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39)

3화. 1 – 3

주제를 바꾸고 싶었는지 줄리아가 불쑥 물었다.

그러게. 왕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인 만큼 왕족이 시작 선언을 해야 한다. 덕분에 무도회장에 가득 찬 사람들은 다들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를 기다리느라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만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몸이 안 좋으신 건 아니겠죠?”

줄리아의 질문에 에스컬레 경이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현 왕인 루퍼트 왕이 병에 걸렸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그럴 리가요.”

그때, 곁에 있던 부인이 끼어들었다. 우리가 인사를 하자 그녀는 고개를 까닥하더니 줄리아를 향해 말했다.

“국왕 전하께서는 요정 마고의 후예신걸. 병 따위에 걸리지 않아.”

“하지만…….”

줄리아가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 했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줄리아의 손을 잡아당겼다. 물론 내가 그 말을 믿어서 그녀를 말린 건 아니다. 여기는 왕궁 무도회고 여기서 국왕 전하의 조상에 대해 의문을 품는 건 한여름에 드레스를 껴입고 춤을 추러 오는 거나 마찬가지로 멍청한 짓이기 때문이다.

아, 두 번째 멍청한 짓은 이미 하고 있네.

“하지만 공주님은 원래 몸이 약했다면서요?”

줄리아가 내게 속삭이며 물었다. 그걸 알아? 현 왕인 루퍼트 왕의 누나인 제네비브는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녀가 무사히 성인이 되어 이웃 나라인 뉴커크로 시집간 게 다행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제네비브 공주가 뉴커크로 시집간 건 내가 태어난 해의 일이다. 그러니 줄리아가 제네비브 공주의 이야기를 안다는 게 좀 신기했다.

내가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을 짓자 줄리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카데미에서요. 역사 교사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거든요.”

“그런 이야기?”

“요정이니 드래곤이니 하는 거요.”

“발시안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거긴 하네.”

이 땅에서 흉포하게 굴던 드래곤을 물리친 영웅 발시안. 그리고 그의 동료이자 연인인 요정 마고.

발시안은 드래곤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마고는 연인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위해 요정의 세계로 떠나지 않고 이곳에 남았다.

그리하여 세운 나라가 발시안이다. 현 왕은 그 요정 마고가 발시안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의 후예고.

나는 무도회장에 걸린 발시안과 마고의 초상화로 시선을 던졌다. 요정이라는 말 때문인지 마고는 나비 날개 같은 걸 달고 있었는데 저건 물론 화가가 상상해서 완성한 그림이다.

“내 생각이지만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 두 분 모두 아직 오지 않으시는 건 최근에 나타난 예언자 때문인 것 같아요.”

미스시퍼 부인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예언자라면 나도 안다. 간혹 무도회나 다과회의 여흥을 위해 개최자가 예언자니 점쟁이니 하는 사람들을 불러오곤 한다.

그리고 대부분 별 볼일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스스로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실제로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진짜 미래를 볼 수 있다면 그걸 굳이 타인에게 알려서 돈을 벌 필요가 있을까?

“예언자요?”

줄리아의 호기심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스시퍼 부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 나라의 미래와 관련한 엄청난 예언을 하겠다고 했다는군요.”

“엄청난 예언이요?”

이번에는 내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나라의 미래에 대한 엄청난 예언이란 뭘까. 발시안에는 딱히 문제가 없다. 그러니까 군사력이나 경제, 재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현 왕에게는 아들이 있으니 후계 문제도 해결됐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예언이 엄청날 정도가 되려면 나라가 망하는 정도는 되어야 할 거다.

아니, 그건 너무 심한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국왕 앞에서 댁의 나라는 곧 망할 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글쎄요. 전하께 뭐라고 했는지까지는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들은 게 그가 전하를 알현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거든요.”

어쩌면 지금쯤 국왕 전하를 만났을 수도 있다는 미스시퍼 부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 예언자라는 사람이 국왕 전하를 만났다면 예언을 들은 전하의 기분이 좋지 않아서 마음을 다스리느라 늦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국왕 전하가 마음을 다스리게 할 정도로 불쾌한 예언이라면 역시 나라가 망한다는 정도겠지. 아니면 국왕 전하의 죽음이나.

그 둘을 전하의 앞에서 말할 수 있다니, 그 예언자는 과도하게 용감하거나 미쳤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타인에게 예언을 한다는 건 결국 둘 중 하나기 때문이다.

“실례. 저기 인사할 사람이 있어서요.”

아는 사람을 봤는지 에스컬레 경이 나와 미스시퍼 부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떠났다. 줄리아는 여기 남아서 미스시퍼 부인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에스컬레 경이 데리고 가 버렸다.

미스시퍼 부인은 자리를 뜨는 에스컬레 부녀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여운 것. 에스컬레 경도 딸의 혼사 때문에 걱정이 많겠어.”

“아직 열여덟 살인걸요.”

나는 미스시퍼 부인의 걱정에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스시퍼 부인이나 어머니 시절이라면 모를까 요새는 다들 이십 대쯤에나 결혼을 한다. 나도 마찬가지고.

“하긴, 우리 때나 스무 살이면 노처녀라고 그랬지.”

내 생각대로 미스시퍼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때는 그랬다고 들었다. 어차피 귀족들은 어릴 때 약혼이 결정되니까.

하지만 최근에는 좀 달라졌다. 아카데미에 귀족들이 자기 자식들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결혼 나이가 열아홉 살 이후로 늦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는 이러다가 귀족 아가씨들이 일도 하겠다고 한탄하셨지만 나는 꽤 괜찮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온종일 앉아서 수를 놓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그래도 너무 늦게 결혼하는 건 좋지 못해요. 태어날 아이도 생각해야지.”

흰장미회의 모임을 생각하느라 나는 미스시퍼 부인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있었다.

“약혼자가 누구였죠?”

그래도 나는 그녀가 내 약혼자가 누군지 물었을 때 재빨리 대답했다.

“렌시드 경이요. 어닝 렌시드 경.”

“오, 렌시드 자작가의 장남 말이죠? 괜찮은 청년이에요. 좀 호리호리하긴 하지만.”

다들 그렇게 말한다. 어닝은 키가 큰 편이지만 좀 말랐다. 미스시퍼 부인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말로 나를 위로하려 했다.

“결혼하면 좀 찌겠죠. 걱정하지 말아요.”

내 남편이 마른 걸 내가 왜 걱정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저기 봐요.”

국왕 전하께서 오신 모양이다. 재빨리 자세를 고치고 옷차림을 정돈한 나는 고개를 들어 왕족 출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거기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뭐예요?”

나보다 늦게 사람들의 이변을 깨달은 미스시퍼 부인이 물었지만 나도 무슨 일인지 몰라서 알려 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조용히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 곳으로 향했고 무도회장 한가운데에서 놀라운 광경을 발견했다.

“어머.”

“무슨 이벤트일까요?”

무도회장 한가운데는 마치 춤을 추기 시작한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둘러싼 가운데 공간에서 손수건 하나가 빙글빙글 공중에서 돌고 있었다.

“바람이 부네요?”

“창문을 열어 놨나?”

“하지만 다른 곳은 바람이 없는걸요.”

사람들의 말대로 바람은 무도회장 한가운데에서만 소용돌이를 그리며 불고 있었다. 이럴 수도 있나?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곧, 이게 어떤 이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왕 전하께서 드라마틱한 등장을 하기 위해 마법을 이용한 게 아닐까. 공간 이동 마법은 이런 이벤트를 위해 사용하기엔 좀 비싼 마법이지만 여기는 왕궁이 아니던가.

여흥을 위해 그 정도 비용을 낼 수도 있다.

“물러나요.”

손수건이 좀 더 크게 원을 그리며 날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저 손수건이 누군가를 해칠 것 같지는 않지만, 저 바람이 마법으로 생성된 거라면 좀 불길하다.

마법사의 탑이 수도에 세워진 지 이백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마법은 일반인들에게는 좀 신비롭고 가까이하기엔 불편한 존재였다.

사람들이 물러나는 동안 손수건은 점점 더 크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거 설마 왕궁에서 준비한 이벤트가 아닌 게 아닐까?

나는 손수건이 그리는 원 안에 국왕 전하의 세 가족이 열 팀 정도는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펑!

손수건이 그린 원 안에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내 옆에 서 있던 미스시퍼 부인이 깜짝 놀라서 내 손을 잡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곧이어 사람들이 박수와 함께 작은 함성을 질렀다.

“세상에!”

“와!”

다들 연기 안에서 나타나는 게 국왕 전하 가족일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욱하던 연기가 가라앉고 수많은 사람의 머리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함성과 손뼉 치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뭐죠?”

“국왕 전하가 아닌 것 같은데요?”

“세상에, 이게 무슨 냄새야?”

금세 무도회장 안에 형언하기 어려운 악취가 차올랐다. 이게 대체 무슨 냄새지? 나는 부채로 냄새를 흐트러트리려 노력했지만, 곧 그 냄새가 연기 속에서 나타난 수많은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구간 냄새와 비슷했다. 그러면서 가끔 주방에서 닭이나 돼지를 해체할 때 나는 냄새와 약간 닮았기도 했다.

“누, 누구냐!”

제일 먼저 나타난 사람들의 정체를 확인한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상대의 정체를 물어본 사람이 에스컬레 경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연기 속에서 나타난 사람이 국왕 전하 가족이 아니고 어쩌면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사람 살려!”

“경비! 경비!”

순식간에 도망치려는 사람들로 혼잡이 일어났다. 사람들에게 밀리는 통에 나는 도망치기는커녕 넘어지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아이고, 세상에!”

나를 잡고 있던 손이 쭉 밀렸기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미스시퍼 부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쳐다보자 웬 남자가 그녀를 밀고 도망치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보였다.

신사도는 다 어디로 간 거야? 나는 반사적으로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어른 공경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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