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39)

12화. 3 – 3

“유제니, 그거 진짜예요?”

엘리엇 번즈가 백작이 됐다는 소문은 금세 수도에 퍼졌다. 그가 우리 집에 다녀간 다음 날 바로 신문에 실렸으니 놀라운 일도 아니다.

올리버가 다니는 클럽에 이야기가 퍼지면 늦어도 이틀 뒤에 신문에 실린다. 소문내고 싶다면 남성 클럽 회원에게 말해야 한다니까.

나는 에스컬레 경의 딸, 줄리아와 에스턴 자작의 무도회에 참석해 있었다. 에스턴 자작은 자신의 부를 이 무도회에 잔뜩 과시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무도회장 중간중간에 장식된 얼음 조각이었다.

“이 얼음 조각이 오늘 하루 동안 녹지 않는 마법이 걸렸다는 거라면 맞아.”

나는 요정 마고를 조각한 얼음 조각을 구경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에스턴 자작이 직접 자랑했다.

얼음 조각 가격도 가격이지만 그걸 하루 동안 안 녹는 마법까지 걸다니, 참 다양하게 부를 과시한다 싶다.

하지만 줄리아가 말하는 이야기는 얼음 조각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이 참” 하더니 내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번즈 백작 말이에요.”

“번즈 백작이 된 거?”

그거라면 신문에 난 거잖아. 내가 아무리 소문에 늦어도 신문 정도는 읽는단다.

나는 줄리아에게 신문에 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하려 했다. 신문에 나기 전에 알았으니 내가 발시안에서 가장 소문에 늦다는 불명예스러운 낙인은 벗어난 셈이다.

하지만 줄리아가 물어보는 건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하인에게 차를 두 잔 받아 내게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유제니가 번즈 백작의 예절 교사가 될 거라던데요.”

“뭐? 콜록.”

줄리아에게 받은 차를 홀짝이다가 듣는 바람에 나는 그대로 사레가 들려 버렸다. 콜록거리는 내 등을 문지르며 줄리아가 말했다.

“번즈 백작이 사교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비스컨 가에 도움을 요청했다던데요. 아니에요?”

“아니, 콜록, 맞, 콜록, 콜록.”

기침 때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 하겠다. 줄리아 역시 내 말을 듣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맞다는 거예요, 틀리다는 거예요?”

“틀려. 아니, 맞긴 하는데.”

목이 다 아프다. 나는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사이 줄리아는 그게 무슨 대답이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소문이 난 거야? 분명 올리버의 짓이겠지. 또 그놈의 남성 클럽에 가서 한껏 잘난 척하며 자랑한 게 분명하다.

오라버니가 아니라 공작새라고 불러야 한다니까. 매일 아침 옷차림에 신경 쓰는 것까지 치면 올리버는 공작새가 분명하다.

나는 하인에게 차를 한 잔 더 달라고 요청한 뒤 줄리아에게 말했다.

“번즈 백작이 도움을 요청한 것도 맞고 올리버가 도와주기로 한 건 맞는데 내가 예절 교사가 되기로 한 건 완전히 틀려.”

이상한 소문은 정정해야 한다. 젠장. 줄리아가 말할 정도면 여기 온 사람의 반은 그 소문을 알고 있다는 뜻이잖아?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내가 해 주기로 한 건 예절 교사를 추천하는 정도야. 내가 번즈 백작의 예절 교사가 되다니, 터무니없어.”

우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나와 줄리아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어휴. 나는 한숨을 내쉬고 줄리아를 쳐다봤다. 그녀는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번즈 백작이 그렇게 잘생겼다면서요?”

잘생겼다. 하지만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런데?”

“아니에요?”

“봤잖아. 왕궁 무도회 때.”

갑자기 무도회장에 나타나서 난리가 났지. 그 일은 아직도 신문에 오르내리고 있다. 발시안 일보에서는 번즈 백작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끌고 왕궁 앞에 공간 이동을 했는지 마법사의 자문을 얻어 기사를 썼다.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이나 그다지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번즈 백작이 안티 매직이 걸린 왕궁에 강제로 대규모 공간 이동을 할 정도의 마법사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못 봤어요. 얼굴에 좀…….”

뭔가가 잔뜩 묻어 있었지. 게다가 무시무시한 투구도 쓰고 있었고. 나는 줄리아가 말을 하다 멈추는 것을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생겼어. 그런데…….”

불편하다. 별로 친해지고 싶지도 않고.

역시 꿈 때문이다. 못 다루는 무기가 없다는 것도 걸리고.

하지만 그런 걸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잘생겼다로 끝내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줄리아가 번즈 백작과 너무 가까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도 역시 꿈 때문이다. 나는 줄리아가 잘됐으면 좋겠거든. 솔직히 말하면 아직 결혼시키고 싶지 않다는 에스컬레 경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별로야.”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나서 줄리아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붕어 같네. 나는 어느 집 저택의 정원에서 본 적 있는 붕어를 떠올렸다. 뻐끔뻐끔거리는 모습이 할 말이 있는데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

그 순간, 다시 한 번 불길한 예감이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아니, 후려갈기기만 했을까. 내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생겨서 별로입니까?”

맙소사. 젠장, 젠장, 젠장, 빌어먹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기어 내려갔다. 나는 삐걱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고 바로 뒤에 서 있는 번즈 백작을 발견했다.

“버, 번즈 백작.”

나는 가까스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젠장. 못 들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다. 어느새 줄리아는 뒷걸음질로 저 멀리 도망쳐 있었다.

이 배신자.

눈빛만으로 줄리아를 비난하는 사이, 번즈 백작은 내 손을 잡으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그냥 레이디 비스컨이에요.”

“저도 그냥 엘리엇이라고 불러 주시죠.”

그건 싫다. 나는 재빨리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빼내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나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어요.”

“압니다.”

“줄리아는 아직 어리거든요. 번즈 백작께 관심을, 뭐라고요?”

허둥지둥 변명하다 보니 그가 한 말이 좀 늦게 머릿속에 들어왔다. 안다고 했어?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번즈 백작이 다시 말했다.

“안다고 했습니다. 레이디 비스컨께서 나쁜 의미로 말할 리가 없다는 것을요.”

잠깐,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민망해진다.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쁜 의미로 말한 거다. 잘생기긴 했지만 내 꿈에선 나쁜 놈이었어. 그러니 별로야. 딱 그런 의미였다.

그런데 나쁜 의미가 아니라는 내 말에 동의해 주다니,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번즈 백작을 쳐다보다가 다시 한 번 사과했다.

“미안해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올리면 안 되는 거였어요. 그게 그리 좋지 않은 이야기라면 더더욱이요.”

설령 번즈 백작이 듣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안 좋은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거듭된 사과에 번즈 백작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레이디 비스컨과 춤출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미안하시다면 춤 한 번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춤이라니, 나는 번즈 백작의 요구에 잠시 멈칫했다. 여전히 꿈속에서 본 그의 행동이 머릿속에 어른거렸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에 사로잡혀 무례하게 행동했다는 부끄러움이 먼저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걸로 괜찮다면요.”

“괜찮으시다면 두 번도 좋습니다.”

농담 같은 번즈 백작의 말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재빨리 줄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거기 그대로 있어.

줄리아는 눈동자를 굴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이번 무도회에 줄리아가 참석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동행했기 때문이다.

미혼인 여성 귀족들은 반드시 동반자가 있어야 한다. 나는 줄리아가 선택할 수 있는 동반자 중 가장 훌륭한 동반자고.

“춤도 가정 교사에게 배웠습니까?”

번즈 백작이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던 나는 지금 연주되는 곡이 거의 끝나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곡에 들어가야 한다. 지금 춤추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고 다음에 춤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가는 와중에 댄스 파트너인 나를 잃어버릴까 봐 손을 잡은 거겠지.

“네. 약간이요. 백작님은요?”

아카데미에 다녔으니 배우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번즈 백작을 쳐다보는데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왜 저러지?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아니요. 저를 백작이라고 부르시는 게 좀…….”

좀 왜? 그는 번즈 백작이다. 그러니 백작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뭐가 문제냐는 내 표정에 번즈 백작이 말했다.

“어색하군요.”

그런가. 생각해 보면 그는 지금까지 계속 번즈라고만 불렸을 거다. 그러니 백작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졌을 테지.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으며 말했다.

“곧 익숙해질 거예요.”

다들 그랬다. 금세 익숙해지곤 했다. 친하게 지내던 알바니 양은 크럼 남작 부인이 됐을 때 어색해하던 것도 잠시, 삼 개월쯤 되자 오히려 알바니 양이라는 호칭이 어색해졌다고 했다.

“글쎄요.”

음악이 끝나고 사람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하자 번즈 백작이 말했다. 잠깐, 왜 벌써 손을 잡고 있었던 거지? 어차피 먼저 춤춘 사람들에게 손뼉을 쳐야 해서 손을 잡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빼서 손뼉을 치기 시작하자 번즈 백작도 나를 따라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호칭이라는 건 바뀌었다고 해서 쉽게 바꾸기 어렵더군요.”

그건 그렇다. 크럼 남작 부인으로 불러야 하는데 몇 년간 입에 붙은 게 알바니 양이라 좀 곤란했다.

하지만 번즈 백작은 부르는 쪽이 아니라 불리는 쪽이잖아. 나는 사람들의 박수가 멈추자 번즈 백작과 함께 홀 가운데로 걸어가며 물었다.

“오랜 친구의 호칭이 바뀐 적이 있었나 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