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3 – 2
오, 어.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모양이다. 나는 너무 놀라서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도 잊고 번즈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번즈 백작을.
세상에. 백작이라고?
어머니 역시 아주 잠깐 말문이 막혔던 모양이다. 그녀는 멈칫하더니 금세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세상에, 경사로군요. 어느 영지를 받게 되나요?”
영지. 맞다. 모든 귀족이 영지를 가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모든 작위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백작이라면 영지도 가지고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 내 아버지처럼.
나는 숨을 죽인 채 어머니와 번즈의 아니, 번즈 백작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게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더 꿈과 멀어지고 있다. 꿈속의 번즈는 어머니와 올리버를 철천지원수처럼 대했으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번즈가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죽여 버릴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렘버트일 것 같습니다.”
예의 바른 말투로 번즈 백작이 말하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렘버트가 어디더라. 내가 몇 년 전에 받은 지리 수업을 떠올리는 사이 올리버가 말했다.
“이쪽에 들어온 걸 환영하네, 번즈 백작.”
번즈 백작은 미소를 지으며 올리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축하합니다? 잘됐어요? 뭐든 말해야 한다. 나는 허둥지둥 말했다.
“사교계에 데뷔하게 되시겠군요.”
번즈 백작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아, 세상에.
그 표정 변화가 정말, 정말 끝내줬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켠 것처럼 번즈 백작의 얼굴에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저는 사교 예절을 모르니 도움이 필요하겠죠.”
“그거라면 우리 유제니가 도와줄 수 있지.”
내가 번즈 백작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올리버가 말했다. 응? 뭘 도와줘?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오라버니가 말했다.
“예의범절이라면 유제니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지. 안 그래?”
이게 놀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모르겠다. 평소라면 놀리는 거였을 거다. 올리버는 항상 내게 융통성이 없다고 놀려 대곤 했으니까.
하지만 손님 앞에서 여동생을 놀리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겠지. 아니, 할 수 있나?
내가 말없이 올리버를 쳐다보며 미소를 짓자 그가 번즈 백작에게 말했다.
“유제니가 자네에게 괜찮은 명단을 적어 줄 수 있을 거야. 원한다면 소개장도.”
아, 그쪽이었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의 말대로 나는 예절 교사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 이건 다 어머니 덕분인데 그녀는 내 예의범절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는 대신 나는 어머니가 직접 선별한 교사들에게 수업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어머니는 예절 교육에 가장 많이 신경을 썼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나는 이웃 나라의 예의범절까지 교육받았을 정도다.
“괜찮은 분으로 명단을 적어 드릴게요.”
나는 번즈 백작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번즈 백작은 나이가 찬 남자니까 예절 교사도 나이가 좀 있는 남자가 좋겠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괜찮다면 또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내게 인사한 번즈 백작이 이번에는 올리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뭐든 말해.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줘야지. 내 후배잖나. 하하하.”
나왔다, 올리버의 허세.
나는 어머니를 쳐다보며 눈동자를 굴리려 했다. 물론 그러려고 하기만 했다. 실제로 하지는 않았고.
번즈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그의 얼굴에 빛이 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부드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아시다시피 제가 사교계 쪽으로는 잘 모르잖습니까. 하지만 작위를 받을 테니 곧 손님을 초대할 일도 생길 테고 손님의 방문도 받을 수 있겠죠.”
그건 그렇다. 용을 물리치고 작위를 받은 신흥 귀족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몰릴 거다. 그가 만약 미혼이라면…….
“그렇군. 번즈 백작, 자네 미혼인가? 약혼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올리버가 물었다. 번즈 백작이 약혼자가 없다고 하자 오라버니는 씩 웃으며 말했다.
“별것 아닌 이유를 대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겠군. 그걸 예의 바르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할 테고.”
작위를 가진 미혼 남자는 그리 흔하지 않다. 게다가 저렇게 잘생기기까지 했다면 거의 천연기념물 수준이고.
나는 번즈 백작의 집에 얼마나 많은 하인이 드나들지 생각하며 히쭉 웃었다. 그리고 번즈 백작과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아, 이상한 얼굴이었을 거 같은데.
확실히 이상한 표정이었나 보다. 번즈 백작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도와줘야지. 걱정하지 말게, 번즈 백작. 내가 자네의 후견인이 되어 주지.”
올리버가? 나는 눈동자를 굴리지 않으려 애썼다. 후견인은 꽤 귀찮은 직책이다. 보통 사교계에 갓 데뷔한 어린 귀족들의 사교계 활동을 도와주는 사람을 말한다.
당연히 후견인은 자신이 돌봐 줘야 하는 귀족에게 사람을 소개시켜 주고 연회나 파티 등에 동반해야 한다. 나와 올리버는 부모님이 후견이었고 어릴 때부터 사교계 예절을 몸으로 익혔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번즈 백작은 다르다.
올리버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줘야 한다. 그런데 과연 오라버니가 그런 귀찮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지난번 왕궁 무도회에 참석할 때도 어머니는 올리버에게 늦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야 했는데?
하지만 번즈 백작이 감사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부탁할 사람을 잘못 고른 것 같은데. 불쌍한 사람 같으니.
“조만간 제집에 초대하겠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번즈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동안 우리는 그가 아직 왕궁에 머물고 있다는 것과 수도에서 살 집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올리버와 어머니는 그가 작위를 받으면 작은 파티를 열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사이에 나는 번즈 백작에게 줘야 할 예절 교사의 명단을 작성했다.
“여기요.”
나는 현관 앞까지 그를 배웅하며 적은 종이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수도에서 가장 실력 있는 예절 교사 중 조건에 맞는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놓았다. 물론 전부 나이가 좀 있는 남자들이다.
“예절 교사의 명단이에요. 제게 소개를 받았다고 하시면 될 거예요.”
번즈 백작이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명단에 적힌 사람 중에는 나를 가르친 사람도 있고 나를 가르치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서로를 알고 있다.
예절에 관해서 편지로 몇 번 의견을 교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
번즈 백작은 마치 그걸 잊고 있었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씩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고귀한이 아니에요.”
이건 정말 지적해야겠다.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고귀한 레이디는 공작의 딸이나 공주에게나 붙일 수 있는 호칭이다.
“내 아버지는 비스컨 백작님이니까 저는 레이디 비스컨이죠.”
내 지적에 번즈 백작은 다행히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음, 이렇게 남의 지적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일부러 빼놓은 커럼 교수를 추천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커럼 교수는 성격이 좀 땍땍거려서 그렇지 발시안의 예의범절에 대해서는 논문을 썼을 정도로 학식이 깊거든.
“그렇군요. 가르침 감사합니다. 레이디 비스컨.”
번즈 백작은 부드럽게 인사하며 내 손에 있는 종이를 잡았다. 그러자 내 손까지 전부 그의 손에 들어갔다.
그의 손이 크기 때문이다. 나는 부드럽게 내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번즈 백작이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다음에 주셨어도 됐을 텐데요.”
왜 이렇게 서두르냐는 말에 뺨이 살짝 뜨거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여전히 번즈 백작을 멀리하고 싶다.
꿈과 많이 다르다고 해도 그는 내 꿈속에서 내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죽인 살인자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서둘렀다. 지금 명단을 줘 버리면 다음에 또 그와 연락할 이유가 없어지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나는 적당히 핑계를 댔다.
“곧 집을 구해 작은 파티를 열 계획이라고 하셨잖아요.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예절 교사는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되겠지. 특히나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여성의 손을 맨손으로 이렇게 오래 쥐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려 줄 거고.
“실례.”
다행히 내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번즈 백작은 사과를 하며 내 손을 놓아주었다. 별로 세게 잡힌 것도 아닌데 손이 뜨겁다. 나는 그에게서 반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그럼, 도움이 되길 바라요.”
“이미 충분히 되고 있습니다, 레이디 비스컨.”
번즈 백작은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싱긋 웃었다. 그리고 내 뒤에 선 올리버를 한 번 쳐다보더니 유쾌하게 말했다.
“앞으로 비스컨 남작님께서 많은 지도 편달을 해 주실 거고요.”
번즈 백작의 지도 편달이라는 말이 올리버의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내 뒤에 서 있던 오라버니는 활짝 웃으며 한 걸음 나오더니 번즈 백작에게 말했다.
“그럼. 예절 교사도 걱정하지 말게. 정 못 구하면 유제니가 책임지고 자네를 가르쳐 주면 되지.”
이 미친 오라버니가? 나는 깜짝 놀라서 올리버의 발을 콱 밟아 버렸다. 덕분에 올리버는 “윽” 하고 신음을 내뱉더니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가르치긴 누가 누굴 가르쳐? 나는 번즈 백작과 이 이상 어울릴 생각이 없다. 나는 올리버가 그저 농담한 거라고 말할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번즈 백작의 표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시리도록 새파란 눈동자가 마치 빛을 받은 것처럼 빛이 났다. 하지만 내가 눈을 깜빡이자 그 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