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239)

7화. 2 – 3

“세상에, 그 남자가 드래곤을 잡았다는구나.”

왕궁 무도회에 다녀온 이틀 뒤, 어머니와 나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신문을 읽고 있었고 나란히 앉아서 보고 있었으니 자연히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다.

그러니 어머니의 말은 나를 향한 게 아니라 오라버니, 올리버를 향한 것이리라.

올리버는 우리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우리와 똑같은 신문을 읽고 있었다. 커런트의 속삭임. 쉽게 말해서 가십지다.

발시안의 수도, 커런트에서 발시안 일보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높은 판매고를 자랑하는 이 신문은 귀족은 물론 신문을 구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한 부씩 구독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런데 왜 우리 집은 두 부냐고? 올리버가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올리버는 한 부는 어머니 것, 다른 한 부는 동생인 내 것이라고 말하는 모양이지만.

“어디요? 아, 찾았어요. 허.”

어머니의 말에 올리버가 몇 장 안 되는 신문을 팔락이더니 어머니가 읽고 있던 페이지를 발견했다. 나는 그가 그 기사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그 정도 실력이야?”

“뭐가? 아, 번즈의 검술 실력?”

주어도 없었지만, 올리버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꽤 훌륭하긴 했지. 내가 졸업할 때쯤엔 그가 우승자였거든.”

“네가 졸업할 때쯤엔 우승자였다니? 설마, 그 야만인이 아카데미 출신인 거니?”

한참 신문에 몰두해 있던 어머니는 올리버의 말에 놀라 물었다. 이런. 나는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실지 바로 알아차렸다.

이런 건 예언자 따위가 아니어도 알 수 있다. 어머니는 올리버가 수긍하자마자 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것 봐라, 유제니. 이런 야만인들도 다니는 게 아카데미란다. 내가 그래서 널 아카데미에 안 보낸 거야.”

네, 네. 나는 대충 대답하고 다시 올리버에게 고개를 돌렸다. 원래는 평민들이 지식 습득을 위해 만들어진 발시안 아카데미는 귀족들에게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부유한 평민들이 큰 비용을 지불하고 지식인들을 초빙해 오면서 발시안 아카데미 교육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몇 가지 긍정적인 현상이 일어났다. 귀족들의 사회성과 결혼 연령이 늘어난 것이다.

아, 물론 이걸 단점으로 꼽는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러니까 전자 말고 후자. 가끔 전자도 단점으로 꼽는 사람이 있긴 하는 모양이지만.

귀족들이 너무 평민과 친하게 지낸다나 뭐라나.

지금에 와서는 귀족 대부분이 자신의 자식을 발시안 아카데미에 보내는데 아주 가끔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고 가정 교사에게 맡기는 경우가 있다. 바로 나처럼.

“검을 잘 다뤘나 봐?”

나는 올리버에게 다시 물었다. 꿈에서 번즈는 그를 막는 하인들을 손쉽게 물리쳤다. 하인들이 거의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내 꿈이었기 때문이다. 꿈이란 원래 그런 거 아니던가.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는 거.

나는 올리버가 딱히 그렇지는 않다고 말하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아카데미 검술 시합의 우승자였다는 것을 들었음에도.

“음, 검을 잘 다뤘다기보다는…….”

잠시 단어를 고르느라 올리버의 말이 멈췄다. 나는 약간 안도하고 있었다. 잘 다룬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 내 꿈은 그냥 과장된 꿈이라는 뜻이고.

하지만 다음 순간, 올리버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못 다루는 무기가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은데.”

젠장. 내 기대가 하릴없이 꺾였다. 설마 내가 꾼 꿈이 진짜 예지몽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하지만 예지몽이라니 말도 안 된다. 일단 나는 예지나 예언 따위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엘리엇 번즈를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어쩌면 외모는 다를지도 모른다. 나는 꺼진 초에서 나는 연기로 불길을 되살리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꽤 있다. 꿈속의 엘리엇 번즈와 이틀 전 본 엘리엇 번즈가 비슷하다고 느낀 건 그저 그의 눈 색이 비슷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가씨.”

간신히 기분을 진정시키는데 집사가 들어왔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가 들고 있는 작은 상자로 향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올리버의 시선도.

먼저 일어난 건 어머니였다.

“어머나, 렌시드 경이 선물을 보냈나 보구나.”

어닝이? 나는 그제야 잊고 있던 내 약혼자를 떠올렸다. 아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집사 빅스가 들고 있는 소포가 어닝이 보낸 게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누구예요?”

우습게도 내 목소리는 약간, 아주 약간 떨렸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저건 어닝의 방식이 아니다. 무엇보다 어닝은 아무 이유 없이 내게 선물을 보내지 않는다.

“엘리엇 번즈라는 분께서 보내셨습니다.”

빅스의 목소리는 마른하늘에 울려 퍼지는 천둥 같았다. 심장이 펄쩍 뛰어올랐다는 점에서는 똑같았고.

“번즈? 그가 유제니에게 선물을 보냈다고?”

어머니 역시 약간 놀란 목소리였다. 나는 굳은 채 앉아 빅스를 눈으로만 보고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소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기에 뭐가 들어 있을까. 상자는 얇았다. 저기에 들어갈 만한 게 있기는 한가?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지켜보던 올리버가 나서며 말했다.

“아는 사이야?”

“그럴 리가!”

어머니의 대답이 내가 말하기 전에 먼저 튀어나왔다. 나는 뒤이어 고개를 저으며 어쩔 수 없이 빅스에게서 소포를 받아 들었다.

대체 뭘까. 작은 상자는 크기만큼이나 가벼웠다. 내가 뜯기를 망설이자 올리버가 말했다.

“뜯어 봐.”

재촉까지 받자 뜯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올리버 앞에서 상자를 뜯었다.

“손수건?”

안에 든 건 손수건이었다. 물론 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귀퉁이에 내 이름이 수놓여 있기는 했다. 내가 인상을 쓴 채 손수건을 쳐다보고 있자 올리버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지난번에 네가 빌려준 손수건 아냐?”

“아냐.”

이쪽이 훨씬 비싼 손수건이다. 무도회에 가지고 가는 손수건은 보통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고급품을 사용하기는 한다.

번즈가 보낸 손수건은 그것보다도 훨씬 좋은 거였다. 나는 가장자리를 레이스로 꾸몄을 뿐 아니라 화려하게 수까지 놓인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기다리다 못한 어머니가 손을 내밀어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굉장히 좋은 거구나.”

아마 선물받을 수 있는 손수건 중에서 가장 고급품이지 않을까. 전체적인 자수를 보려는지 어머니가 손수건을 펼치자 안에서 작은 카드가 팔랑 떨어져 내렸다.

“뭐야?”

이번에는 올리버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나보다 빨리 바닥에 떨어진 카드를 집어 들더니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저 태도, 마음에 안 든다.

“올리버.”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도 오라버니를 지적하더니 그가 들고 있는 카드를 확인했다. 그리고 감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만큼 야만인은 아닌 모양이네.”

대체 뭐라고 쓰여 있길래 둘 다 이러는 걸까. 나는 올리버에게서 카드를 빼앗아 내용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우아한 글씨체로 내가 빌려준 손수건이 더러워진 것에 대한 사과와 베풀어 준 친절에 미흡하나 새것으로 되돌려준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네.

나는 생각만큼 야만인은 아닌 모양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이건 적어도 귀족과 같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쓸 수 있는 카드였다. 필체뿐 아니라 내용 또한 그러했다.

역시 그 꿈은 그냥 악몽이었던 모양이다. 예언이나 예지 같은 거창한 게 아니라.

며칠간 하도 날을 세우고 있었더니 맥이 탁 풀리면서 기운이 빠졌다. 나는 손수건을 어머니의 손에 맡긴 채 카드만 쥐고 가족실에서 빠져나왔다.

아직 오전이지만 좀 누워 있어야 할 것 같다.

“어디 안 좋으세요?”

내 방으로 들어오자 앤이 잠시 후 뒤따라 들어와서 물었다. 나는 창문 옆 긴 의자에 앉아 앤에게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좀 누워 있으려고. 이건 태워 줘.”

내 부탁에 카드를 받아 든 앤이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오늘따라 상자를 많이 보네. 그렇게 생각하는데 앤이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아까 누가 아가씨께 드리라고 전하고 갔어요.”

“누가?”

상자를 많이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오늘따라 선물을 많이 받는 모양이다. 앤은 내 손에 상자를 쥐여 주며 알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누구겠어요? 렌시드 경이겠죠!”

이번에도 역시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닝이라면 좀 더 시끄럽게 선물을 보냈을 거다. 어머니와 오라버니뿐 아니라 사교계에서 다 알도록.

그는 늘 그랬다. 그에게 선물을 받은 게 딱 세 번인데 그 세 번 다 커런트의 속삭임에 작게 실렸을 정도다.

“어닝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상자의 포장을 풀었다. 아까의 얇은 상자와 달리 이번 상자는 내 손 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포장을 풀자 안에 검은색 케이스가 보였다. 그냥, 딱 봐도 반지 케이스다.

“세상에, 렌시드 경께서 반지를 보내셨나 봐요.”

흥분한 앤의 말을 들으며 나는 내 왼쪽 약지에 낀 반지로 시선을 던졌다. 내게는 이미 약혼반지가 있다. 설마 결혼반지를 벌써 주려는 걸까?

금세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닝은 그 정도로 열정적이지 않다. 게다가 반지는 렌시드 자작 부인이 가지고 있고.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열자 그 안에 든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하게도 나와 앤이 예상한 결혼반지는 아니었다. 내가 인상을 쓰며 반지를 들어 올리자 앤 역시 고개를 바짝 대고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좀, 투박하네요.”

투박하다는 말이 딱 맞았다. 케이스 안의 반지는 남자용처럼 보였다. 크기뿐 아니라 디자인 또한 그러했다. 어디서 많이 본 디자인인데.

나는 내 엄지에도 약간 큰 반지를 손가락에 쥔 채 이런 반지를 어디서 봤는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반지에 문양이 새겨진 금속이 달려 있다.

이건…….

“인장 반지?”

어찌나 깜짝 놀랐던지 나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가까이에서 구경하던 앤이 그게 뭐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인장 반지는 말 그대로 인장이 달려 있는 반지다. 가문의 인장. 즉, 가문의 가주만이 가질 수 있는 거다.

“누, 누가 보냈다고?”

“어떤 남자가요. 그냥, 그냥 심부름꾼이었어요.”

“누가 보냈는지는 말 안 했어?”

나는 겁먹은 앤을 위해 침착하려 애썼다. 하지만 인장 반지잖아. 어느 미친놈이 이런 걸 다른 사람에게 보낸단 말이야?

겁에 질린 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가 보냈다는 말은 없었는데요. 당연히 렌시드 경께서 보내셨다고 생각했어요. 가져온 사람 이름이라면…….”

거기까지 말한 앤이 멈칫하더니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왜 그러는데? 나는 긴장한 채 앤을 쳐다봤다.

잠시 뒤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속삭였다.

“죄, 죄송해요, 아가씨. 심부름꾼 이름이 아니었나 봐요. 보낸 사람 이름이었나 봐요.”

“뭐였는데?”

내가 재촉하자 다시 앤이 망설였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요즘 자주 머릿속에 떠오르는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버, 번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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