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2 – 1
“전하, 엘리엇 번즈입니다.”
시종이 엘리엇을 데리고 간 곳은 국왕의 집무실이었다. 엘리엇은 자신의 기억과 약간 다른 집무실 안을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알현실보다 약간 작은 집무실은 커다란 책상이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현 국왕, 루퍼트 사운더키즈는 잘 차려입은 채 책상 뒤에 앉아 있었고.
아마도 무도회장에 참석하려 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엘리엇은 천천히 국왕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를 경계하며 따라온 에스컬레 경이 엘리엇을 막으려 했지만, 국왕은 지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에스컬레 경을 막았다.
그리고 엘리엇을 쳐다보며 물었다.
“번즈라니, 처음 듣는 이름인데.”
들어 본 적 없는 성이다. 루퍼트는 물론 왕비인 사일리시아와 국왕 부부의 가까운 신하들도 모르는 성이었다. 즉, 귀족이 아니라는 말이다.
엘리엇은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는 국왕의 반응에 씩 웃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엘리엇이 더 놀랐을 것이다.
그는 국왕에게 예를 표하지도 않고 말했다.
“귀족인지를 확인하시는 거라면, 아닙니다. 전하.”
그럴 줄 알았다. 국왕은 엘리엇의 얼굴을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말라붙은 피로 엘리엇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피에 엉겨 달라붙은 머리카락도 그의 인상을 더욱 무시무시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국왕을 못마땅한 기분으로 만드는 건 엘리엇의 무시무시한 인상이 아니라 그럼에도 그의 외모가 잘난 게 드러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루퍼트와 사일리시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나라가 멸망한다느니 하는 불쾌한 예언을 하는 멍청이도 있고.
“다아리브혼의 전언을 가져왔다고 들었는데.”
국왕은 그렇게 물으며 책상 위에 놓인 왕관을 쳐다보았다. 엘리엇이 오기 전에 시종이 가져온 것이다. 엘리엇은 국왕을 따라 왕관을 쳐다보았다.
“진품인지 확인하셨습니까?”
엘리엇의 질문에 국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 이 밤에 사람을 불러와서 진품인지 확인시키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물론 보석이 진짜인지 따위를 확인한 게 아니다. 이 왕관은 백여 년 전에 루퍼트의 증조부가 다아리브혼에게 선물로 보낸 거였다.
말이 선물이지 쉽게 말해서 공물이다. 이 나라를 어지럽히지 말아 달라는 의도에서 보낸 수많은 보석 중 하나였다. 특히 이 왕관은 다아리브혼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거였고.
“그래. 자네가 정말 다아리브혼을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아리브혼의 둥지에 다녀왔거나 다녀온 사람을 만났다는 증거는 되겠지.”
영리하군. 엘리엇은 미소를 띤 채 그렇게 생각했다. 이게 백여 년 전 발시안의 국왕이 다아리브혼에게 보낸 선물이라고 해서 그걸 엘리엇이 다아리브혼에게 직접 받았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물론 그는 다아리브혼에게 직접 받은 게 맞았지만.
“필요하다면 다아리브혼에게 확인하시는 걸 기다리겠습니다.”
“됐네.”
엘리엇의 건방진 말에 국왕은 한숨을 내쉬며 거절했다. 그가 엘리엇을 만나기로 한 건 엘리엇이 이 왕관을 가져왔기 때문이 아니다. 이 왕관이 진짜라서도 아니고.
“들여 보네.”
국왕의 지시에 병사들이 한 남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걱정 근심으로 수척해진 남자의 얼굴을 처음에는 엘리엇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연 순간, 엘리엇은 그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전하, 제가 드린 이야기는 진짜입니다.”
저먼은 들어오자마자 책상 앞에 매달리다시피 다가와 애원하기 시작했다. 루퍼트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엘리엇에게 물었다.
“말해 보게, 번즈. 다아리브혼의 전언이 무엇인가. 이 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던가?”
그제야 엘리엇의 이름을 들은 저먼은 저도 모르게 “힉” 하고 작게 신음을 냈다.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엘리엇 번즈를 알고 있었다.
번즈도 저먼을 알고 있을까?
그럴 리 없다. 저먼은 번즈가 자신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그는 번즈와 만난 적도, 그의 이름을 들은 적도 없다. 현실에서는.
그가 발시안이 몰락하는 것을 보고 번즈를 알게 된 건 모두 그의 꿈속에서였다. 물론 꿈속에서도 저먼은 번즈와 몇 번 마주쳤을 뿐 이야기를 깊게 나눈 적은 없다.
“그 반대입니다. 다아리브혼이 이번만은 넘어가겠다고 하더군요.”
예상하지 못한 말에 루퍼트는 물론 저먼의 얼굴에도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이번만은 넘어가겠다니? 무슨 소린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국왕의 재촉에 엘리엇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제야 집무실 안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돌아보기 시작했다.
익숙한 얼굴이 몇 보인다. 물론 저들 중에 엘리엇을 아는 자는 없을 것이다. 아, 그의 옆에 있는 저먼을 빼고.
엘리엇은 저먼이 그를 발견하고 놀라는 것을 봤다. 여기 있는 사람이 엘리엇을 보고 놀란다는 건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그도 꿈을 꿨다는 것.
엘리엇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저먼이 어떤 꿈을 꿨을지 매우 궁금해하며 입을 열었다.
“말하기 황송하오나.”
전혀 황송해 보이지 않는다. 엘리엇이 말하는 것을 보며 국왕은 물론 집무실 안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다.
엘리엇 번즈는 귀족이 아니라고 말했음에도 귀족이 사용할 만한 어려운 단어를 무리 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태도는 귀족이라고도 평민이라고도 보기 어려웠다.
귀족이라고 치기엔 너무 건방졌고 평민이라고 치기엔 오만했다.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에스컬레 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전하께서도 익히 아시고 이 방 안의 사람 모두가 아는 어떤 고귀한 자제분께서 다아리브혼의 분노를 샀지 뭡니까.”
집무실에 있는 사람들은 잠시 엘리엇이 빈정거리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럴 리 없다. 감히 지엄하긴 국왕 전하의 앞에서 한낮 평민 따위가 빈정거릴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엘리엇 번즈는 빈정거리고 있었다. 그는 국왕 루퍼트가 아닌 그의 옆에 선 공작, 거마로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자신을 향하는 시선에 거마로트 공작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저 건방진 평민이 뭐라고 하는 거지?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뿐인 그의 아들, 힐데자르.
몇 주 전 친구와 여행을 하겠다며 떠난 아들이 공작 부인에게 이상한 편지를 보냈다고 들었다. 근방에 드래곤의 둥지가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돌아갈 때 드래곤의 보물을 잔뜩 가져가겠다고 써 놨다며 공작 부인이 지난주에 보여 줬다.
젠장. 내가 뭐라고 했지? 거마로트 공작의 머릿속에 지난주의 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부인이 귀찮게 굴길래 그의 아들도 벌써 서른이니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라고 대충 대답했던 것 같다.
“다아리브혼의 분노를 샀다는 그 멍청이가 누구지?”
국왕이 그렇게 말한 순간, 거마로트 공작은 자신이 부인에게 그게 진짜 둥지일 리 없다고 짜증을 낸 게 생각났다. 설령 진짜 둥지라 해도 고작 친구 몇 명과 여행을 떠난 아들이 어떻게 둥지에 들어가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그게 진짜 드래곤의 둥지라면? 그의 멍청한 아들이 그 순간만큼은 머리가 돌아가서 용병을 잔뜩 고용해서 들어갔다면?
진짜 머리가 돌아갔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도로 돌아왔을 테지만 거마로트 공작은 제 아들이 영리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국왕에게 말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전하.”
사람들의 시선이 공작을 향했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번즈의 표정이 웃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게 거마로트 공작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다행인 것은 저 작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드래곤의 용서를 받아 왔다는 거다. 거마로트 공작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들의 멍청한 짓은 그가 돌아오는 대로 혼내면 그만이다.
지금은 아들의 멍청한 짓 때문에 자신이 곤란해지지 않게 하는 거다.
“다아리브혼이 분노를 거두었다는 거죠. 이자의 예언이 틀렸다는 말입니다.”
거마로트 공작의 말에 저먼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동시에 집무실 안의 모든 사람이 저먼을 쳐다봤다. 딱 한 명, 엘리엇만 빼고.
“저는, 하지만, 이자가…….”
저먼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가 예언했다. 발시안은 앞으로 십 년 안에 몰락한다. 몇 달 뒤 분노한 다아리브혼이 발시안을 공격하고 그 결과 왕족 대부분이 사망하게 된다.
그 예언이 방금 다아리브혼의 용서를 받아 왔다는 번즈에 의해 무산된 것이다.
“그렇군.”
루퍼트는 엘리엇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알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어느 멍청이의 자식이 감히 다아리브혼을 화나게 했다는 것. 그리고 그걸 그의 눈앞에 있는 남자가 해결했다는 것.
“설마, 드래곤을 물리친 건 아니겠지?”
국왕의 질문에 엘리엇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전하의 선조께서도 실패한 일 아닙니까?”
용사 발시안도 사악한 드래곤 크리사를 대륙의 끝으로 쫓아내기만 했을 뿐 물리치지는 못했다. 엘리엇의 지적을 알아들은 에스컬레 경이 제일 먼저 외쳤다.
“무엄하다!”
잠시 집무실의 분위기가 차갑다 못해 얼어붙었다. 거기서 화내지 않는 건 엘리엇뿐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국왕이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했나.”
“다아리브혼의 자식을 구했습니다.”
다아리브혼에게 자식이 있었어? 집무실 안의 사람들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국왕을 쳐다봤다. 이 대륙에 드래곤이 둘이나 있지만 둘 다 아직 자식은 없다. 그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다아리브혼이 자식을 낳았다면 대륙의 드래곤은 무려 셋이 된다. 그것도 갓 태어난 드래곤이 생긴 거다.
엘리엇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야기를 빨리 진행하기 위해 말했다.
“아직 알 상태니 깨어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겁니다.”
“그, 그럼 알이 깨어나기 전에 없애야…….”
놀란 거마로트 공작이 그렇게 외치다가 멈칫했다. 잠깐. 그가 이상한 점을 깨달은 순간 엘리엇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 알을 건드리려다 이 사달이 날 뻔했다는 사실을 아직 이해 못 하신 분이 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