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39)

9화. 2 – 5

얌전히 앉아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나는 서재로 보이는 작은 방에 앤과 함께 앉아 있었다.

“독신자 저택 같아요.”

진정했는지 울음을 멈춘 앤이 내게 속삭였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우리가 앉은 소파 주위를 정신 산만하게 돌아다니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하인도 없는 모양이야.”

우리가 온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아직도 차가 나오기는커녕 나올 생각도 없어 보인다. 손님 대접이 영 별로인 집주인이군.

이 집이 오티스의 것이라면 말이지만.

하인이라는 말에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저 반응으로 보건대 이 집도 오티스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오티스의 목적이 뭘까. 그가 왜 나를 납치한 걸까.

날 여기에 내버려 둔 걸 보니 내가 목적은 아닌 게 확실했다. 심지어 그는 나를 감시하는 저 용병에게 내게 손대면 보수는 없다고 확실하게 말하기까지 했다. 나는 허리를 세우고 남자에게 물었다.

“저먼 경이 누굴 기다리는 거지?”

정신 산만하게 소파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남자가 우뚝 멈췄다. 그는 나를 무례하다 싶게 쳐다보더니 히쭉 웃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아가씨에게 왜 그런 걸 알려 줘야 하지?”

멍청한 놈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난 아가씨가 아니라 레이디 비스컨이야. 건방지게 굴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남자는 내가 겁을 먹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예상과 다른 반응에 멈칫하더니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내가 왜 알려 줘야 하지?”

존댓말이 어색한 모양이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허둥지둥 덧붙였다.

“레이디 비스컨.”

이 남자가 레이디 비스컨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기나 할까. 나는 그와 눈싸움을 하듯 똑바로 남자를 쳐다봤다. 그러자 놀랍게도 남자가 내 시선을 피했다.

“저먼 경은 내게 피해를 줄 생각이 없어. 내 아버지가 비스컨 백작이기 때문이겠지. 이 일이 어떻게 끝나든지 내 가족의 분노까지 받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안 그래? 내 설명에 남자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오티스가 날 납치했다는 걸 우리 집에서 알면 어떻게 할까. 제일 먼저 조용히 해결하려 하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집은 그리 부유하지 않다. 아니, 부유하지 않다는 건 좀 관대한 표현이다.

비스컨 백작가는 간단하게 말해서 체면치레만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난한 편이다. 오티스가 노린 게 내 몸값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그거였다.

우리 집안에서 내세울 수 있는 건 유서 깊다는 것과 내가 렌시드 자작의 후계자와 약혼했다는 거다. 어머니와 올리버는 렌시드 가에 도움을 요청할 거고 저먼 가는 비스컨 가와 렌시드 가의 비난을 받아 내야 하겠지.

오티스가 노리는 게 뭔지 몰라도 그 정도 가치는 있기를 바란다. 이런 사안은 왕궁에서도 나설 게 분명하거든.

나는 남자가 내 말을 이해한 것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면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을 내 아버지께 전부 고할 거야. 저먼 경이야 아버지가 저먼 자작이고 귀족이니 약간 혼나고 말겠지. 하지만 당신, 이름을 밝히지 않은 용병.”

내 부름에 남자가 멍청한 표정으로 말했다.

“테토.”

“좋아, 용병 테토. 귀족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어?”

그제야 테토는 상황이 파악된 모양이다. 그는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앉더니 이번에는 공손하게 물었다.

“뭐, 뭘 원하는 거지? 아니, 겁니까?”

“저먼 경이 기다리는 사람.”

“그, 저도 잘 모릅니다. 저먼 경이 받을 빚이 있다고 했어요.”

“남자? 귀족이고?”

테토는 처음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두 번째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저게 아니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네.

도박 빚이라도 받으려는 건가.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잠깐,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중요한 건 왜 하필 나냐는 거다.

저먼 경이 날 해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인질이라는 뜻이겠지. 설마 저먼 경이 빚을 받으려는 게 올리버인가?

꽤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올리버는 아직 약혼하지 않았고 수도에 있는 그의 가까운 가족은 어머니와 나뿐이니까. 어머니보다는 나를 납치하는 쪽이 나았겠지.

문제는 올리버가 대체 무슨 빚을 졌느냐는 거다. 도박 빚인가? 도박 빚은 다음 날까지 갚는 게 사교계의 예의지만 많은 사람이 그러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이 일과 나는 무슨 상관인데?”

약간 넋을 잃고 있던 테토는 내 질문에 고개를 들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

“저먼 경 말로는 아가, 아니, 레이디 비스컨이 그자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더군요.”

올리버군.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 천하에 쓸모없는 오라버니 같으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람? 나는 분을 삭이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 테토가 그랬던 것처럼 소파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 아가씨…….”

앤이 괜찮냐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소파 주위를 다섯 바퀴쯤 돈 다음에야 나는 우뚝 멈춰서 테토에게 말했다.

“차는 언제 내오는 거야?”

“뭐? 아니, 네?”

“차 말이야, 차. 손님에게 차를 내오는 게 예의 아냐?”

내 다그침에 테토가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앤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 내올 줄도 모르는 거면 내 하녀에게 시켜도 좋아.”

그게 될 리가 없다. 당연히 테토는 안 된다고 웅얼거리더니 뒷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아무 차만 내오면 되는 겁니까?”

“이런 집에서 대단한 차를 기대하지도 않아.”

“그럼 잠깐 여기 계십쇼.”

그렇게 말한 테토는 서재 밖으로 나가더니 밖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서재, 밖에서 잠글 수 있던가?

혹시나 해서 문손잡이를 돌려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포기하고 앤에게 돌아섰다.

“아가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 상황에서 차를 마실 수 있다니.”

앤은 감탄하며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이 상황에선 아무것도 안 넘어가.”

“그럼 왜…….”

용병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시켰는지 물어보려던 앤은 금세 이유를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녀를 지나쳐서 서재 안쪽의 창문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앤, 이리 와.”

창문이 좀 열렸다. 나는 재빨리 앤이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도왔다. 창문이 좀 작은 탓에 그녀의 엉덩이에서 걸리긴 했지만 내가 밀자 가까스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됐어요! 아가씨, 나오세요.”

창문 밖에서 앤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아냐, 얼른 집으로 가.”

“저 혼자요?”

“들었잖아. 저먼 경이 노리는 건 나뿐이야. 운이 좋으면 올리버가 돈을 가지고 오겠지.”

하지만 그 뒤도 문제다. 저먼 경은 용병을 여섯 명이나 불렀다. 올리버가 사람을 끌고 온다면 다행이지만 혼자 온다면? 저먼 경이 돈을 받고도 올리버를 해치려 한다면?

나는 빠르게 앤에게 설명하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얼른 집에 가서 사람을 불러와. 에스컬레 경에게도 연락하고.”

“하지만…….”

“우리 둘이 다 도망치면 저 녀석들이 우릴 잡으려 할 거야. 저먼 경이 원하는 건 나뿐이니까 나만 남아 있으면 너는 도망칠 수도 있어.”

아마도 그렇다. 어쩌면 용병이 여섯이니 한 명쯤은 앤을 잡으러 갈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앤은 내 설득에 마지못해 눈물을 글썽이며 달려 나갔다.

“귀하신 분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는데…….”

다행히 테토가 돌아온 것은 앤이 떠나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지금은 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 나는 시치미를 떼고 소파에 앉아 테토가 내미는 잔을 받아 들었다.

맙소사, 쟁반은커녕 잔 받침도 없이 딸랑 잔만 가지고 왔네.

“잠깐.”

내게 잔을 건네주고 나서야 테토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는지 눈을 부릅떴다. 그는 내 주변을 킁킁거리듯 쳐다보더니 조그마한 서재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녀는 어디 갔지?”

앤이 도망쳤다는 것을 알자 더 이상 내 고압적인 귀족 연기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겁먹은 걸 들킬 필요도 없다.

나는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셨다. 그리고 테토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먼 경에게 필요한 건 나뿐이잖아.”

“잠깐, 그러면 하녀를 도망치게 하려고 차를 가져오라고 한 거야?”

그걸 이제 알았다는 게 놀랍다. 나는 인상을 쓰며 차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차를 우린 거야? 색이 진한 거로 보아 찻잎을 너무 많이 쓴 모양이다. 심지어 컵에 찻잎이 두어 개 떠다니고 있었다.

“차 내리는 법을 배워 두는 게 좋겠어, 테토.”

“이, 이…….”

테토의 주먹이 올라갔지만, 그는 나를 때리지도, 어딘가를 치지도 않았다. 다행히 아까 내가 머릿속에 집어넣은 귀족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겠냐는 말이 아직 남아 있긴 한 모양이다.

“대답해!”

테토가 버럭 소리쳤을 때였다.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우당탕, 쾅! 와지끈!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확실했다.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 나는 겁에 질려서 서재 문을 쳐다봤다.

마치 뚝 끊긴 것처럼 소리가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이람? 테토와 나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

불길함이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나는 본능적으로 주저앉았다.

쾅!

요란한 소리가 났다. 뭔가가 박살이 나는 소리. 이어지는 테토가 “헉” 하고 놀라는 소리.

문을 부순 건 오히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들어온 게 부디 올리버나 에스컬레 경이길 기도했다.

“잠깐…….”

테이블 밑으로 남자의 부츠가 보였다. 검고, 투박했다. 올리버의 것이 아니다. 에스컬레 경일까?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 순간 부츠가 움직였다. 소리 없이.

쾅!

다시 한 번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내 뒤로 뭔가가 우수수 쏟아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에스컬레 경일까? 아니면 설마 앤이 벌써 누군가를 불러온 걸까.

내 몸을 꽉 끌어안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탓에 내 심장 소리가 온몸을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검은 부츠를 신은 남자가 다음에 할 행동을 기다렸다.

그리고 곧이어 놀랄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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