻는 게 무례한 행동입니까?”

인상을 쓰면서 대답한 탓인지 번즈 백작이 물었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그의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어이없어하다가 곧, 그가 귀족 사회에 이제 막 들어왔다는 것을 떠올렸다.

귀족 사회 예절을 잘 모른다고 했지. 그래서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될 교사의 명단을 적어 줬고.

그렇다면 지금 그의 행동은 정말 잘 몰라서인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 등에 손을 대고 있는 번즈 백작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밀어 내며 말했다.

“춤을 출 때 우리 사이에 틈이 있어야 해요.”

역시 번즈 백작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군.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진다. 그리고 좀 부끄러워졌다. 그는 그냥 몰라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뿐이다. 나를 유혹하는 게 아니라.

“그리고 약혼에 대한 걸 묻는 건 전혀 무례한 행동이 아니에요. 파혼이라면 모르지만요.”

“그렇군요.”

번즈 백작은 겸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좀 빨리 말할걸. 나는 그의 팔에서 손을 떼고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잠시 입을 다물었던 번즈 백작이 불쑥 물었다. 어떻냐니, 뭐가? 내가 고개를 들자 곧바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번즈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이 남자, 눈동자 색이 정말 예쁘네.

“약혼자 말입니다. 그가 중요합니까?”

중요하냐고? 이상한 질문에 나는 저도 모르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리고 번즈 백작의 시선을 의식해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당연하죠. 제 약혼자니까요.”

“하지만 이곳에 그와 함께 오지는 않으셨고요.”

예리한 질문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건 그렇다. 귀족 대부분이 그렇듯 나와 어닝은 연애가 아니라 집안 소개로 만났다. 그리고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만나는 횟수가 좀 적은 편이긴 하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죠.”

정곡을 찔린 탓에 나는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말했다. 중요한 사람이 있다면서 너도 혼자 왔잖아? 그런 내 지적에 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젠장.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가끔은 좀 의문스럽긴 하다. 어닝이 나와의 결혼을 정말로 원하는지. 하지만 그건 나 역시도 가지고 있는 감정이었다.

이 결혼이 맞는 걸까. 어머니가 그러셨다. 많은 귀족이 가족의 소개로 배우자를 만나 결혼한다고. 처음엔 불안하겠지만 살다 보면 익숙해질 거고 동료가 될 거라고.

그러니 어닝 역시 마찬가지겠지. 나는 그렇게 마음을 달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어닝은, 제 약혼자는 결혼 전에 최대한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다고 했어요.”

그가 그랬다. 어차피 결혼하면 외박하는 것도 쉽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결혼하기 전에 최대한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다고 했다.

이해가 가는 말이다. 올리버는 아직도 친구들과 한두 달씩 여행을 떠나곤 하거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오라버니가 어서 짝을 만나 정착하길 바라고.

“그렇군요.”

번즈 백작은 내 설명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음악에 맞춰 천천히 움직이며 덧붙였다.

“저라면 약혼자와 더 잘 알아 갈 기회로 삼겠지만요.”

전혀 알겠다는 태도가 아니다. 나는 뭐라고 하려다 오늘치 무례함을 다 쓰지 않기 위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은 제 약혼자가 아니니까요.”

음악이 끝났다.

우리는 처음 춤을 출 때 그러했듯이 약간 떨어져서 마주 본 채 서로에게 허리를 숙였다. 곧이어 기다리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는 소리가 났다.

“또 한 번 춤을 청해도 될까요?”

인사를 하고 나자 번즈 백작이 물었다. 역시 아까 괜찮다면 두 번도 좋다던 말은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나는 그를 민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 웃으며 말했다.

“백작님이 제 약혼자라면 그래도 되죠.”

“반지는 내일 드려도 될까요?”

뭐?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쳐다보니 번즈 백작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약혼자라면 약혼반지를 드려야죠. 내일까지 준비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네. 나는 번즈 백작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농담이 아닌가?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까 제가 약혼한 지 반년쯤 됐다고 말씀드렸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네.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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