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1 – 2
“어제 또 악몽을 꿨다며?”
그날 저녁, 왕궁에서 개최된 무도회에서 만난 올리버가 히죽대며 내게 물어 왔다. 어떻게 안 걸까.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약간 거칠게 부채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잰 체하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더라.”
“날 걱정하시는 게 아니라 오라버니 보고 일찍 들어오라고 하시는 거겠지.”
내 공격에 올리버의 얼굴에 어렸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제도 올리버는 클럽에서 잤다. 그나마 클럽에서 방을 잡아 잤으면 다행이지, 분명 친구들과 밤새도록 카드 게임을 하다가 그대로 게임 테이블에 엎어져 잤을 거다.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집을 얻어서 나가지 그래?”
올리버 나이쯤 된 귀족 남성 중에 집을 얻어서 나가 사는 사람이 종종 있다. 기혼이면 당연한 거고 미혼이어도 독신자 주택을 얻어 나간다.
내 지적에 올리버의 얼굴에 다시 잰 체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나와 올리버가 닮지 않아서 다행이야. 저 미소가 얼마나 재수 없는지 아는 만큼 나도 저렇게 재수 없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밤마다 내 어린 동생이 악몽을 꾸고 운다는데 내가 어떻게 널 두고 나갈 수 있겠니?”
말은 잘한다, 정말. 나는 뻔뻔한 오라버니의 핑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는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 들어와?”
잠을 자는 횟수로 집을 고른다면 올리버의 집은 비스컨 저택이 아니라 남성 귀족 클럽인 ‘높은 모자 클럽’일 거다. 아, 식사를 한 횟수로 쳐도 마찬가지겠군.
내 지적에 올리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승리를 예감했다. 그때, 마서 부인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온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이게 다 린가르드 저택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야. 불쌍한 린가르드 부인은 잘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지금쯤 도착하지 않았을까요? 린가르드 부인의 친정이 어디라고 했죠?”
주제를 바꿀 기회가 오자 오라버니는 재빨리 낚아챘다. 나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의 이야기에 동참했다.
린가르드 저택은 세이마리아 거리에서 한 블록 떨어진 에스컨 거리에 있는데 얼마 전에 강도가 들어서 난리가 났다.
에스컨 거리는 세이마리아 거리 다음으로 안전한 거리인 데다가 린가르드 저택은 린가르드 남작 부부가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새벽에 린가르드 저택에 강도가 들었고 누군가가 남작의 머리를 세게 내리쳐서 그를 기절시켰다고 들었다. 남작 부인은 누군가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서재로 도망친 덕분에 피해를 입지 않았고.
“넛거텔. 여기서 마차로 일주일쯤 걸리니까 지금이면 도착했겠지. 하지만 신경을 안정시켜야 할 테니까 편지는 며칠 더 있어야 쓸 수 있을 거야.”
어머니의 말에 나와 올리버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범인은 못 잡은 거죠?”
그러자 어머니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내 손을 잡고 손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유제니. 곧 잡겠지.”
나는 어머니가 내가 악몽을 꾸는 것을 걱정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올리버의 말대로 어머니는 내가 린가르드 저택의 사건 때문에 악몽을 꾼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악몽을 처음 꾼 건 린가르드 저택에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이었으니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그래서 하인들에게 휴가를 동시에 주면 안 되는 거야.”
린가르드 저택에 강도가 든 날, 린가르드 남작 부인은 모든 사용인에게 휴가를 주었다. 그날 아침 집사를 뺀 모든 사용인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저택에서 나갔다고 한다.
결국, 강도가 들었을 때 그 저택에 남아 있던 사람은 린가르드 남작 부부와 집사뿐이었다고 한다.
“누군가가 강도를 끌어들였을 수도 있어.”
올리버의 말에 어머니가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모든 사용인이 휴가로 저택을 비운다는 걸 강도가 알았다면 누군가가 알렸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나는 인상을 썼고 어머니는 그런 나를 위로하려는 듯 덧붙였다.
“걱정 말렴. 우리는 다 믿을 수 있는 사람만 있으니까 말이야.”
그건 린가르드 남작 부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니까 생각났는데요.”
그때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그는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들었는데 레이디 데번이 미쳤대요.”
“올리버!”
오라버니의 말에 어머니가 깜짝 놀라 핀잔을 놓았다. 미쳤다니, 너무 과격한 단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는 올리버의 팔을 찰싹 때리며 덧붙였다.
“귀족답게 말하렴.”
“아, 예에. 고귀하신 레이디 데번이 그만 정신을 놓아 버렸답니다.”
“올리버!”
다시 한 번 어머니가 올리버의 팔을 찰싹 때렸고 나는 웃어야 할지 인상을 써야 할지 망설였다. 고귀한 레이디라니, 레이디 데번은 나와 같은 백작가의 딸이고 우리의 호칭은 레이디다.
고귀한 레이디는 공주나 공작가의 딸에게 쓰는 호칭이라 조금 전 오라버니의 말은 일종의 비아냥이었다.
“그나저나 레이디 데번이면 밀리를 말하는 거지? 유제니, 너랑 같은 모임에 있지 않았니?”
“네.”
나와 밀리는 흰장미회에 소속돼 있다. 귀족 아가씨들의 봉사 모임이다. 물론 봉사만 하는 건 아니고 비정기적으로 모여 차를 마시기도 한다.
하지만 밀리와 그리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마지막으로 봤던 밀리의 모습을 떠올리는 데 약간 고생했다. 그때 특이한 언행을 보였던가?
“별다른 변화는 없었던 것 같은데요.”
흰장미회의 마지막 모임은 2주 전이었다. 정기 모임이 아니었고 시간 되는 사람들만 회장의 집에 모여서 차를 마시는 모임이었는데 늘 그렇듯 대부분이 참석했다.
그리고 밀리가 딱히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했던 기억은 없다. 사실, 지금 이 순간 떠올리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밀리에 대해 잊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한 타입이고 다른 귀족 아가씨들과 마찬가지로 평탄하게 살았다. 그녀의 이름이 사교계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이유가 약혼 소식 때문일 정도로.
딱히 약혼이 유별났다거나 그녀가 독특한 상대와 약혼해서는 아니다. 밀리의 약혼자는 볼티고르 경이라고 밀리와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냥, 원래 사교계는 누군가의 연애와 약혼, 결혼에 열을 올린다.
“그 가여운 아가씨가 정신을 놓아 버렸다니, 안됐구나.”
어머니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정신을 놓았다니, 무슨 짓을 한 걸까. 나는 늘 조용하던 밀리를 떠올리며 그녀가 미쳤다는 말을 들을 만한 행동을 하는 것을 상상했다.
하지만 영 상상이 되질 않는다.
“볼티고르 자작가에서는 어떻게 나올까요?”
올리버의 질문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게. 결혼 뒤라면 모를까 밀리는 볼티고르 경과 아직 약혼 중이다.
“파혼하겠지.”
어머니의 한숨 섞인 말에 나도 따라서 한숨이 나왔다. 밀리가 안타까웠다. 그리고 얼굴밖에 모르는 볼티고르 경도.
“그보다, 올리버. 남의 약혼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야.”
밀리와 볼티고르 경의 안타까운 사연에 한숨 짓던 것도 잠시. 어머니는 올리버의 어깨를 부채로 찰싹 때리더니 한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저기로 좀 가자.”
어머니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자 과연, 미혼인 아가씨들이 동반자들과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이런 무도회의 목적은 단연 배우자를 찾는 거다.
그리고 몇 달 전에 약혼한 나와 달리 올리버는 아직 약혼은커녕 혼담이 오가는 가문도 없고.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머니께 끌려가는 올리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원래대로라면 올리버의 약혼이 나보다 빨랐어야 한다. 이게 다 올리버가 늦장을 부린 탓이겠지.
“잠시 혼자 있을 수 있겠니?”
올리버를 데려가며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다. 하지만 가끔 어머니가 내게 하는 행동을 보면 다섯 살짜리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럼요.”
나는 어머니의 걱정에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저쪽에 어닝도 있는걸요. 여차하면 어닝에게 갈게요.”
그제야 어머니는 절친한 친구와 함께 있는 어닝을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올리버와 함께 미혼 여성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향했다.
“유제니, 혼자 왔니?”
어머니가 떠나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 왔다. 어머니의 먼 친척인 에스컬레 경과 경의 딸인 줄리아를 발견한 나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에스컬레 경. 그리고 줄리아.”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줄리아는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소녀답게 사랑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드레스를 칭찬하고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잠시 저쪽으로 갔다는 것을 에스컬레 경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에스컬레 경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올리버는 아직 마음에 드는 여성분을 못 찾았나 보구나?”
“안타깝게도요.”
나는 과도하게 안타깝다는 태도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스컬레 경은 그런 내 태도에 씩 웃더니 줄리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 줄리아가 아내감으로 어떠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아버지!”
내 눈이 동그래지는 것과 동시에 줄리아가 버럭 소리쳤다. 아이고, 저런. 나는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변한 것을 못 본 척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에스컬레 경은 말뿐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얼굴이 새빨개진 자신의 딸을 보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올리버에게 대기엔 이 녀석이 너무 왈가닥이라서 말이야.”
어지간히 창피했던지 몸을 배배 꼬는 줄리아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에스컬레 경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 줄리아에게 들어오는 혼담을 모두 거절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핑계야 물론 아직 줄리아가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았다는 거지만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다. 아내를 잃고 혼자 딸을 키운 에스컬레 경이 좀 더 딸과 오래 지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줄리아야 완벽하죠. 올리버가 너무 나이가 많아서 그렇지.”
내 생각대로 에스컬레 경은 내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비스컨 백작가가 탐이 나기도 하겠지만 올리버는 줄리아에 비해 나이가 좀 많다.
딸을 애지중지하는 아버지에게 사윗감의 나이가 딸보다 열 살 정도 많다는 건 큰 단점일 거다.
“그나저나, 왜 아직 전하께선 안 오시는 거예요?”