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239)

10화. 3 – 1

“아가씨, 손님 오셨어요.”

이른 오후. 방 안에 앉아 있던 나는 셜리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재빨리 다가와서 나를 부축해 주며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괜찮다. 약간이지만 식욕도 돌아왔고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오티스 저먼이 날 납치, 아니, 번즈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첫날은 열이 올라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둘째 날은 열이 좀 내리긴 했지만, 식욕을 잃어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묽은 수프라도 먹을 수 있게 된 게 어제저녁이었으니까 내 상태는 별로 안 좋아 보일 게 뻔하다. 나는 셜리가 헐렁해진 드레스를 다시 손봐 주는 사이 거울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앤은 어때?”

“어휴, 앤은 벌써 털고 일어났어요. 오늘 아침도 두 그릇이나 먹었는걸요.”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그날, 그 집의 서재에서 빠져나간 앤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대로 쪽으로 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집으로 말을 타고 달려오던 번즈와 마주쳤다고.

“힘들었을 거야. 거기서 집까지 달려왔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다가 거울 속의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세상에. 시체가 따로 없네.

그렇지 않아도 핏기 없는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셜리가 열심히 꾸며 줬어도 내 모습은 완전히 병자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가볍게 손바닥으로 내 뺨을 두드렸다. 그렇지 않아도 번즈에게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 줬는데 불쌍한 모습까지 보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게 말이에요.”

번즈가 앤에게 자신의 말을 타고 가라고 했지만 탈 줄 모른다고 거절했다고 들었다. 나는 셜리가 내 등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이제 됐다고 했을 때야 방을 나섰다.

“번즈 씨.”

엘리엇 번즈는 손님용 응접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나를 구해 준 은인이라 그런지 어머니께서 제일 좋은 응접실을 내주셨던 모양이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번즈는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고귀한 레이디가 아니다. 나는 호칭이 틀렸다고 가르쳐 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번즈가 물었다.

“괜찮습니까?”

또 그 소리네.

순식간에 내 기억이 그가 나를 구해 줬을 때로 돌아갔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번즈는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테토를 날려 버리고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왜 날려 버렸다고 하냐면 서재를 확인했을 때 테토가 책장에 처박혀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땐 미안했어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자 번즈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사과는 제가 해야 할 텐데요.”

“저를 도와주셨을 때요. 왜 왔냐고 했잖아요.”

나를 도와주러 올 사람은 올리버나 에스컬레 경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날, 내게 괜찮냐고 묻는 번즈에게 왜 왔냐고 물었다.

무례했지.

“아니요. 마땅히 하실 수 있는 질문이셨습니다.”

그것도 들었다. 그때 번즈가 그 집 앞에 있었던 이유.

나는 그래도 내가 무례했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어머니께서 응접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번즈 씨, 어서 와요.”

그때까지 번즈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그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놓더니 어머니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스컨 백작 부인.”

어머니는 번즈의 예의 바른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당황하다가 곧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딸을 구해 준 사람인데 내가 먼저 초대했어야죠. 이 애가 앓아누워서 나도 경황이 없었어요.”

앓아누웠다는 말에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 창피하다.

고작 그런 일로 앓아누웠다는 것보다 그걸 번즈에게 들켰다는 게 더 창피했다. 나는 어머니께 왜 그런 말을 하냐는 표정을 짓고 번즈에게 말했다.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어요.”

번즈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봤다. 그가 어머니와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젠장.

“레이디 비스컨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저 때문에 그런 불편한 일을 겪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집사가 차를 내오자 번즈는 찻잔을 건드리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 일이 번즈 때문이라는 데는 의견 차이가 있지만 왜 일어났는지는 들었다.

찻잔을 들어 올린 어머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번즈 씨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디까지나 저먼 경이…….”

잠시 말을 멈춘 어머니는 단어를 고르는 듯하더니 빠르게 말했다.

“비이성적인 행동을 한 거니까요.”

저먼이 공격하려 한 건 올리버가 아니라 번즈였다고 들었다. 그는 왕실에 자신이 미래를 봤으며 발시안이 다아리브혼에 의해 몰락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용감하기도 하지. 아니면 미쳤거나.

안타깝게도 후자 쪽이 더 맞았던 모양이다. 번즈가 다아리브혼을 물리쳤다는 말을 들은 저먼은 자신의 예언이 빗나가자 번즈에게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가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인데 저먼은 번즈에게 내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를 납치해서 번즈를 협박할 생각이었고.

무슨 협박을 하려 했는지는 모르겠다. 저먼은 지금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들었다. 나는 차를 홀짝인 뒤 어머니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번즈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저먼 경이 저를 납치한 걸까요?”

테토, 그러니까 날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용병이 그랬다. 저먼 경의 목표는 나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그래서 나는 당연히 올리버가 저먼 경에게 큰 빚을 진 줄 알았다.

하지만 어제저녁, 내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하러 온 올리버는 저먼 경에게 도박 빚이 있냐는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녀석은 빈털터리야.’

“아, 그건…….”

번즈의 얼굴에 아주 잠깐 망설이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어머니께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가 레이디 비스컨께 손수건을 돌려드린 일 때문이 아닌가 추측할 뿐입니다.”

손수건? 아.

그제야 내 머릿속에 그가 내게 손수건을 보냈던 일이 생각났다. 내가 빌려준 손수건이 더러워져서 새것으로 돌려준다고 했지.

그렇겠네. 그건 소문이 좀 났을 거다. 그는 내게 보내는 손수건에 내 이름의 이니셜을 수놓아서 보냈고 가게에 수를 놓아 달라고 주문을 해야 했을 테니까.

번즈가 직접 수를 놓지 않았다면 말이지.

약간 심술궂은 상상이 떠올랐다. 저 커다란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서 조그마한 손수건에 수를 놓는 상상.

기가 막힐 정도로 어울리지 않아서 웃길 정도다. 혼자 키득거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생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그렇다면 더더욱 번즈 씨 잘못이 아니네요. 번즈 씨는 그저 예의 바르게 행동했을 뿐이니까요.”

“관대한 말씀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점점 더 예의 바른 번즈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는 이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고.

“듣기로는 무기를 아주 잘 다룬다던데.”

이어진 어머니의 질문에 내가 왜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지 깨달았다. 그 꿈 때문이다. 어머니와 올리버를 엘리엇 번즈가 죽여 버리던 꿈.

애초에 그에게 손수건을 준 것도 어머니와 올리버를 그에게서 떨어트리기 위해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꿈일 뿐이다. 나는 지금 이 상황과 꿈의 차이를 떠올렸다. 우선 꿈속에서 엘리엇 번즈는 저런 잘 차려입은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몸에 꼭 맞는 조끼와 은실이 들어간 셔츠. 지금 엘리엇 번즈의 모습은 젊은 귀족처럼 보인다. 그것도 아주 부유하고 유서 깊은 집안의 후계자.

꿈에서 본 엘리엇 번즈는 아니었다. 그는 용병처럼 보였다. 아니면, 아니면 장군처럼 보였던 것도 같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그 꿈을 꾼 건 딱 두 번이고 내 시선은 항상 그가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집중해 있었으니까.

“내세울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저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정도지요.”

완벽에 가까운 대답이 번즈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어머니의 얼굴에 만족한 표정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엘리엇 번즈가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 같은데.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 번즈가 귀족 부인의 애인이 되고 싶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어머니는 정부를 두는 분은 아니지만 그런 제안을 받은 적은 있다고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이야 평범한 백작 부인이지만 올리버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지금은 이웃 나라로 시집간 공주님의 개인 시녀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애인이 되면 왕실에 연을 만들 수 있지 않겠냐는 계산을 가진 약삭빠른 자들이 있었다고 들었다. 꽤 많은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건 어머니의 자랑이기도 했고.

“이게 누구야?”

어머니와 번즈의 가벼운 사교계 이야기가 이어졌을 때 올리버가 나타났다. 그는 클럽에서 오는지 한 손에 못 보던 트로피를 들고 있었다.

저건 또 누구한테 빼앗은 거람. 내가 흘겨봤지만, 올리버는 트로피를 빅스에게 넘기더니 내 옆에 앉으며 번즈에게 말했다.

“엘리엇 번즈. 자네가 오는 줄 알았다면 나도 오늘 안 나갔을 텐데 말이야.”

아무래도 내가 앓는 동안 올리버와 번즈가 꽤 친해진 모양이다. 오라버니의 스스럼없는 태도에 번즈는 별 대꾸 없이 그저 씩 웃기만 했다.

아니면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건 오라버니뿐인지도 모르고.

곧이어 하인이 올리버의 차를 가져오자 그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가길 잘했어. 어머니, 오늘 제가 클럽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십니까?”

응? 갑자기? 나와 어머니는 느닷없이 올리버가 클럽 이야기를 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싶어 번즈를 쳐다보자 그는 올리버가 무슨 이야기를 할 줄 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국왕 전하께서 여기 있는 번즈 씨에게 작위를 내리기로 했다더군요.”

아주 잠깐 응접실에 침묵이 흘렀다. 놀라야 할지 축하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어머니가 번즈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잘됐어요, 번즈 씨. 아니, 번즈 경이라고 불러야겠군요.”

“그냥 번즈 경이 아니에요.”

올리버는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번즈 백작이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