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1 – 4
그 순간, 연기 안에서 나타난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젠장. 내 목소리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나는 미스시퍼 부인이 도망칠 수 있도록 재빨리 손을 놓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부인?”
저 남자가 어찌나 세게 밀었는지 그녀의 소매가 다 구겨져 있었다. 미스시퍼 부인은 내 질문에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어느새 벽 쪽으로, 출입구 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어쩌면 이미 밖으로 나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이 좀 열려 있었으니까.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무도회장 밖으로 도망쳐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을 멈추게 한 것은 에스컬레 경의 용감한 외침이었다. 그의 질문이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향하자 주춤거리던 사람들은 물러나는 것을 늦추기 시작했다.
“저자들은 대체 누굴까요?”
미스시퍼 부인이 내게 속삭였다.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차였다. 나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의 복장을 살피며 말했다.
“용병 같은 차림새네요.”
솔직히 말하면 좀 더러운 용병 같았다.
어쩌면 의상은 저들의 몸에 묻어 있는 어떤 것 때문에 더러워 보이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저건 절대 물이 아니다.
전에 비 오는 날 훈련하는 병사들을 본 적이 있는데 좀 고생스러워 보이긴 했어도 저렇게 거무튀튀한 색으로 물들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들고 있는 무기는 확실히 용병 같았다. 꽤 많은 수가 검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창이나 몽둥이 같은 것도 많았다. 가끔은 대체 어떻게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용병이라고요?”
미스시퍼 부인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는 왕궁의 무도회장이다. 저런 공간 이동 류의 마법은 모두 막혀 있다. 그러니 다들 국왕 전하가 어떤 이벤트를 벌인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고.
에스컬레 경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잠시 홀 가운데에 나타난 사람들을 살펴보더니 물었다.
“기사단인가? 어디 소속이지?”
그러자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일제히 어느 한 곳을 쳐다봤다. 거기에는 무섭게 생긴 투구가 있었다.
문제는 그 투구 안에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는 점이고.
“상대의 소속을 확인할 때는 자신을 먼저 소개하는 게 예의였다고 기억하는데.”
이윽고, 투구 안에 든 머리가 낮은 목소리로 약간 느리게 말했다. 저 머리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네.
나는 무섭게 생긴 투구를 쓴 남자가 얼마나 큰지 가늠하며 생각했다. 보통 남자들보다도 머리 하나 정도는 큰 것 같다.
거기에 남자가 쓴 투구에 뿔이 두 개 길게 달려 있어서 남자는 더 커 보였다. 그의 말에 에스컬레 경이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검은 늑대 기사단의 단장, 로인 에스컬레다. 네 이름은 뭐지?”
“에스컬레 경.”
에스컬레 경을 쳐다보고 있어서 남자의 얼굴이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쓰고 있는 투구나 커다란 키와 몸이 꽤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어느새 내 손을 잡고 가늘게 떨고 있는 미스시퍼 부인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겁을 먹는 게 당연하다. 나도 무서웠다.
내 마음속은 이게 국왕 전하가 준비한 이벤트일 거라는 믿음과 저 사람들이 어쩌면 침입자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혼재되어 있었다. 만약 후자라면 당장 도망치는 게 더 현명한 일일 것이다.
저자들이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엘리엇 번즈.”
그때, 투구를 쓴 커다란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묵직한 말투와 목소리에 나는 그가 입에 올린 단어가 그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약간 필요했다.
엘리엇 번즈. 번즈라는 귀족은 없다. 그렇다면 저자는 평민이라는 뜻이다. 다시 무도회 안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엘리엇 번즈라고 소개한 남자가 무도회장 안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 순간,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를 알고 있었다. 어젯밤과 며칠 전 내 꿈속에 나타나 내 가족들을 죽여 버린 살인마.
짙은 눈썹과 깎은 듯한 턱. 시린 듯한 푸른색 눈동자와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커다란 남자.
“레이디 비스컨?”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공포감에 몸이 얼어붙은 탓에 나는 바로 옆에 선 미스시퍼 부인의 부름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디 비스컨, 괜찮아요?”
가까스로 나는 내 손을 잡은 채 흔들며 속삭이는 미스시퍼 부인의 말을 알아들었다. 내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미스시퍼 부인이 나를 뒤쪽으로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이쪽으로 와요. 저 남자, 이쪽을 쳐다보고 있어요.”
그제야 번즈와 내 눈이 부딪친 채 꽤 오랫동안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입 안에서 쇠 맛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꿈이다. 꿈이었다. 우리는 실제로 만난 적도 없고, 오늘 처음 보는 거다.
그런가? 공포심에 휩싸인 채 나는 내가 엘리엇 번즈를 만난 적이 있던가 하고 생각했다.
만난 적 없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저 남자의 꿈을 꾼 거지? 그것도 저 남자가 내 가족들을 죽이는 꿈을?
“국왕 전하께 올릴 전언이 있는데.”
내가 공포에 질려 내 머릿속을 뒤지는 사이, 번즈의 시선은 천천히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가 시선을 거둔 뒤에야 내가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내가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를 꿈에서 보고 겁에 질린다는 게 말이 되나?
“국왕 전하?”
번즈의 말에 에스컬레 경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한숨 돌리고 나자 나는 줄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에스컬레 경은 하나뿐인 딸을 매우 사랑한다. 줄리아를 혼자 두고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과 대적하러 나올 리가 없다.
까치발을 하고 에스컬레 경의 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확인한 뒤에야 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줄리아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에스컬레 경이 누구에게 줄리아를 부탁했는지도.
“헉.”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줄리아는 어머니 옆에 서 있었다. 그 앞에 올리버가 두 사람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서 있었고.
그 모습을 보자 다시 공포심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찌나 두렵던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꿈에서 저 남자는, 엘리엇 번즈는 막아선 하인들을 쓰러트리고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해쳤다. 그게 꿈이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비이성적인 공포심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사람들 앞으로 뛰어나가려다가 내 손을 잡고 있는 미스시퍼 부인 덕분에 멈출 수 있었다.
어, 어떻게 하지? 어머니와 올리버는 에스컬레 경의 뒤쪽에서 약간 빗겨 나간 곳에 서 있다. 만약 저 남자가 아까 전처럼 무도회장 안을 훑는다면? 아니, 에스컬레 경을 보다가 어머니와 올리버를 발견한다면?
다시 한 번 머릿속에 지난번 꿈이 오버랩되었다. 막아서는 하인들을 물리치고 거침없이 올리버와 어머니에게로 다가가던 무시무시한 엘리엇 번즈가.
“다아리브혼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만.”
엘리엇 번즈가 그렇게 말한 순간 무도회장 안에 “헉” 하는 신음이 울려 퍼졌다. 다아리브혼이라고? 나는 가정 교사에게 역사 수업을 들을 때 이후로 처음 듣는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다아리브혼? 드래곤 말이오?”
에스컬레 경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어머니와 번즈를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지금 그의 모습은 꿈에서 본 모습과 좀 달랐다. 게다가 여기에는 에스컬레 경과 다른 기사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로는 안정이 되지가 않았다. 꿈에서 저 남자의 앞을 막아서던 하인들이 전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게 만약 예지몽 같은 거라면 어쩌지?
유제니 비스컨! 너는 상식을 가진 지식인이고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잖아?
머릿속에서 두 가지 내가 싸우기 시작했다. 내 꿈이 예지몽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나와 예지몽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내가.
그때, 번즈의 시선이 에스컬레 경의 뒤쪽을 향했다. 안 돼.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번즈 씨.”
순식간에 무도회장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작게 소곤거리던 사람들도, 슬그머니 물러나던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도 모두 뚝 그쳤다.
그리고 어머니와 올리버를 향하던 번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깊게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엘리엇 번즈는 확신하는 듯 망설임 없이 내게 다가왔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그가 입을 연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나를 아나?
엘리엇 번즈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나를 조롱하기까지 했다. 다시 한 번 꿈이 생각났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다가 이상한 기분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저 멀리 물러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서 물러난 것을 보고 안심해야 할지 겁을 집어먹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안심하기로 했다.
어차피 겁은 너무 많이 먹어서 더 먹을 수도 없을 것 같거든.
“내가 당신을 알던가요?”
내가 미친 모양이다. 아니면 겁을 너무 많이 먹어서 오히려 진정됐거나. 약간의 유머 감각이 돌아오자, 나는 인상을 쓰며 물었다.
우리는 지금 처음 봤고 그가 내 이름을 알 리가 없다. 그러니 고귀한 레이디라고 조롱할 이유도 없다.
내 질문에 엘리엇 번즈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더니 조용히 말했다.
“아니요.”
예의 바른 대답이다. 내 꿈은 물론 조금 전 에스컬레 경에게 보이던 행동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나는 에스컬레 경을 대할 때와는 정반대로 예의 바르고 얌전하게 대답하는 번즈를 보고 다시 인상을 썼다.
이상한 남자였다. 거무튀튀한 것이 묻은 얼굴에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마치 나를 꿰뚫어 보듯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면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이상한 시선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런 시선이었다.
“레이디께서 부르셨잖습니까.”
하지만 번즈는 내 질문을 오해한 모양이다. 그는 내 왜를 왜 왔냐고 받아들인 것처럼 대답했고 나는 그제야 내가 그를 불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젠장. 그의 시선에서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보호하기 위해 불렀을 뿐이다. 나는 그의 등 뒤로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머니를 찾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이 남자가 내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보지 못해야 한다.
“전하를 알현하고 싶다면…….”
나는 떨지 않으려 애쓰며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앤은 항상 여기에 손수건을 넣어 준다. 나는 번즈가 뒤돌아보지 못하도록 하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얼굴은 닦는 게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